박무정 [SF] 첫 번째 키스 1. 토성을 향하여... 1. 11월 15일. 지구행 여객선 <아르테미스> 호 연회실. 문을 여는 순간 부드러운 선율이 그의 귀에, 그리고 온몸 에 스며들었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수많은 사람들 이 품위 있는 의상으로 어우러져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사람들, 저런 사람들, 그리고 그는 멈춰섰다. 저만치 앞에 그녀가 눈에 띄었다. 그녀 앞에는 몇명의 젊 은이들이 둘러싸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혹은 그의 눈에는 추근거리는 놈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울적 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서서 가끔 칵테일 잔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좋은 밤이군요."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잠시 후 차분해진 듯 그를 뚜 렷이 노려보는 그 눈빛. 눈 앞에 번쩍이는 불빛. 그는 왼쪽으로 돌아간 고개를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오른 쪽 뺨이 얼얼했다. 무의식 중에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정신 을 가다듬고 보니 그녀의 오른 손에는 칵테일 잔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자세로 보건대 왼손으로 뺨을 때린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왼손잡이던가? 그러고보니 떠오 르는 기억이.... 순간 그녀가 뒤돌아서서 걸어갔다. "잠깐만요!" 그는 뒤따라가며 외쳤다. "정나미 씨!"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 아가더니 곧 객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닭 쫓던 개처럼 그는 멍하니 서있었다. 오른쪽 뺨이 얼얼 했다. 그녀가 왼손잡이였나? 그는 지난 기억을 되살리기 시 작했다. 2. 5개월전. 6월 10일. 지구 궤도상 우주정거장 <깔끄미>. 에어록 통로. 선유의 얼굴은 극도로 창백해 보였다. 무정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몇 걸음 저 쪽에 있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선유, 정말 괜찮겠어? 넌 입원해야 돼." 선유는 뒷걸음질쳤다. "제발, 제발 더 이상 날 찾지 말아요!" 그녀의 표정에 서려있는 고통은 너무도 처절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그 모습. 그 큰 키에 어울리지 않는 그 여 린 모습. "내 말 좀 들어봐! 지금 너는 환자야. 입원해야 한단 말 야!" 그가 다가갔다. 그녀는 손을 저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무정 씨 말대로 난 정상이 아니에 요. 단순히 치료만 받으면 끝날 환자가 아니란 말예요!" "그런데 왜 내게 말을 않는 거야? 제발 모든 걸 말해줘!" "다 필요 없어요. 내 고통을 어느 누가 알까요? 이건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단 말예요!" 그녀는 울부짖었다. "뭘 겪어봐야 하는데? 난 널 사랑해! 난 당신 고통을 이해 하고 싶어. 그러니까 제발 가서 치료부터 받고...." "치료라고요? 의학적으로 볼 땐 난 정상이에요. 하지만 말 로 할 수 없는...." 그녀는 격한 감정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날 못 믿어? 난 널 사랑한단 말야. 내 사랑도 못 믿어?" "사랑이라고요? 물론 나도 무정 씨를 사랑해요. 그러니 까...." 무정이 다가가자 그녀는 얼른 에어록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얼른 쫓아갔지만 이미 그 문은 굳게 잠겼다. 유리창을 통해 그녀 모습이 보였다. "뭐하는 거야? 선유! 제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선외로 통하는 문 의 손잡이를 작동하고 있었다. "안돼! 제발 돌아와." 그녀가 돌아보았다. 그리고 뭐라고 말했지만 굳게 닫힌 문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사랑해요. 그렇게 말했을까? 아니면, 잘있어요? 그녀가 손잡이를 비틀었다. "안돼!" 에어록에서 선외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의 모 습은 순식간에 빨려나가 멀어져갔다. 3. 7월 16일. 소행성대와 목성 사이의 우주. 토성행 여객 선 <아르테미스> 호 연회실. 부드러운 선율이 그의 귀에, 그리고 온몸에 스며들었다.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품위 있는 의상으로 어우 러져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 저런 사람들, 그 러나 그는 울적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서서 가 끔 칵테일 잔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를 향해 한 여자가 다 가왔다. "울적해 보이시는군요?" 무정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잠시 후 차분해진 듯 그녀를 뚜렷이 노려보는 그 눈빛. "누구시죠?" 그녀가 미소지었다. "저는 정나미라고 해요. 한국 출신이고요. 음, 당신도... 한국 사람이죠?" "그런데요?" 그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이런 늘씬한 미녀가 말을 걸어오다니.... 울적했던 마음의 응어리들이 그녀의 미소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 싶었다. 하 지만 발정난 수캐처럼 무조건 히히덕거릴 수는 없었다. 선 유, 그녀가 죽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금도 선유의 죽음 때 문에 고뇌하고 있었는데.... "지금 어떤 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딱딱하시군요?" 나미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그러나 조금은 날카 롭게 말했다. 어쭈? 이것봐라? 잠자코 있는 사람, 자기가 먼저 시비 걸 어 놓고서.... 용건이 뭡니까? 이렇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는 참았다. 개인적인 감정으 로 이곳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미소짓고 있 었다. 그리고 그녀는 미녀였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무정은 가볍게 고개 숙여 예의를 표명했다. 그녀는 미소지 었다. "뭔가 마음 아픈 일이 있나봐요? 벌써 몇 주째 봤지만 혼 자 계실 땐 항상 울적하시더군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를 계속 지켜봤었나? 울적한 분위기 때문에 미녀의 관심을 끌었다? 이건 신나는 일인데? "실은...," 그가 입을 열었다. 분위기 있게 고개를 숙인 채로. "친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 달쯤 전에 죽었죠." 슬쩍 눈을 들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대로 놀란 표 정이었다. "저런! 안됐군요. 어쩌다가...?" "자살이었죠." 문득 그날의 기억이 눈 앞에 떠오르며 가슴이 저며왔다. "치료라고요? 의학적으로 볼 땐 난 정상이에요. 하지만 말 로 할 수 없는...." 그녀는 격한 감정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날 못 믿어? 난 널 사랑한단 말야. 내 사랑도 못 믿어?" "사랑이라고요? 물론 나도 무정 씨를 사랑해요. 그러니 까...." 무정이 다가가자 그녀는 얼른 에어록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얼른 쫓아갔지만 이미 그 문은 굳게 잠겼다. 유리창을 통해 그녀 모습이 보였다. "뭐하는 거야? 선유! 제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선외로 통하는 문 의 손잡이를 작동하고 있었다. "안돼! 제발 돌아와." 그는 외쳤다. 그녀가 돌아보았다. 그리고 뭐라고 말했지만 굳게 닫힌 문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사랑해요. 그렇게 말했을까? 아니면, 잘있어요? 더 이상의 장면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착잡한 마음을 억누르며 겨우 말을 이었다. 여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 서. "뭔가 정신적인 고통이 심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그녀의 일과 관련됐다는 생각이 들었 죠. 난 꼭 그것을 밝혀내리라 생각하고 그곳 근무에 자원했 어요. 지금 가고 있는 곳, 티탄에 있는 연구소 <돈 루카>가 그곳이죠." "어머, 저와 같은 곳에 가는군요?" 그녀가 반가움 반, 놀라움 반의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무정은 고개를 들어 그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을 하러 가는 거죠?" 그의 목소리에는 의구심과 걱정이 함께 섞여서 울려나오고 있었다. "당연히 연구직이죠. 극비사항이라서 무슨 연구를 하게 될 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뭐 내 전공이 생물학이니까 관련된 일이겠죠." "그래요? 그녀도 당신처럼 연구원이었죠. 전공도 생물학이 었고. 이름이 한선유인데 혹시 알아요?" "모르겠는데요." 나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기가 했던 일이 뭔지는 절대 말을 않더군요." 무정이 말했다. "당연히 그럴 거에요. 우린 어떤 성취감이나 모험심 같은 것 때문에 자원한 게 아녜요. 단지 많은 보수에 끌려 그 삭 막한 토성까지 가게 됐지만, 지원할 때부터 전제조건으로 그 얘기가 나오더군요. 그곳에서의 연구는 극비이니까 아무리 하찮은 내용이라도 누설하면 안된다고." "그렇군요." 무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무정 씨는 어떤 일을 하시죠?" 그녀 눈에서 호기심이 빛났다. "난 안보국 요원이죠. 선유의 죽음에 얽힌 내막을 알기 위 해선 다른 방법보다 내가 직접 그곳에 가보는 게 났다고 생 각돼서 일부러 지원했어요." 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체해진 분위기를 바꾸 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최소한 우리들처럼 돈에 미쳐서 가시는 건 아니군 요?" "그건, 그렇죠." 처음으로 무정이 미소지었다. "그런데 우리...라고 말했죠? 이번엔 몇 명이나 가는 거 죠?" "스무 명이요. 삼개월마다 스무 명씩 새로운 연구원들이 투입되는데 이상한 건 근무기간이 일 년이란 점예요. 그들 말로는 외계에서의 장기근무가 건강에 어쩌구 하는데...." "그리고 연구원은 모두 여자라고 했죠?" 무정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건 폐쇄된 상황에서의 근무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유리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다면 왜 일 년이란 제한을 두는 거죠? 그리고 무슨 놈의 연구를 경계근무나 생산공장 교대근무처럼 사람을 계속 바꿔가면서.... 더욱이 그곳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은 계약기간이 3년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 눈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연구원들은 좋지 않은 환경에 노출되어 근무하는 게 아닐까요? 방사능이라거나 가스, 혹은 미생물 등...." 그녀는 대답 대신 입술을 꽉 다물어 귀여운 표정을 지었 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3. 7월 21일. 목성 궤도. 아르테미스 호 도킹 포트. 위성 에우로파 쪽에서 셔틀선이 날아왔다. 마치 상어의 턱 밑에 늘어붙는 빨판상어처럼 따라붙은 셔 틀선은 이내 자세를 안정하면서 여객선에 도킹했다. 셔틀선 쪽에서 몇 명의 승객이 여객선에 옮겨탄 후 도킹 포트에서 기다리던 많은 승객들이 통로쪽으로 사라졌다. 토성으로 가는 승객들도 특별한 소일거리가 없어 테라스에 나와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체 승객의 70퍼센트 이상이 빠져나가는군요." 나미가 말했다. "그럴 수 밖에 없죠. 목성이 훨씬 먼저 개발됐으니까요. 여기만 해도 기지가 열 군데가 넘지만 토성에는 겨우 안보기 지와 돈 루카 연구소밖에 없거든요." 무정이 대꾸했다. 며칠 사이에 두사람은 매우 친해져서 그림자처럼 붙어다 녔다. 그녀는 처음부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무정으로서 는 선유가 빠져나간 빈 자리에 나미라는 새로운 여자가 들어 와 자리잡은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 다. 무정은 무의식중에 어떤 책임감에 얽매어 있는 것이었 다. 사랑하던 여자를 지키지 못했던 그 책임, 그것이 나미라 는 다른여자--그러나 매우 비슷한 조건을 갖춘 여자에 대한 의무감으로 전이되어 버린 것이었다. 많은 점에서 나미는 선유와 비슷했다. 물론 얼굴은 달랐지 만 키가 크고 늘씬하다는 점, 둘 다 생물학을 전공한 연구원 이라는 점. "그런데 저 셔틀선을 조종하려면 매우 힘들겠죠?" 그녀가 물었다. "그건 왜죠?" 무정이 되물었다. "생각해 봐요.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여객선에 도킹 하려면 힘들 거 아녜요?" 무정은 웃으며 그녀의 팔을 토닥거렸다. "여긴 우주공간이에요. 주변에 아무것도 거치는 요소가 없 어요. 공기저항도, 중력도. 이런 상태에서는 어차피 속도라 는 개념은 상대적이 되죠. 크기에 비해 엔진출력이 높은 셔 틀선이 이 여객선과 같은 속도까지만 가속되면 그때는 상대 적인 속도 개념이 없어지죠. 그럼 그냥 우주 공간에 정지해 있는 우주선끼리의 도킹과 다를 게 아무것도 없어요. 조금의 제어만이 필요할 뿐이죠." 무정이 설명하는 내내 눈의 초점을 특정한 곳에 두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나미가 곧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러네요. 지구 정지 궤도상에서의 도킹이나 전혀 다를 게 없군요. 그런데 무정씨도 셔틀선을 조종해 보셨어 요?" 무정이 그녀 눈을 뚜렷이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대 답했다. "아뇨!" 4. 8월 7일. 토성 궤도 근접. 토성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영상으로만 보아온 저 위대한 행성을 실제 육안 으로 보는 것이었다. 거대한 행성을 감싸고 있는 육상경기의 트랙 같은 테. 그리고 많은 위성들. 그 중에서 유난히 돋보 이는 티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 족의 이름을 딴 저 위성 궤도에 지금 그들이 가고 있는 돈 루카 연구소가 있는 것이다. 무정과 나미는 우주선 정면에 있는 커피숍의 거대한 창가 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군요." 나미가 말했다. "맞아요. 당신 모습처럼." 내가 너무 고전소설 같은 표현을 했나? 무정은 좀 어색한 기분이 들어 쑥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녀 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무정을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정말 신의 이름을 붙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농 업의 신이라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면 당신도 여신에 비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되 는데요?" 둘은 다시 마주보았다. "자꾸 이렇게 띄우실 거예요? 괜히 쑥스럽게." 나미가 가볍게 주먹으로 무정의 어깨를 툭 쳤다. "띄우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런 거죠, 뭐. 당신은 마치 한 명의여신 같소이다." "무정 씨 말은 마치 고전 연극에서 따온 대사 같군요. 그 런데 이 여객선에는 여신이 스무 명이나 되는 걸요?" 스무명의 여신? 하긴 그녀 말은 맞았다. 돈 루카 연구소에 자원한 연구원 들은 모두 키가 175 센티미터를 넘는 늘씬한 미인들이었다. "정말 어딘가 이상하군요? 이건 연구원이라기보단 마치 미 쓰 돈 루카를 뽑은 것 같은데요? 모두 늘씬하고 건강미 넘치 고... 혹시 지원자를 선발할 때 외모도 따지나요?" 무정의 표정에 약간의 의혹이 일고 있었다. "그런 것 같았어요. 면접 볼 때 복장을 반바지에 반소매 티셔츠로 제한하고 있었거든요." 그녀의 표정도 무정을 닮아가고 있었다. "반바지에 반소매라.... 이건 수영복 심사에 버금가는군 요. 분명 뭔가 있어요. 설마 소장이나 장기근무자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눈요기감을 고르는 것도 아닐 텐데...." "뭐예요?" 그녀가 눈을 흘겼다. "아니, 이건 농담이 아녜요. 여성 연구원들을 외모를 보고 뽑는다는 건 어딘가 의심나는 구석이 있어요. 물론 직접적인 성접촉을 위한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건 그렇죠. 연구소 내에선어떤 형태로든 남녀간의 성 접촉을 금한다고 교육받았으니까요." 그녀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긴데," 무정이 말했다. "연구소 이름이 참 특이하지 않아요? <돈 루카>. 루카라면 성경의 신약에 등장하는 '누가'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왜 <산 루카> 또는 <산타 루카>가 아니고 <돈 루카>인지.... '돈'이라는 호칭은 스페인 귀족 앞에 붙이는 거지, 성자 앞 에 붙이는 게 아니거든요." "그 말도 맞긴 해요. 하지만 뭐, 그런 것까지 따질 순 없 죠. 뭔가 나름대로의 뜻이 있겠죠." 그녀는 무정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무정 씨는 애초에 지원할 때의 의도 때문인지, 하 찮은 것 하나에 관해서까지 의문을 갖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럴 겁니다. 난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죠." 나미는 무정의 가슴을 톡톡 치며 미소를 지었다. 5. 8월 8일. 토성 궤도. 아르테미스 호 도킹 포트. 무정과 나미는 현창을 통해 다가오는 두 정의 셔틀선을 바 라보고 있었다. 다른 승객들도 그들 주변에 서있었다. 지금 까지 인류가 진출한 태양계 외곽의 최전방. 이곳이 이 여객 선의 종착점이었다. 승객들이 갈아타고 난 뒤에도 여객선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에너지 절감과 가속시간 단축을 위해 서. 처음 진수한 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단지 토성의 중력을 이용하여 감속하면서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다시 태 양계의 중심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다. 안보기지로 가는 승객들은 다른 쪽 도킹 베이에서 대기하 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그리고 연구소로 향 하는 승객은 무정과 스무 명의 미녀들. 마치 수많은 꽃들 틈 에 혼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다. 안보기지로 가는 셔틀선이 먼저 도착했다. 도킹 베이의 출 입문이 열리자 열 명 남짓한 승객들이 내렸다. 얼마후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도킹 베이의 문이 열리고 곧 늘씬한 미녀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정과 함께 있는 미녀들처 럼.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상당히 창백해 보였다. 주변에서 소프라노 조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 년간의 근무 를 마치고 지구로 돌아가는 선배들의 창백한 얼굴들을 보고 모종의 불안감을 느꼈으리라. 무정은 나미의 표정을 살폈다. 그동안 무정과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던 그녀는 다른 여자들보다는 덜했지만 역시 초조한 빛을 감출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역시 어딘가 이상하군요. 닫혀진 환경 내에서 오래 생활 했기 때문일까요?" 나미가 물었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역시 뭔가 있어요." 무정이 대답했다. 그녀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런 말을 하면 안되지만 그래도 미리 주의시키고 싶기 때문이었다. 셔틀선의 승객이 다 나오자 연구소로 갈 승객들이 셔틀선 으로 옮겨타기 시작했다. 무정과 나미는 일행의 맨 뒤에 섰 다. 그들의 짐은 화물통로를 통해 자동으로 셔틀의 화물구역 으로 옮겨지게 되어있었다. 무정은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직 셔틀의 화물이 내려지고 있었다. 여자들은 짐도 많아! 그는 생각했다. 하긴 여자들은 옷이 많으니까 이해해야지. 그런데 지금 나오는 화물은 뭔가 달랐다. 저건 뭐지? 일반 여행객 화물과는 다른뭔가가 나오고 있었다. 더 크 고 무슨 표시가 되어있는 그것들.... 그 표시를 자세히 눈여 겨보니 돈 루카 연구소의 로고였다. 6. 토성의 위성 티탄 궤도상 연구소 <돈 루카>. 도킹 포 트. 셔틀선이 도킹하자 곧 문이 열리며 스무 명의 미녀와 그들 에 둘러싸여 무정이 들어섰다. 그곳에는 단지 안내원 하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기대가 깨지는군. 무정은 생각했다. 너무 썰렁한 환영이 야.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온 그로서는 바라지도 않았지 만 함께 온 아가씨들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원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요, 여러분.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 다." 안내원은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뒤를 이었다. "저는 이곳 안내 담당인 클린턴 하사입니다. 여러분이 이 곳에 익숙해질 때까지 제가 안내하게 됩니다. 가져오신 짐들 은 표찰에 따라 자동으로 각자의 숙소로 옮겨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제가 숙소로 모셔드리겠습니다. 여장을 풀고 난 후 회의실에서 소장님의 환영인사가 있을 겁니다." 늘 하던 대로 계속 떠들어대던 안내원은 무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그리고 박무정 대위님은 먼저 소장님께 보고를 하시 죠? 저기 보이는 빨간 로봇을 따라가시면 될 겁니다." 클린턴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별로 기분 좋게 생기지 않은 로봇, 빨간 색이라기엔 좀 칙칙한 다갈색의 로봇이 서있었 다. 드럼통같이 생긴 로봇 하나가. 무정은 나미를 돌아보았다. 그녀 얼굴에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지구로부터 십억 킬로 이상 떨어진 외계에서 계속 함께 지내온 사람과 갈라져서 행동해야 하는 그 불안감. "나중에 봐요." 무정은 가볍게 한 마디를 던졌다. 그녀는 고개만 끄덕였 다. 그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은 채. 무정이 다가가자 로봇이 웅얼거렸다. "저를 따라오십시요." 지겹다! 무정은 혐오감이 느껴졌다. 너같은 고철 쪼가리가 웅얼거리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로봇의 뒤를 따라가면서 살펴보니 어딘가 우중충한 느낌이 들었다. 실내의 보수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지구 로부터 너무 떨어진 오지라서 그런가? 꼭 그런 것 같진 않은 데. 빌어먹을! 물론 그 자신에게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소 위 시절에 해적들이 들끓는 화성 제3안보국에서 근무할 때는 이보다 더 열악했으니까. 하지만 그녀, 나미에게 있어서는 이곳이 어떻게 느껴질까? 안내 로봇은 복잡한 통로를 따라 거침없이 나아갔다. 무정 도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어느 순간 로봇은 한 통로의 끝에 있는 문 앞에 멈춰섰다. 7. 소장실. 무정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대머리에 안경을 쓴 고리타분하게 생긴 소장이 정면 탁자 너머에 앉아있었다. 무정은 거수경례를 했다. 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로 전입한 박무정 대위입니다." 소장이 무정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눈은 가늘고 매우 예리해 보였다. "어서 오게. 박무정 대위." 소장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고 난 후 소장은 무정을 낮은 응접 테이블 앞으로 데려가 소파에 앉도록 권했다. 그 리고 자신은 맞은 편에 앉았다. "이곳에 온 걸 환영하네. 별로 화려한 곳은 아니지만." 소장이 관료적인 냄새를 친절함 속에 감추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무정은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는 계속했다. "정말 별로 화려한 곳은 아니군요. 하지만 이런 오지에 그 런 걸 바라고 온 건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네. 아뭏든 이곳에 왔으니 잘 적응하길 바라 네." 무정은 소장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경계심을 느낄 수 있 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읽은 것 같다는 생 각이 들었다. 이놈들이 어떤 놈인데. 그들은 선유와 그의 관 계를 어느 정도, 아니면 상당히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뭔 지는 모르지만 극비 사항을 다루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의 뒷 조사는 충분히 했음에 틀림 없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여기는 정말 외로운 곳일세." 소장은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구원들과 가까이 지내진 말게, 절대 로!" 절대로! 소장은 그 단어에 특히 힘을 주며 말했다. "우린 근무하러 여기 온 것이지, 사교를 하러 온것은 아닐 세.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성과의 교제는 삼가해 주게. 저들 은 매우 중요한 연구를 하는 연구원들이고, 우리는 단지 이 곳의 안보를 지키는 요원일세. 그들과 우린 별개야. 우주 외 곽의 공통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동질성이 없단 말일세. 자넨 2년간의 근무를 끝내고 지구로 돌아가면 끝일세. 그게 전부야. 그리고 이곳에서의 근무는 지구행 여객선에서 잊어버리면 끝이고. 내 말, 알아듣겠나?" 처음부터 정말 심하군. 기가 막혔다. 이게 새로 온 직원에 게 해야 하는 첫 환영사인가? 아니, 이건 환영사가 아니라 강요이자 경고다. 뭔가 이상하긴 이상하군. 하지만.... "잘 알겠습니다." 무정이 힘주어 대답했다. 8. 회의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길게 뻗은 테이블의 끝에 앉은 소장이 입을 열었다. 억지 로 꾸며낸, 혹은 스스로는 자연스럽다고 여기겠지만 무정이 보기에는 매우 상투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현재 태양계에 인류가 퍼져있는 끝에서 끝, 그 먼거리를 오시느라고 매우 피곤하셨을 겁니다." 피곤하긴! 오히려 두 달에 걸친 여행보다 더 피곤한 건 불과 두 시간 밖에 안된 이곳의 분위기였다. 처음엔 안내원, 칙칙한 색깔 의 로봇, 우중충한 통로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안드는 것은 바로 저 소장의 행동.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이곳의 칙칙한 환경이 마음에 안들 것이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최전방입니다. 여러분도 그 점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 니다. 그리고 곧 익숙해질 젓이란 것도." 소장의 주절거림을 뒷전으로 두고 무정은 연구원들, 지금 껏 이런 열악한 환경을 별로 경험해 보지 못했을 스무명 아 가씨들의 표정을 살폈다. 낯선 곳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혹 은 흥분감이 그들 모두에게서 느껴졌다. 맞은 편에 앉은 나 미는 소장이 떠들고 있는 동안 가끔씩 무정쪽을 돌아보며 마 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동료들끼리 연 구내용을 발설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극비사항인 만큼 모든 연구는 분리되어 행해지고 개개인 간에는 아무런 공통 사항이 없으니까요." 뭐 이따위 연구가 다있어? 무정은 기가 막혔다. 물론 지구연방의 중요 프로젝트이므 로 어느 누구도 개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설 일은 아니 었지만, 연구원끼리의 토의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연구? 자신은 연구소에 근무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것이 연구소의 방침이니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지. "마지막으로 또 한가지. 이것은 여러분께서도 이미 교육 받은 사항이겠지만, 노파심에서 한 번 더 밝혀 둡니다. 이곳 은 남녀의 사교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절대로! 이성간 의 육체적 접촉을 금합니다." 또 절대로! 왜 꼭 이 대목에 오면 목소리에 힘을 줘서 말 하지? 너무 오지라서 지저분한 성관계로 얼룩진 전례가 있었 나? "이곳에서의 근무는 한 때입니다. 이성교제는 지구에 가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익히 잘 알고 계시겠지만 만약 어떠한 형태이던 이성과의 성적 접촉이 있을 때는 즉시 추방입니다. 바로 지구로 귀환시킨다는 말입니다. 물론 계약조건에도 들 어있지만 단 한 푼의 급료도 지불하지 않는 상태에서." 9. 식당. "어떻게 생각해요? 소장의 훈시에 대해서." 무정이 물었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이곳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 죠." 나미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배급받아 적당한 테이블을 찾아가고 있었다. 대충 둘러보니 백 명 남짓한 여자와 스무 명 정도에 불과한 남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또한 중요한 점은 남 녀가 함께 어울려 있는 식탁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 만 몇 몇 남자들이 여자들과 한 식탁에 어울려 식사를 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것이강제적이라기보다는 자의에 의한 것 같았다. 아마 급료를 한 푼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의 추방이 두려웠던 것 같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이곳의 급여수준 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특히 연구원들에게는 태양계 어느 곳의 것보다도 몇 배는 높았으니까. 아마 이곳에서 일 년간 만 근무하면 연봉과 보너스를 합쳐서 지구의 웬만한 연구소 에서 오년간 근무한 만큼의 금액을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지금 눈 앞에 앉아있는 나미 뿐만 아니라 전에 선유도 그랬 으니까. "무정 씨도 조심해요, 알겠죠?" 식사 도중에 나미가 말했다. 무정은 시금치를 입에 넣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뭘 말이죠?" "앞으로 이성간의 행동을 주의하라구요. 나에게도 여객선 에서처럼 다독거리는 행동도 하지 말구요." 무정은 모든 행동을 완전히 멈추고 그녀만 바라보았다. "난 도중에 추방당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 말이 좀 거슬리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알았죠?" 맞아. 나미 당신뿐만 아니라 전에 선유도 그랬으니까. 난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선유도 그랬으니까. 무정은 전혀 불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도 만족한 듯 식사를 계속했다. 10. 8월 9일. 회의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곧 무라야마 중위가 와서 브리핑 을 할 겁니다." 클린턴 하사가 말했다. 무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 나가버렸다. 무정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주변을 훑어보았 다. 오십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회의실에 무정 혼자만이 앉아있었다. 제기랄, 썰렁하군. 어제까지 주변에서 북적거리 던 스무 명의 미녀들은 다 어디 가고.... 발자국 소리. 회의실 안으로 정복 차림의 사내가 들어섰 다. 동양인. 하지만별로 달갑지 않은 얼굴. 일본놈들은 정 이 안가. 무정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항 상 친절한 척하고, 좀처럼 속마음을 보이지 않고, 비굴하고, 행동하는 것이 조잡스럽고, 또.... "안녕하십니까, 박 대위님?" 강단 위에 올라선 무라야마 중위가 입을 열었다. "저는 돈 루카 안보국 소속 무라야마 중위입니다. 우선 대 위님이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도 반갑네, 무라야마 중위." 무정은 내키지 않았지만 겉치레의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브리핑에 들어가겠습니다. 우선 대위님의 업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라야마 중위 뒤쪽의 벽이 영상 화면으로 바뀌었다. 처음 장면은 태양계 전체의 모습이었다. 무라야마는 태양계 내에 서의 토성 기지의 입지라든가 중요성 등을 설명했다. 화면이 확대되더니 토성과 그 위성들만이 화면을 가득메웠다. 무라 야마는 토성 안보기지와 연구소간의 연락 및 상호 지휘 체계 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 장면은 무정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이 었다. 도킹 포트. 계속되는 무라야마의 설명. 화면은 계속 바뀌면서 무라야마는 거침 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상황실, 거주 구역, 각 통로들, 창고, 연구실, 그리고 잠깐 비치고 지나가는 또 하나의 구역! "잠깐! 저건 뭔가?" 무정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떤 것 말입니까?" 무라야마 중위가 반문했다. 이미 그 화면은 지나가고 없었다. "화면을 뒤로 돌려보게." "그건 안됩니다." 중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뭐? 안된다고?" 무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렇습니다. 그 구역은 우리가 관계할 곳이 아닙니다. 단 지 참고 삼아 잠깐 비쳤을 뿐이죠." "참고 삼는다고?" "그렇습니다." "참고 삼는 것을 그냥 스치고 지나가나?" 무정은 언성을 약간 높였다. "연구소의 방침입니다." 연구소의 방침? 그렇지. 너무 캐물으면 안되지. 오히려 앞 으로 행동하는데 주의를 끌 수도 있으니까. "알았네. 업무상 하나의 요소도 놓칠 수 없다 보니.... 계 속하게." 무라야마의 설명은 두 시간 가까이 계속되었지만 단서를 잡을 수 있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 가지 있다면 잠 깐 스치고 지나간 그 화면.... 어쩌면 그것이 포인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11. 식당. 무정은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미는 다른 여자와 마주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번 에 함께 온 그녀의 동기였다. 무정은 배식을 받자마자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나미도 무 정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그를 돌아보았다. 무정은 그녀의 옆자리로 갔다. "안녕하세요?" 그는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대꾸한 후 식사를 계속했다. "이곳에선 아침에 만날 수가 없더군요? 침실에서 간단한 식사가 나올 줄이야...." 무정이 말했다. 나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능한 한 사람들의 접촉을 막으려는 것 같지 않아요?" 무정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맞아요. 그러니까 무정 씨도 행동에 신중을 기하세요." 나미도 낮은 소리로 대꾸했다. "잘 알았습니다." 무정이 빈정거렸다. 나미가 돌아보았다. 무정은 짓궂은 웃 음을 지었다. 그녀도 안심한 듯 웃었다. 11. 상황실. 무정은 클린턴의 안내를 받아 상황실 안으로 들어섰다. 직경 5미터 정도 되는 원형의 실내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 저 눈에 띄는 것은 맞은 편에 위치한 거대한 스크린이었다. 다른 쪽 벽에는 여러 개의 감시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빙 둘러가면서 이어진 제어반. 안에 근무하는 요원 은 둘 뿐이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클린턴은 위치만 안내하고 곧 돌아갔다. 무정이 들어서자 요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앞에 와 선 요원들이 경례를 했다. 무정이 답례하자 한 명 이 자신들을 소개했다. "저는 마이어 중위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슈타이너 중사입 니다." "반갑네. 난 박무정 대위일세." 무정은 손을 내밀었다. 먼저 마이어 중위와 악수한 후 슈 타이너 중사의 손을 잡았다. 중사의 눈빛은 매우 예리했다. "마이어 중위." 무정은 다시 중위에게 돌아섰다. "예, 대위님." 중위가 대답했다. "간단하게 업무설명을 해주게." 무정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가능하면 위엄 있어 보 이는 자세로. "예, 아시다시피 여기는 상황실입니다. 모든 보안 시스템 은 컴퓨터 스스로가 알아서 처리하기 때문에 그다지 큰 업무 는 없지만 시스템이 스스로 조치할 수 없는 특별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음성으로 보고가 들어옵니다. 그럴 때는 사람 이 그 상황을 살펴본 후 조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특별한 상황>이란 게 뭔지 예를 들어 주겠나?" 무정이 중위의 말을 가로채 질문했다. "예를 들면, 내부 직원들과 관련된 일입니다. 외부인의 침 투는 시스템이 스스로 감지하여 경보를 발령하지만, 내부인 들의 이상행동이나 규칙위반 등 결정을 내리기 애매한 경우 가 있습니다." "내부인의 문제라.... 뭐 특별한 전례는 없나?" "사고 사례를 본다면 먼저 지난 해 오월에 있었던 이성간 의 성 접촉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록 화면을 보니 통로에서 현기증을 일으킨 연구원을 안보 요원이 부축 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경우는 지난 일월에 한 연구원이 실 수로 자기 구역을 벗어나 다른 연구실로 들어갔던 일이 있습 니다. 가장 재미있던 경우는 한 달 전 두 연구원의 동성연애 적 행위였습니다. 시스템은 이성간의 성접촉을 감시해 왔지 만 동성간의 문제에 대해선 전혀 지시 받은 사항이 없었으니 까요. 하지만 역시 기록을 보니 동성연애라기보다는 단순한 장난이었는데 시스템이 착오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작년 오월, 지난 일월, 그리고 한 달 전이라...그러면 선 유는 아니었다. "그리고 한 연구원이 히스테리를 일으켰던 사건도 있죠." 무정은 본능적으로 돌아보았다. 슈타이너 중사의 말이었 다. "히스테리?" 히스테리라고? 이거야말로 그가 원하던 소재였다. "중사!" 마이어 중위가 주의를 주었다. 슈타이너 중사는 중위를 힐 끗 쳐다보고는 능청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정은 두 사람의 얼굴을 살핀 후 중사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슈타이너 중사. 그 사건에 대해 보고하게." 중사는 곁눈으로 힐끗 중위를 살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담담하게 말했다. "어떤 여자가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지난 사월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취침 시간에 갑자기 경 보가 울렸죠. 저도 비번이라서 침실에 있었는데 급히 복장을 갖추고 나가보니 한 여자가 잠옷 차림으로 거주구역 통로를 뛰어오더군요. 뭐라고 마구 주절거리면서 말입니다." 무정의 눈빛이 빛났다. 다음 순간 그는 주변을 의식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바꿨다. 자칫하면 자신의 목적이 들통날 수 도 있었다. "그래, 뭐라고 떠드는 지 기억나는 게 있나?" 그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도 횡설수설 해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악마의 씨 가 어쩌니 떠들더군요." 중사는 그다지 재미 없다는 표정으로 약간의 제스처를 써 가며 설명했다. "악마의 씨라... 그거 재밌군." 무정은 뭔가 치밀어 오르는 속마음을 감추며 빈정거렸다. "자기가 악마의 씨를 잉태했느니 어쩌니 떠드는데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를 말만 하더군요. 하긴 우리야 연구원들 일 에 대해선 전혀 알 수 없으니까." 중사는 흥미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이런 오지의 폐쇄된 환경에서 있다보면 그런 일도 발생할 수 있겠지. 어쨌든 재미 있게 들었네." 무정은 무관심을 가장해서 말했다. 더 이상 캐묻는 건 무 리일 것 같았다. 분명 그들도 감시를 받고 있을 테니까. 일 단 뭔가 단서는 잡았다. 첫날부터 눈길을 끌면 안되니까 오 늘은 여기서 끝내야지. 그는 마이어 중위 쪽으로 돌아앉았 다. "중위, 계속하게." 중위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슈타이너 중사를 노려보다 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주된 감시 포인트는 모두 내부입니다. 연구소 외부의 경비는 연방군 항모와 순양함, 그리고 경비정들이 해 주고 있습니다. 내부에서는 우선 도킹 포트, 각 통로, 거주 구역, 식당과 휴게실, 창고...." 중위의 설명에 따라 거대한 메인 스크린에 해당 장소들이 비치며 지나갔다. 하지만 뭔가 빠진 게 있었다. 모두 주변 시설 뿐 핵심적인 부분은 모두 누락되어 있는 것이었다. "연구실 쪽은 어떻게 되나?" 무정이 물었다. "그쪽은 우리와는 별개의 구역입니다. 그 구역은 별도의 감시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 만 소장님과 몇 명의 핵심 멤버들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군!" 무정이 혀를 찼다. "그럼 우리가 하는 일이란 그저 들러리에 가까운 게 아닌 가?" 잠시 주저한 후 중위가 대답했다. "말하자면, 그런 셈입니다." "잘 알았네. 좀 기분은 상하지만 일거리는 적어서 좋군." 무정이 말했다. 12. 거주구역 통로. 무정은 식당을 향해 걷고 있었다. 17시에 근무 교대를 한 후 숙소에 들어가 가볍게 샤워를 하고 평상복 차림으로 바꿔 입은 후 저녁을 먹으러 가는 중이었다. 저 앞에 낯 익은 얼굴이 보였다. 슈타이너 중사였다. 무정 이 느끼기에 중사는 이곳 업무에 충실하면서도 체제에는 불 만을 가지고 있는 듯 싶었다. 지나친 감시와 제재, 까다로운 규칙들....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중사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 다. 그들 중에 조금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 마이어 중위! 분 명 중사를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정은 배식을 받기 위해 긴 대열의 뒤에 섰다. 몇 명 앞 에 마이어 중위와 슈타이너 중사가 보였다. 그들은 낮은 목 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 사건은 입 밖에 내지 말라는 소장님의 지시가 있었잖 아!" 마이어 중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규칙에는 없는 일입니다." 슈타이너 중사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도 윗사람의 지시가 있을 땐 따라야지." 마이어 중위의 언성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당직사령이 아무것도 몰라도 된단 말입니까?" 이번엔 중사도 톤을 높였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두십시오." 중사가 중위의 말을 가로막았다. "난 사실 제가 맡은 일 이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는 확실히 알고 있죠. 처음 연구소가 생길 때부터, 벌써 오 년째 여기서 근무해왔어요. 이곳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요원들이 알아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중사는 주변을 살핀 후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그 신임 대위를 좋아해서 그 얘기를 한 줄 아십니 까? 난 모든 장교들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 대위도 당신처 럼 내 상관이고, 최소한 상황실 사령이라면 유사시에 대처하 기 위해 많은 경험이 있거나, 아니면 사고 사례를 많이 알고 있어야 빠른 판단을 내리는 데 참고가 될 것이라고 난 생각 합니다." 개인적으론 맘에 안 드는 사람이군. 무정은 생각했다. 무 조건 장교들을 싫어하다니. 하지만 이런 곳에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무정의 목적을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사 람일 것 같았다. 자신의 차례가 되어 배식을 받은 무정은 나미가 앉아있는 곳을 찾아갔다. "식사 시간에는 항상 나보다 빠르군요?" 무정이 그녀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입 안 가득히 음식이 들어 있어서 말 대신 웃음으 로 대답했다. "오늘부터 근무에 들어갔나요?" 식사를 하며 무정이 물었다. 나미는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그냥 간단한 교육을 받고 종합진단을 받았어요." "그래요? 난 그런 게 없었는데?" "연구원들은 너무 몰두하다 보면 건강을 쉬이 해칠 수 있 기 때문에 삼 개월에 한 번씩 진단을 받아야 한다더군요." "진단은 누가 합니까? 내가 의사라면 좋겠는데." 무정이 짓궂게 웃었다. "착각 하지 말아요. 의사는 여자에요. 그리고 웬만한 건 로봇이 다 하구요." "그럼 내가 로봇이었으면 더 좋았겠군요?" "짓궂기는...!" 그녀는 팔꿈치로 가볍게 그를 쳤다. "어서 식사나 해요. 이상하게 보겠어요." "그러죠." 그들은 더 이상 말을 않고 식사에만 열중했다. 하지만 가 끔씩 서로를 쳐다보며 미소짓는 것은 잊지 않고. 13. 침실. 침대와 캐비넷, 책장, 책상, 그리고 한 쪽의 샤워실. 이것 이 각 개인에게 주어진 숙소의 기본 설비였다. 무정은 침대에 누워 지난 하루를 돌이켜 보았다. 새로운 근무지에 와서 첫날 있었던 일들. 그 중에서도 가 장 주목할 만한 것은 슈타이너 중사의 말이었다. 한 여자의 히스테리.... 분명 그 여자는 선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악 마의 씨>라는 요소였다. 연구원으로 선발된 여자들은 모두 크고 건강했다. 선유도 마찬가지였고. 또한 과학도--특히 생 물학도들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매우 원론 적이고, 비관념적이며, 또한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 다. 지나친 감상주의, 우울증, 편견, 과대망상 등은 그녀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한 그녀가 히스테리... 그것도 어이없는 악마의 씨 타령이라니. 도대체 이곳에 무엇이 있기에. 이 연 구소의 정체는 무엇인가? 연구의 핵심은 뭐지? 아니, 도대체 연구소인가, 공장인가? 뭔가 제품이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 았는데.... 그러고 보니 어제 아르테미스 호에 선적되던 그 화물들은 뭐였지? 돈 루카 연구소 로고가 찍힌 그 화물들... 의혹은 끝이 없었다. 오늘 오전.... 회의실에서 브리핑 받을 때 잠깐 스쳐간 화면. 그것은 도 대체 무엇일까? 자동창고 같기도 하고, 혹은 생산 시스템의 일부 같기도 했다. 하지만 생산 시스템이라.... 이곳은 연구 소일 뿐이지, 공장이 아닌데. 오랜 훈련에 의해 매우 빠른 눈과 높은 기억 집적도를 가진 그는 이미 뇌 속에 뿌리 박힌 그 영상을 내내 분석해보았다. 여러 구획, 여러 층으로 구 성된 자동창고 시스템, 그리고 각 셀마다 들어있는 것은 캡 슐? 정말 캡슐이었을까? 14. 8월 10일. 상황실. 무정이 들어서자 낯선 두 요원이 돌아보았다. 한 사람은 중위이고 다른 사람은 중사였다. 그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한 후 자기들 소개를 했다. "저는 제임즈 록포드 중위입니다. 새로 오신 박무정 대위 님을 환영합니다." "고맙네." 무정은 록포드 중위와 악수를 하고 중사에게 돌아섰다. "저는 루이스 켈리 중사입니다." 중사가 말했다. "음, 수고들이 많네." 무정이 중사와 악수를 하며 대꾸했다. 록포드 중위와 켈리 중사는 오늘의 당직자들이었다. 이곳의 근무시간 편성은 상황실 당직사령은 낮에만 근무하 지만 당직하사나 당직사관은 24시간 근무를 해야 했다. 따라 서 그들은 격일제의 2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무정은 두 당직자들이 나름대로 한가한 모습 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이봐, 켈리 중사." 무정은 먹이를 노리던 매처럼 켈리 중사가 나른한 듯 기지 개를 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불렀다. "네?" 예상대로 켈리 중사는 벽에 낙서를 하다가 들킨 어린 아이 처럼 놀라며 돌아보았다. 나른한 모습, 그것이 무정이 노린 점이었다. 더욱이 새로 부임해 온 상관 앞에서 그는 분명히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무정이 물었다. "여기 컴퓨터 네트웍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켈리 중사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록포드 중 위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지켜보고 있었다. "네, 우리 안보국 컴퓨터는 크게 보자면 감시 시스템과 방 어 시스템의 두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각종 기계 제 어, 거주관리 등 다른 호스트 컴퓨터와도 연결되어 있습니 다." "이곳 전체 호스트의 구성은?" "그것은 우리 안보 시스템을 비롯하여 기계, 거주, 연구 등 네 가지의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켈리 중사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서로간에 정보 교환이 되겠지?" 무정은 사무적인 태도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연구소 컴퓨터는 완전히 별개입니 다." "음, 그래?" 무정이 끄덕였다. 중사는 계속했다. "연구소 컴퓨터는 다른 어떤 시스템과도 연결되지 않고, 완전히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 일에 대해서는 저희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알았네." 무정은 간단하게 대꾸하고 단말기 쪽으로 돌아앉았다. 무정은 종일 컴퓨터와 씨름했다. 뭔가 통로가 없을까? 연구소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는 경 로는 전혀 없을까?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구 소의 컴퓨터는 아예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어 있었다. 아마 모든 연구, 제어, 감시 시스템도 독자적으로 행함에 틀림 없 었다. 그렇다면 그쪽에고 상황실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근무하 고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는 아마 연구소 직원일 것이다. 그 연구소 직원은 분명히 여기에서 장기체류를 하고 있을 것 이며 다른 연구원들처럼 자주 바뀌지 않을 것이 틀림 없었 다. 연구원들조차도 서로간의 연구내용이 기밀에 붙여져 있 거늘, 그 시스템 전체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터인데 그렇게 자주 교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독신주의자들이겠지. 무정은 쓴 입맛을 다시며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소장을 비롯해서 연구소 상황을 알고 있다는 몇 명만이 그의 궁금증 을 풀어줄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열쇠를 훔쳐 내는 것이 그가 선유의 자살 이유를 캘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아니면.... 아니면 그쪽 시스템에 직접 침투하는 길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곳은 다른 어떤 노드와의 연 결도 되어있지 않고, 또한 직접 걸어 들어갈 수도 없었다. 결국 유일한 방법은 그 몇 사람에게서 정보를 캐어내는 일인 데, 그것도 불가능한 방법일 것이다. 어쩌면 소장을 비롯한 그 몇 명의 핵심 멤버를 유도심문으 로 캐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거주자 간의 사소한 접촉도 감시하고 있는 이곳 에서 그들에 대해 유도심문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이었다. 남은 가능성은 단 하나였다. 바로 연구소의 호스트에 연결되어 있는 단말기. 그 단말기를 직접 다루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구 소에 연결된 단말기는 연구소 구역 내에만 있을 터인데....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장의 방이었다. 15. 식당.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무정은 그들 틈에 서서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정나미는 언제나 앉던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미인 대회 합숙소에 온 것처럼 수많은 미인들이 식당 안에 앉아 있었다. 80명. 80명이라는 미인들이 이 태양계 외곽의 연구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그는 생각했다. 이건 오지에 있는 연구소라기보 다는 휴양지에 온 기분이군. 수많은 미인들이 득실거리는 곳, 지구상에도 이렇게 많은 미인들이 밀집된 곳은 없었다. 그의 차례가 되어 배식을 받은 무정은 나미가 앉아있는 쪽 을 향했다. "오늘은 어땠어요?" 나미의 옆에 앉아 식사 중이던 무정이 물었다. "음, 그렇죠, 뭐." 나미가 대꾸했다. 아직 그녀에게서 이상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오 늘은 겨우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오늘 종일 컴퓨터 시스템과 씨름을 했죠." 무정이 말했다. "그래요? 왜요?" 나미가 물었다. "아무래도 이곳 업무 전체가 컴퓨터에 의해서 이뤄지니까 요." 그는 대답을 하고는 넌지시 나미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음식을 입에 가져가려다가 돌아보았다. "그런가요? 하지만 우린 전혀 컴퓨터를 다루지 않는데?" 무정이 웃었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아, 굳이 말한다면 다루긴 하죠. 그냥 입력 전용의 스캐 너나 숫자판 따위만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군요." 그는 슬쩍 웃어 보이고는 식사를 계속했다. 나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역시 그랬군. 무정은 생각했다. 이곳은 연구원들조차도 컴퓨터를 다루지 않았다. 그 이유는 뻔했다. 연구원 중에서 누군가가 컴퓨터 내부에 침투하지 못하게 사전에 막아버린 것이었다. 역시 뭔 가가 있어. 그것도 보통 정도도 아닌 엄청난 뭔가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16. 8월 11일. 상황실. 무정은 종일 연구소 컴퓨터에 침투할 방법만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완벽 하게 차단이 되어있었다.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구석이 보이 지 않았다. 정나미를 이용하면 어떨까?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로 별 생각을 다해 보았다. 연구 소의 컴퓨터를 검색하거나, 아니면 I/O 컨트롤러 포트 중 하 나에 회선을연결해 달라고 하거나....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연구소 내에서의 일조차 한 마디 안하는 그녀에게 그런 규 칙위반, 아니 범법행위를 부탁한다는 것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하지만 어쩌랴. 도무지 방법이 없는데. 17. 8월 15일. 상황실. 어느새 일주일이 흘러갔다. 그 동안 이곳 일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지만 말이 일이지, 그다지 할 일도 없었다. 그냥 상황실 근무가 전부였고 별 다 른 사건이나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 동안 이곳의 비밀 을 캐려고 조심스레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지만 아직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근무 첫날 알게 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조심스레 움직였다고는 하지만 소장의 눈에는 어떻 게 보였을지 모른다. 뭔가 그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끄는 일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의도를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야 비밀을 캐는 일이 수월해질 것 같았 다. 그는 지난 밤에 궁리해 둔 것이 있었다. 그 대상은 평소에 항상 무뚝뚝한 태도로 상관들을 대하는 슈타이너 중사였다. 그리고 지금은 마이어 중위가 자리에 없었다. "슈타이너 중사!" 무정이 부르자 메인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던 중사가 돌아 보았다. "네?" "중사는 내게 어떤 종류의 불만이 있나? 아니면 모든 상급 자에게 그런가?" 무정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슈타이너 중사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자네가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근무했는지는 몰라도 자네 는 우리 안보국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말게. 그리고 내가 자 네 직속 상관이란 사실도." 무정은 괜히 상대방에게 트집을 잡고 있었다. "항상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역시 중사는 담담했다. "하지만 자네는 항상 자신이 우리 안보국의 핵심이라고 생 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더군. 자네는 일개 요 원--하사관일 뿐이야." "그건 그렇습니다." "설사 자네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무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상황실 안을 거닐었다. 얼마 후 그는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군대생활에서건 사회생활에서건, 좋든 싫든 간에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 중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건 우리 안보국에서도 해당되는 일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무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 차이란," 무정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더욱 거만하게 변해 있었다. "지적, 윤리적 우월성을 말하는 것인데 그건 출신성분과 교육기관 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중사의 표정이 조금, 아주 조금 변해 있었다. 그가 대꾸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에디슨은 무학자였고 호킹은 전신마비였습니다. 더 이상 사람의 능력은 학벌이나 외형 등 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외일세." 무정이 날카롭게 돌아보았다. "난 일반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대위님 학교 선배인 지구연방 의장께서도 학벌이 나 지연제도를 타파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중사가 빈정거렸다. "난 정치가가 아냐!" 무정은 언성을 높였다. "난 한국 출신의 안보국 장교야. 나를 의장과 같은 맥락에 집어넣지 말게!" 중사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점에선 저와 같군요." "음, 그건 그래." 무정은 시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연방의 의장이지." 그는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대화를 이끌어 가면 그다지 좋을 것 같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말입니다." 중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18. 소장실. "부르셨습니까, 소장님?" 문을 열고 들어선 무정이 말했다. 뭔가를 읽고 있던 소장 이 눈을 들었다. "그쪽 소파에 앉게." 무정은 지시대로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가 앉기 무섭게 소장이 입을 열었다. "박 대위." "네?" "자네, 슈타이너 중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소장의 표정에는 약간의 미소가 배어 있었다. 그 미소 뒤 에는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 모르지만. 하지만 자신의 연기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무정은 생각했다. 잠시 생각하 다가 그는 대답했다. "좋은 군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네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군?" 소장의 미소가 조금 희미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무정의 반문은 명료했다. "슈타이너 중사는 훌륭한 군인일세." 소장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 연구소 공사 초기에, 중사는 기술자로 가장하고 침투 한 반체제 테러분자를 잡아냈다네. 또한 몇 년 전에는 연구 원으로 가장하고 침투했던 산업스파이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뿐만 아닐세. 그의 통찰력, 또는 육감은 매우 놀랍단 말 일세. 비록 그 자신도 계급이나 체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 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지." "죄송한 질문이지만," 무정은 조심스레 말했다. "저를 슈타이너 중사와 비교하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아, 그런 건 아닐세." 소장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단지 난 자네가 그와 잘 지내주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말 했을 뿐이네." "알겠습니다. 또한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그와 마찰이 생기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네." "잘 알겠습니다." 무정이 대답했다. 19. 통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무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앞으로 소장은 무정의 숨은 의도를 모 르고 슈타이너 중사와의 인간관계에만 신경을 쓸 것이다. 그 렇게 되면 다른 일을 하긴 매우 유리해 진 셈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슈타이너 중사와의 관계를 계속 불편하게 할 계획이었다. 물론 너무 눈에 뜨일 정도로 하면 안 되었 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뒤에 숨은 그의 의도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소장의 말에 순응하여 말썽 없이 지내는 척 하면서 도 항상 냉전 상태를 유지하고, 필요에 따라 한 번 씩 마찰 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또 한 가지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좀, 아니 어쩌면 매우 위험한 발상이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비밀을 캐야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몇 가지 사항을 검 토할 필요가 있었다. 20. 8월 18일. 상황실. 무정이 출근하자 록포드 중위가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대위님?" "음, 그래, 어제는 잘 쉬었나?" 무정은 거드름을 피워가며 대답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록포드 중위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무정은 눈빛을 움찔했으나, 언제나처럼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그 표정을 감추고 태연하게 물었다. "뭔가?" "어제 사소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위가 말했다. 뭔가 쓸만한 정보가 생겼나? 무정은 중위의 보고를 조금이 라도 빨리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 조급함을 감추 고 여유있게 그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무정이 물었다. "그래, 우선 자리에 앉아서 설명해보게." "네." 록포드 중위는 대꾸하고 자리에 앉자 곧 말을 꺼냈다. "저기 스크린을 지켜보십시오." 무정은 중앙의 커다란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화면에는 여자 기숙사 구역 복도가 나타나 있었다. 그 복 도에는 몇몇 여자들이 오가고 있었다. 무정은 호기심이 동하 여 화면에 신경을 집중했다. 화면의 왼쪽 상단에는 CCTV 카메라 번호가 나타나 있었다. 였다. 또한 오른쪽 상단에는 시각이 적혀있었다. 시 간은 21시 32분이었다. WH는 여자 기숙사를 의미했다. 또한 뒤의 숫자 중 3은 이 곳에서 세 번째 분기를 맞는 여자들의 구역을 의미했다. 즉, 저 기숙사는 현재 6개월을 넘긴 여자들이 모여있는 곳이었 다. 정나미 같은 경우에는 이제 첫 분기이므로 1자가 들어가 는 구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방문 하나가 열렸다. 그 안에서 손 하나가 부르르 떨며 밖으로 나왔다. 무정은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곧이어 여자의 모습이 문밖으로 나타 났다. 갈색 머리의 백인 여자였다. 스크린 아래쪽에 짧은 자 막이 나타났다. <재클린 맥과이어>. 그 여자의 이름이었다. 여자는 연한 핑크 빛 네글리제 차림으로 복도에 모습을 드 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규정위반이었다. 무정은 긴장해서 마 른 침을 삼켰다. 화면 중앙에는 붉은 색의 <규정위반>이라는 글씨가 점멸하고 있었다. "저 여자 뭐야?" 무정이 계속 화면에 집중하면서 물었다. "조금 더 지켜보십시오." 록포드 중위가 대꾸했다. 여자는 배를 움켜쥐는가 싶더니 복도 맞은편 벽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그녀 얼굴은 심한 통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얼굴에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무정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 여자에게서 죽은 선유를 보는 듯 싶었다. 혹시 선유도 저러지 않았을까? 왜 저러는 거지?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을 무정은 억제했다. 록포드 중위의 설명이 없는 이상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너무 조급한 인상을 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벽을 향해 쭈그려앉았다. 그녀의 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무정의 몸 속에 어떤 충동 이 일고 있었다. 여자와는 손 끝 하나 접촉할 수 없는 이곳 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목적 의식이 그 욕구를 억누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다른 여자들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 다. 이어 환자 수송용 소형 무인 앰블런스가 나타났다. 동료 들이 그녀를 그 위에 눠히자 앰블런스는 복도 저끝으로 사라 져갔다. 장면이 바뀌면서 의무실 안에 누워있는 그 여자 모습이 보 였다. 그 앞에 의사가 보였다. 여자는 잠들어 있었다. 이마 에는 작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의사는 진료내용 입력장치를 조작했다. 화면 중앙에 자막이 나타났다. 환자 이름 : 재클린 맥과이어 증 세 : 급성 식중독 치료 내역 : 약물 투여 후 안정됨 화면에 나타나 있는 시각은 23시 47분이었다. 잠시 후 연구소 로고가 나타나면서 의무실 장면은 사라졌 다. 무정은 록포드 중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성 의무실 감시 체계는 어떻게 되어있나?" 중위는 대답했다. "그곳은 별도의 체계로 되어있습니다. 연구소의 컴퓨터와 CCTV 감시 체계에 연결되어 있죠. 그래서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형식상 보고가 들어온 내용은 저 화면이 전 부입니다." "그래? 알았네." 무정은 대꾸하고 나서 그의 모니터를 향해 돌아앉았다. 두 시간. 겨우 식중독을 진단해서 치료하는데 두 시간이라. 이것은 뭔가 분명히 감추는 것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틀림없 이 다른 치료 혹은 수술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식 중독이라고 숨기는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사실에 대해 거의 무관심했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무정은 모든 일을 바라보 는 시각이 달랐다. 그는 애초에 지구에서 출발할 때부터, 이 곳에서 알게 될 모든 정보를 단서라고 생각하기로 했었다. 그는 단말기를 조작하여 CCTV 시스템을 검토해 보았다. 거 의 모든 장소가 안보상황실 감시권 내에 들어있었다. 연구소 외부에서부터 도킹포트, 모든 통로, 기계실의 모든 구획, 식 당, 의무실, 기숙사 통로, 심지어는 상황실 내부까지. 단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각 개인의 방, 연구실 구역, 여성 의 무실, 그리고.... 소장실이었다. 21. 식당. 접시 위의 스테이크가 나이프에 의해 사정없이 토막 나고 있었다. 포크가 그중 한 조각을 찍어 무정의 입으로 가져갔 다. 열심히 우물우물 씹어 삼킨 무정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마주 앉은 나미를 바라보았다. 마침 그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정이 말을 꺼냈다. "요즘 일이 어때요? 재밌나요?" 나미는 대답 대신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만 저었다. 무 정은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나미는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일이란 게 항상 그렇죠, 뭐." "다른 연구원들과 교류를 못하게 되어 있다고 했죠?" 무정이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과 시간에는 심심해서 어떻게 하죠?" "심심할 게 뭐가 있어요? 일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조금은 비꼬듯이 말했다. "하긴 그렇지만." 무정은 대꾸를 하고 곧 말을 이었다. "참, 그런데 생물학 연구라면 약품도 많이 다루겠군요?" "그런 건 왜 자꾸 물어요?" 나미가 눈을 살짝 흘겼다. 무정은 어린 아이가 투정하듯 말했다. "너무 대화 내용이 없잖아요. 겨우 하루에 두 번, 그것도 잠깐밖에 만날 수 없는데 말에요." 나미가 피식 웃었다. "그래요, 많이 다뤄요. 이제 됐나요?" "흐음, 그럼 딱 한 가지만 더 묻죠. 요즘 가장 좋은 마취 제는 뭐죠?" "어머, 그건 왜요?여기서 강도 짓이라도 하시려고요?" 나미는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정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그럼요. 나미 씨를 납치하려고요." "후후, 정말 기분 좋군요. 나를 납치하려는 남자가 다 있 다니." 나미는 대꾸하고 나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무정도 따라서 식사를 계속하며 말했다. "조선조 때에도 보쌈이 성행했잖아요? 나라고 못할 게 뭐 있어요. 요즘은 남자들 틈에만 살다 보니 밤이 외로운데." "행여나...그런 생각 하지 말아요. 난 여기서 추방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무정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음, 뭐가 좋을까? NSB-3이 제일 좋겠지?" 나미가 소리내어 웃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주변을 살폈으나 모두들 자신들 얘기에 바빠서 그 녀 웃음소리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나미가 말했다. "정말...구식이군요. NSB-3은 이제 거의 사용하지 않아요. NSB-4도 구식이 되어 가는데.... 요즘은 대부분 MIR-2를 쓰 죠. 효과도 빠르고 후유증도 전혀 없죠. 더욱이 아주 소량으 로도 마취가 가능하니까요." "하하, 그래도 보쌈 당할 마음은 있나보군요? 좋아요, 이 왕이면 MIR-2를 쓰도록 하죠." 무정은 호쾌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회심의 미소였 다.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속도 모르는 나미는 어린 아이처럼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22. 8월 21일. 체육관. 팡. 경쾌한 탄성음을 내면서 공이 날아갔다. 공은 네트를 넘어 마이어 중위의 왼편으로 날았다. 마이어 중위는 재빨리 왼쪽 으로 몸을 날려 라켓으로 공을 쳐냈다. 공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무정이 받아치자 공이 다시 날아갔고 곧 되돌아왔다. 무정 은 그 공을 받아치려고 몸을 날렸지만 너무 거리가 멀었다. 무정은 균형을 잃고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는 바닥을 뒹굴 면서 벽에 어깨를 부딪혔다. "괜찮습니까?" 마이어 중위가 가볍게 네트를 뛰어넘어 뛰어왔다. "응, 괜찮아." 무정은 인상을 찡그린 채 아픈 어깨를 어루만지며 몸을 일 으켰다. 마이어 중위가 손을 잡아주었다. "잠시 쉬었다 할까?" 무정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러죠." 마이어 중위가 대꾸하며 한쪽 벽으로 걸어갔다. "의자." 그가 벽을 향해 말하자 벽 속으로 접혀 들어가 있던 의자 가 펼쳐져 나왔다. 두 사람은 거기에 걸터앉았다. 그들 뒤에 는 사람의 허리 높이 정도에 있는 강화유리 벽 너머로 다른 코트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옆의 코트에서는 네 사람이 복식으로 경기를 하고 있었다. "음료수 드시겠습니까?" 마이어 중위가 물었다. "응, 난 코크." 무정이 대꾸했다. "코크 두 개." 마이어 중위가 주문하자 벽에서 윙 하는 기계음이 일고 난 뒤에 배출구가 열리며 빨대가 꽂혀있는 컵 두개가 나왔다. 마이어 중위가 컵을 들어 무정에게 건넸다. "너무 힘들군." 무정이 콜라를 빨아 마시며 말했다. "한동안 지구 밖에서 운동을 안 해 봤거든." "그러실 겁니다. 더욱이 부임해 오셔서 한동안 일에만 몰 두하지 않았습니까?" 마이어 중위가 말했다. "음, 맞아. 난 이런 시설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무정이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는...," 마이어 중위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 "대위님은 일에 미쳐있는 것 같더군요? 뭔가를 쫓는 사람 같습니다." "그런가?" 무정은 마이어 중위를 돌아보았다. 중위는 빨대를 입에 물 고 호기심이 이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정이 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럴 일이 있었네." 마이어 중위는 더욱 관심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던 여자가...죽었지. 너무나도 처절하게. 자 살이었어. 난 그 일을 잊기 위해 일부러 멀리 떠나왔네. 지 구에서 가장 먼 이곳으로." "그런 일이...." 마이어 중위가 끄덕거렸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생각하다 보니, 안보국 쪽보다는 이 연구소를 선택하게 되더군. 역시 미련이 남았던 모양이 야." "미련이요?" 마이어 중위가 짧게 끼여들었다. "그래, 미련. 그녀가 지구로 돌아와서 나와 마지막 만나기 전에 근무한 곳이 이곳이었어. 일 년 가까이 헤어져 있던 기 간동안 일 주일마다 나에게 영상편지를 보내 온 곳이 바로 이곳이었단 말이네." 중위의 눈이둥그래졌다. "그렇군요." 중위가 천천히 끊어서 말했다. 무정은 계속했다. "내가 마지막 기억하는 그녀의 모든 것은 여기에 있었다 네. 이곳에서 지내는 일들을 매 주마다 한 시간 정도의 영상 으로 담아보냈지." 무정은 말을 끊고 마이어 중위를 돌아보았다. "물론 그 편지는 검열된 것이었다네. 그러니까 연구소 기 밀에 대한 내용은 없었으니 염려 말게, 하하." 무정이 말하고 나서 쓴 웃음을 지었다. 마이어 중위도 따 라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 중위의 웃음이 끊겼다. 중위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혹시?" 무정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마이어 중위도 따라서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군요, 한선유 양...." "그래서 내가 전에 슈타이너 상사의 말에 끝까지 관심을 가졌던 것이지. 혹시 이곳에서 불미스런 사건이라도 있었나 하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란 걸 알았어. 단지 그녀가 이곳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아." "글쎄요?" 마이어 중위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정은 단지 눈빛으로 물었다. 중위가 말했다. "이곳에 오는 여자들은 모든 테스트에서 완벽하게 합격을 했을 텐데요. 건강, 지식, 정신력, 심성 등 모든 면에서 말 입니다." 무정이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테스트에 합격했다고 모두가 잘 적응하 는 건 아니지. 원래 인간이란 것이 매우 복잡한 것 아닌가?" 무정은 마이어 중위에게 선유에 대한 일을 캐묻고 있는 것 이 아니었다. 어차피 안보국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며 칠 전에 있었던 그 사건이 그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더 이상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설사 물어보려 해도 그럴 만한 장소가 없었다. 이 연구소 내의 모든곳에는 CCTV 및 음성 감청장치가 되어있었다. 단지 예외가 있다면 개인 숙소 뿐인데--물론 그것도 믿을 수는 없지만--개인 숙소에는 절대 다른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결국 침실 내에 감 시장치를 안 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대신 사람들 간의 교류를 끊고 있는 것이었다. 무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도 분명히 감청장치가 있을 것이다. 어디엔가, 아마 도 가급적이면 이 의자 주변에 설치되어 있겠지. 그는 그것 을 역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선 유의 죽음에 대한 의문 때문이 아니라 단지 향수 정도인 것 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장의 의심 을 배제하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무정이 물었다. "우리는 여자 체육관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건가?" 마이어 중위가 끄덕였다. "당연한 거죠. 물론 여자들도 이쪽으로 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잠시 웃었다. 무정이 마지막 남은 콜라를 끝까지 빨고 나서 말했다. "난 사실 요즘 여자가 그립네. 기껏해야 점심시간과 저녁 시간에 식당에서 만나는 정도니. 그나마 식당에서라도 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지. 아무튼 난 중위가 부러워." "8주는 짧습니다. 곧 대위님도 혼성 휴게실을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때까지는 기다려야지. 여긴 무슨 규칙이 그리 많 은지 원!" 무정이 투덜거렸다. "하하, 좀 지나면 익숙해질 겁니다." 마이어 중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자, 한 게임 더 하시겠습니까?" "좋지." 무정이 따라 일어섰다. 23. 8월 27일. 숙소. 무정은 저녁 식사 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고 있 었다. 이제 비디오 영화에는 질려있었다. 영화는 다 그렇고 그런 뻔한 내용들 밖에 없었다. 아직 휴게실은 이용할 수 없 었다. 여자들 같은 경우에는 여성전용 휴게실이 따로 있었다. 그 들은 3개월마다 새로운 손님 20명이 오게 되니까. 하지만 남 자들이 별로 없는 이곳에 남성전용 휴게실이 있을 이유가 없 었다. 처음에는 남성 휴게실도 운용했었지만 곧 폐지되었다 는 마이어 중위의 설명이었다. 이 연구소에 있는 남자의 수 는 소장과 당직사령, 상황실 근무자 4명, 의무실 3명, 그리 고 기계관리 및 기타 잡무를 하는 10여명을 합쳐도 남자의 수는 겨우스무 명을 넘고 있었다. 그나마도 서로 다른 부서 요원 간의 만남에 공통분모가 될 만한 것이 없었기에 교류 자체가 없었다. 그에 비해 여자의 수는 연구원만 해도 80명에 다른 인원까 지 합친다면 백여 명은 되었다. 결국 이곳의 남자들은 꽃밭에 살면서도 그림의 꽃만을 바 라보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 무정은 심심하기 그지 없었다. 기껏해야 그가 즐길 수 있는 시설은 체육관 밖에 없었지 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화가 그리워서 휴게실에만 가있었 다. 따라서 그는 외톨이였다. 그는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긴 했지만 아직은 이곳의 신참 이었기 때문에 별도의 감시를 받고 있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당분간은 정보를 수집해서 이곳의 상황에 알맞은 작전을 수 립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갑자기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다. 곧 모니터가 켜지면서 마이어 중위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 났다. "대위님, 급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빨리 와 주십시오!" 무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건 또 뭐야? 어떻게 생각하면 귀찮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심심하던 차 에 잘 된 일일 수도 있었다. 그 일이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만약에 또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더욱 좋을 것 이다. 24. 상황실. 중앙 스크린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한 쪽 화면에는 멀리서 다가오는 작은 불빛이 보였고, 다 른 한 쪽 화면에는 도킹 포트가 나타나 있었다. 도킹 포트에 는 몇몇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는데 그 중심에서 한 여자가 울부짖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들 몇 명이 그 여자를 말 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화면 아래쪽에는 샤를롯 베랑송이라 는 이름이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는 거주구역 이탈에 대한 황색의 경고 표시가 점멸하고 있었다. "왜 저러나?" 무정이 다급하게 물었다. "왼쪽 화면을 보십시오." 마이어 중위가 말했다. "탈영병입니다." 화면의 중앙에 있는 불빛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아래쪽에는 자막이 나타나 있었다. 앙드레 리뀔레 소위. 지구연방군 토성 함대 순양함 <미란다> 소속. 탑승장비 : NK-5B 형 구명정. 화면 좌측 하단에는 접근 물체까지의 거리가 나타나 있었 다. 57.432킬로미터. 그 수치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 다. "저 탈영병이 여자와 관련이 있나?" "그렇습니다. 애인입니다." 순간, 무정의 등골에는 오싹한 기운이 흘렀다. 순식간에 온몸에 식은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문득 선유 얼굴이 떠 올랐다. 가슴이 미어지고 있었다. 이어서 양쪽 화면의 오른쪽 구석에 작은 네모 칸이 생기고 그 안에 두 남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리뀔레 소위는 아직 어 려 보였다. 금발에 깨끗한 얼굴을 한 미남이었다. 문득 무정 자신의 소위 시절이 생각났다. 이제 구명정은 45킬로미터 거리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무정이물었다. 물론 그 자신도 우주 탈영병 처리에 대한 강령을 잘 알고 있었다. 가능하면 설득해서 체포한다. 설득이 불가능해도 인 명에 피해를 줄 상황이 아니면 체포하도록 한다. 그것은 어 느 곳에 가나 같았다. 지구에서든 화성에서든. 물론 여기 토 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너무나 생소한 것이 많았다. 태양계 최외곽이라서가 아니라, 이 연구소에 관한 한은. "규정대로입니다." 마이어 중위가 대답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소장의 명령이 규정에 앞섭니다." 무정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면의 오른쪽에 있던 도킹 포트가 작게 줄어들면서 오른 쪽 상단으로 옮겨갔다. 이어 광막한 별밭만을 비추는 커다란 화면의 왼쪽 구석에서 우주 순양함 한 척이 나타나 서서히 구명정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공룡과 같은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면서 천천히. 화면 우하단에 자막이 나타났다. 순양함 아킬레스. 화면에는 5초 간격으로 황색의 탈영자 경고 메시지가 점멸 하고 있었다. 구명정의 거리는 32킬로미터. 초계정 몇 척이 왼쪽 구석에서 나타나 구명정을 향해 달려 나갔다. "초계정?" 무정이 외마디 신음소리를 냈다. "저건 또 뭐야? 에스코트하려는 건가?" "제 생각엔 그렇지 않습니다." 슈타이너 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정은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아마 파괴하려는 것 같습니다." 중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파괴? 무장도 안 한 구명정을? 왜?" "제 육감입니다." "육감?" "그렇습니다. 사실 저런 구명정을 처리하는 것은 쉽습니 다. 하지만 체포하려면 초계정이 나갔을 리가 없죠." "맙소사!" 무정이 신음소리를 냈다. 화면의 경고 표시가 바뀌었다. 적색의 공격 표시로. 첫 번째 빔이 발사되었다. 초계정의 갑판에서 붉은 빛줄기가 구명정을 향해 날았다. 그러나 구명정은 몸을 비틀며 용케 피해냈다. "그렇지!" 무정이 나지막하게 외쳤다. 다시 빛줄기들이 구명정을 향해 날았다. 구명정은 커다란 지그재그를 그리며 계속 다가오고 있었 다. 이제 거리는 24킬로미터. "피해, 피해!" 무정은 구명정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은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빗발처럼 쏟아지는 빔을 뚫고서 구명정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연구소의 오른쪽을 향해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나라면 유도병기를 사용할 텐데." 슈타이너 중사가 말했다. 무정은 고개를 획 돌려 슈타이너 중사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중사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태연히 앉아있었다. "유도병기를 쓰기엔 너무 작아." 마이어 중위가 말했다. 중위는 아무런 대꾸가 없자 슈타이너 중사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을 읽고 나서 다시 무정을 돌아본 마이어 중위는 입을 다물었다. 무정은 다시 화면을 쳐다보았다. 17킬로미터. "어떻게 구명정을 타고 올 생각을 했지?" 슈타이너 중사가 중얼거렸다. "나라면 침투정을 탔겠다." 15킬로미터. 구명정은 연구소의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쾌속정들 도 사격을 멈추고 그 뒤를 쫓았다. 화면이 바뀌었다. 다른 쪽의 카메라가 구명정을 잡고 있었다. 이제 구명정은 교묘한 감속비행을 하면서 연구소 10킬로미터 거리까지 다가 오고 있었다. 더 이상의 사격은 없었다. 구명정은 사격권을 벗어난 것이었다. 이제부터 함선에서 사격을 할 경우 연구소 를 건드릴 위험이 있었다. "그렇지!" 무정은 박수를 쳤다. 모든 것을 다 잊고서. 그는 자신의 행동이 감시 카메라에 잡히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있고 있었다. "이젠 살았군." 무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중사가 말했다. "뭐?" 무정은 중사를 돌아보려다가 멈추었다. 다가오고 있던 구명정을 향해 두 줄기의 빔이 날아갔다. 그 중 하나가 구명정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무정이 소리쳤다. 그 빔은 연구소 자체 방위 시스템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비틀거리면서 다가오는 구명정을 향해 다시 빔이 날아갔 다. 이번에는 중앙에 명중이었다. 구명정은 불꽃을 튀기면서 서서히 감속되기 시작했다. 5킬로미터. 구명정에서 하얀 기체의 분출이 있었다. 조종석의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구명정은 빙글빙글 돌기 시 작했다. 잠시 후 붉은 색의 분출이 뒤를 이었다. "피!" 마이어 중위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 붉은 색의 분출은 피였다. 이제 무정은 묵묵히 지켜보 고 있었다. 리뀔레 소위가 관통 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면 처음부터 피가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더 편했을 것이다. 기압의 저하로 체내압력이 팽창하여, 물위에 올라온 심해어처럼 몸이 부풀대로 부풀어 터져죽는 것보다 는. 5초 간격으로 점멸하던 화면의 경고표시도 더 이상 나타나 지 않았다. 단지 마지막으로 붉은 자막이 중앙에 있는 리뀔 레 소위의 얼굴을 덮고서 나타날 뿐이었다. <종결되었음.> 25. 도킹 포트 통로. 무정은 도킹 포트로 달려가고 있었다. 소장의 명령. 소장의 명령. 소장의 명령. 소장의... 무정은 이를 깨물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소장. <규정대로입니다.> 마이어 중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여기서는 소장의 명령이 규정에 앞섭니다.> 성질 같아선 당장 소장의 방에 뛰어들어 멱살을, 아니 소 장의 턱주가리를 한 방 갈기고 싶었다. 나중이야 어찌되든. 하지만 여기서는 그것도 참아야 했다. 그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런 오지까지 온 것이다. 감정 하나 때문에 그 목적 을 망칠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도킹 포트가 눈 앞에 보였다. 무정은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기압복 착의실로 뛰어들어갔 다. 그 가운데 그의 이름표가 붙은 기압복이 있었다. 무정은 그것을 입었다. 헬멧이 단단히 조여진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어기적거리며 도킹 포트의 구석에 있는 1인용 탐사정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 문에는 빨간 색의 에어록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핑크 색의 탐사정은 마치 육식공룡의 머리와 비슷한 형상 을 하고 있었다. 무정은 재촉하여 그곳으로걸어갔다. 하지 만 둔중한 기압복 때문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정이 탐사정 측면의 작은 키패드를 조작하자 투명한 조 명동조 색 변환 유리로 되어있는 캐노피가 서서히 위로 열렸 다. 탐사정에 오른 무정은 마스터 스위치를 켰다. 곧 정면과 측면의 모든 계기에 불이 들어왔다. 마음이 다급한 그는 계 기들을 대충 점검한 후 무전기 스위치를 켰다. "그라운드 제로, 여기는 베티 원이다. 내 말 잘 들리나? 이상." 무정이 말했다. 스피커에서 딸깍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응답이 있었다. 마 이어 중위의 목소리였다. "베티 원.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잘 들린다. 이상." 무정은 계기들을 다시 훑어보며 말했다. "여기는 베티 원. 통로를 개방하라. 이상."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티라노에는 이상이 없는가? 이 상." 티라노는 공룡 머리처럼 생긴 1인용 탐사정을 의미하는 은 어였다. "여기는 베티 원. 그렇다. 어서 통로를 개방하라. 이상." 무정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통로를 개방한다. 이상." 응답이 있은 후 잠시 시간이 흘렀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 만 공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마 기압복을 착용하지 않고 탐사정 밖에 있었으면 그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 나 그것을 느낄 때면 이미 죽음의 길을 들어서고 있는 것이 다. 곧 눈 앞의 출구가 열리기 시작했다. 무정은 출구가 열리는 동안 리뀔레 소위를 생각하고 있었 다. 그의 모습은 처참하게 변했을 것이다. 지금 리뀔레 소위의 구명정은 연구소 외벽 가까이에 머물 러 있었다. 빔에 맞아서 서서히 속도가 떨어진 구명정은 호 수 위를 떠도는 나뭇잎처럼 천천히 떠내려와서 연구소 외벽 의 돌출물에 걸려있었다.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무정은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냥 체포할 수도 있었던 비무 장의 구명정을 공격하다니. 한 솥 밥을 먹으며 지내온 동료 들 저렇게 무참히 박살을 내버리다니. 분노가 끝까지 치민 무정은 자신이 직접 구명정의 잔해를 수거하기 위해 상황실을 나섰다. 연구소 외곽을 관리하는 일 은 담당자가 따로 있었지만 그가 스스로 나선 것이었다. 나중에 소장이 뭐라고 하든 말든. 출구가 열리자 탐색정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전한 이륙을 위해서 바닥의 스키드가 밀려나가고 있었 다. 곧 무정의 탐색정은 연구소의 출구를 지나 암흑의 우주 공간으로 나왔다. 지금 그 암흑은 친근감이 느껴지지 않았 다. 단지 악마의 숨결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애틋한 젊음을 앗아가 버린, 그 악마의 숨결. 26. 연구소 외벽. 무정은 선체 분리 레버를 당겼다. 탐색정 착륙장치의 자력 이 해제되었다. 무정은 추진장치를 작동시키고 조종간을 움 직였다. 베티 원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곧 스키드가 밀려들어가고 출입구가 닫혔다. 베티 원은 서서히 앞으로 움직이다가 우측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연구소의 외곽을 따라 오른쪽을 향해 나아갔다. 둥근 연구소 외벽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마치 축소화된 위성 궤도를 따라 도는 느낌이었다. 계기 중앙의 모니터에는 연구소의 형상이 나타나 있고, 그 외곽에 녹색의 점이 점멸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베티 원이었 다. 또한 연구소의 중심점을 기준으로 할 때 베티 원의 위치 에서 110도 각도에 위치한 곳에 빨간 점이 점멸하고 있었다. 그것은 NK-5B 구명정이었다. 선내 스피커에서 딸깍거리는 소리가 났다. "베티 원.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그대로 계속 진행하라. 이상." 무정은 대답했다. "여기는 베티 원. 알고 있다. 이상." 베티 원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측면 창을 통해 울퉁불퉁한 연구소 외벽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다른 우주정거장과는 달리 창문이라곤 하나도 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이 연구소는 베일에 싸인 곳이었다. 마치 지하수용소처럼 느껴질 정도로. 연구소, 비밀, 80명의 미녀, 소장, 보안 시스템, 컴퓨터 네트웍, 갑자기 이 모든 사념들이 커다란 한 마리의 뱀처럼 닥쳐와 그의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뱀꼬리 부분에는 죽은 선유가 있었다. 빌어먹을 연구소, 빌어먹을 뱀꼬리, 빌 어먹을 소장. 선유의 죽음.... 선유. 문득 베랑송 연구원의 얼굴이 선유의 얼굴에 겹쳐져서 나 타났다. 선유, 베랑송, 그리고 리뀔레 소위. 도대체 그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마음 속에는 리뀔레 소위의 죽음에 대한 비애감이 선유에 대한 아픈 기억을 불러 일깨우고 있었다. 선유의 죽음. 리뀔 레 소위의 죽음. 베랑송 연구원의 절규. 문득 눈 앞에 대공포 마운트가 나타났다. 리뀔레 소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것이었다. 빌어먹을 대공포. 적을 막기 위해 설치된 것이 애꿎은 동료의 목숨을 날려버리다니. 애잔한 젊음 하나를 우주의 핏덩어리로 만들 다니. 빌어먹을. 빌어먹을 소장. 그는 대공포에 가까워지면서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 다. 설마 저게 날 쏘지는 않겠지. 혹시 소장이 내 의도를 눈 치채고 죽이려 하지는 않겠지. 나마저 탈영병으로 몰아 죽이 진 않겠지.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아직 소장은 그의 의 도를 알 리가 없었다. 설사 알고 있다 해도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이 시끄러워질 테니까. 대공포 앞을 지나가면서 그는 계속 그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이제 베티 원과 목표와의 각도는 60도 정도였다. 베티 원 은 콜로라도의 절벽과 같은 연구소 외벽을 따라 계속 나아갔 다. 도대체 리뀔레 소위를 죽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소장은 그를 죽이도록 명령했을까? 이 연구소에 너무 접근해서 보안에 문제가 있어서?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리뀔레 소위는 그 이전에 충분히 체 포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설사 그가 연구소에 도착 한다 해도 그는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장은 리뀔레 소위를 죽이도록 명령했다. 왜? 혹시 리뀔레 소위가.... 연구소의 지평선을 따라 하얀 색의 둥근 물체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구 궤도를 돌 때 떠오르는 달처럼. 구명정이었다. 베티 원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스피커가 딸깍거렸다. "베티 원.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야구공이 앞에 나타났 다. 이상." 야구공은 1인용 구명정에 대해 통상적으로 부르는 별명이 었다. 상황실에서는 베티 원의 전면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탐사정 정면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정은 귀찮다는 듯이 내뱉었다. "여기는 베티 원. 나도 알고 있다. 이상." 계기판 위의 HUD에 구명정까지의 거리가 나타났다. 42미 터. 무정은 베티 원을 서서히 감속시키기 시작했다. 목표까지 35미터. 구명정은 연구소 외벽의 돌출부에 걸려있었다. 하얀 동체 의 여기저기에 검게 그을린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글 자로 쓰여진 17이라는 동체 번호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 고 깨어져나간 캐노피의 모습도 보였다. 목표까지 30미터.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구명정이 라는 것은 함선에 문제가 있을 때 급히 타고 달아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구명정을 타고 온 사람을 죽였다. 도대 체 그게 웬 우스꽝스런 짓인가! 이 얼마나 블랙 코미디 같은 행위인가! 구명정을 타고 있는 사람은 설사 적이라도 죽이지 않는 법인데. 목표까지 20미터. 무정은 구명정 캐노피 안쪽의 리뀔레 소위를 볼 수 없었 다. 구명정은 베티 원을 향해 측면으로부터 45도 정도 등을 돌리고 있었다. 무정은 베티 원의 궤도를 약간 바깥쪽으로 조정했다. 구명 정에 바로 다가가지 않고, 바깥쪽을 돌아 정면으로 가서 그 내부를 보려 하는 것이었다. 목표까지 10미터. 이제 무정은 속도를 더욱 낮추었다. 서서히 눈 앞에 다가 오는 구명정을 지켜보면서, 그 동체에 묘사된 검게 그을린 죽음으로의 추상화로부터 사관학교 후배인 리뀔레 소위의 애 환을 느껴보고자 했다. 베티 원은 구명정의 후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정은 베티 원의 매니퓰레이터를 서서히 앞으로 내밀었 다. 천천히 오른쪽으로 작은 원을 그리면서 구명정의 정면을 향해 다가갔다. 5미터...3미터...2미터...1미터.... 정지. 베티 원의 매니퓰레이터가 NK-5B의 동체에 닿으면서 약간 의 진동이 느껴졌다. 매니퓰레이터를 몇 번 휘저으니 그 끝 에 뭔가가 잡혔다. 이제 구명정은 베티 원의 손아귀에 잡힌 것이었다. 무정은 구명정의 깨어진 캐노피를 통해 안을 볼 수 있었 다. 안은 어두웠다. 무정은 작은 탐조등을 켜서 그 안을 비 추었다. 그의 눈에서 약 1.5미터의 거리..., 그 안에 리뀔레 소위가 보였다. 리뀔레 소위는 부서진 조종실 내의 금속제 프레임에 몸이 얽혀서 밖으로 퉁겨져 나가지 않았다. 만약 그것에 걸리지 않았다면 캐노피가 깨어질 때 기압의 폭풍에 의해서 몸이 조 종석 밖으로 쏟아져 나갔을 것이다. 말 그대로 쏟아져 나갔 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 그의 시신은 멀리 우주의 암흑 속으로 떠내려가서 찾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떠내려 가서 잃어버리는 것보다도 못한,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저 참 혹한 모습의 시신은. 탐조등의 불빛에 드러난 리뀔레 소위의 모습은 이미 그가 아니었다. 상황실 모니터에 나타났던 그 잘 생긴 20대 초반 청년의 얼굴이 아니었다. 체내외 기압의 차이로 인해 그의 몸은 만신창이 되어있었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대 로 부풀어오른 얼굴에는 혈관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이 미 붉은 색이 그 피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혀와 입안의 속살 일부는 밖으로 밀려나와 있었다. 그리고 이미.... 눈알은 빠져 달아난 상태였다. 27. 숙소. 무정은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누워있었다. 술에 취할 대로 취해서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의 침 대 아래 바닥에는 위스키 병 두 개가 뒹굴고 있었다. 리뀔레 소위. 참혹한 죽음. 너무나 참혹한 죽음이었다. 물론 무정은 진공상태에서 죽은시체를 처음 본 것이 아니 었다. 이미 사관학교 시절부터 영상을 통해서 진저리나게 보 아왔고 부임지를 다닐 때마다 숱한 시체를 보아왔다. 어차피 우주에서의 죽음은 다 그런 형태를 남길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리뀔레 소위는 애인을 찾아 이곳에 왔고, 동료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애절하고도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 다. 더욱 무정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선유의 죽음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죽음이었다. 선유의 모습도 리뀔레 소위처럼 되었을 것이다. 무정은 눈 앞에 떠오르는 그 모습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그나마 술기운이 많은 집착과 상상들을 빠르게 빼 앗아갔다. 원래 연구소 내에서는 술이 금지되어 있었다. 애초에 이곳에 올 때부터 술을 반입할 수 없게 되어있었 다. 따라서 음주에 대한 벌칙조항 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무 정은 오늘 위스키 두 병을 얻어올 수 있었다. 부서진 구명정 을 인도하기 위해 찾아갔던 순양함의 승무원으로부터. 그리고 지금 그는 이렇게 취해 있었다. 리뀔레 소위의 죽 음 때문에. 도대체 리뀔레 소위가 탈영을 하고 죽음을 각오하면서 이 곳에 오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게 애인을 만나고 싶었단 말인가?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사관학교에서는 그 런 약한 인간을 졸업시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분명히 한 가 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있었다. 리뀔레 소위는 꼭 베랑송 연구원을 만나야만 했던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만 나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영상 통신으로는 절대로 전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죽음을 각오한 그대로 죽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소장이 리뀔레 소위를 꼭 죽여야만 했 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를 죽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 까? 추정해 낼 수 있는 결론은, 리뀔레 소위를 죽이지 않으 면 안 되는 것! 바로 그의 입을 막기 위함이었다. 두 가지 사실을 놓고 추측해 볼 때 알 수 있는 사실은 리 뀔레 소위는 이 연구소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다. 그 정보를 어디에서 알아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렇다면 그 비밀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무정이 캐고자 하는 것 아닌가. 결국 리뀔레 소위는 무정과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자신의 애인,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애인 때문에. 무정은 그 애 인의 죽음에 얽힌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 리뀔레 소위는 애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애인을 위해서. 애인을 위해서. 애 인을. 무정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온몸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술기운이 싹 달아나고 있었다. 애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결론은..., 결론은.... 이 연구소에서는 여성 연구원들의 몸에 해가 되는 어떤 행 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행위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그 행위는 무엇일까? 그 행위는? 그 행위.... 돌연 무정은 다시 뒤로 풀썩 쓰러졌다. 그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28. 8월 28일. 의무실. 무정은 눈을 떴다. 주변이 매우 밝았다. 분명히 그의 숙소는 아니었다. 무정 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대위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무정은 철골을 모두 없애버린 건물처럼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음을 느끼며 다시 뒤로 쓰러졌다. 온몸의 뼈마디가 쑤셨 다.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대위님." 무정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옆에 의료용 로봇이 서있었다. 그제야 무정은 이곳이 어딘 지를 알 수 있 었다. 이곳은 의무실이었다. 그리고 무정은 간이 입원실에 누워있었다. 의료용 로봇은 그다지 달갑게 생기지 않은 형태였다. 지구 에 있는 로봇이 인간과 거의 유사한 형태의 안드로이드인 데 반해 이곳의 로봇은 말 그대로 로봇이었다. 이 따위로 생긴 로봇을 인간 보조용으로 쓴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 었다. 무정은 머릿속이 퀭한 상태에서도 그런 생각이 떠오르 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알콜 과용에 의한 신체기능 마비증세입니다, 대위님." 로봇이 대답했다. 알콜에 의한.... 그러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어젯밤에 그는 술을 너무 많 이 마신 것이었다. 640밀리리터나 되는 위스키를 안주도 없 이 연거푸 들이켰다. 더욱이 3주 동안 술 한 모금 안 마시던 상태에서. 아직까지도 입에서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 정신 은 혼미했다. 목과 입 안이 염산이라도 쏟아 부은 것처럼 타 올랐다. "물 좀 주게." 무정이 말했다. "알았습니다, 대위님." 로봇은 무정의 등을 받쳐서 몸을 반쯤 일으킨 후 옆에 있 던 물 잔을 들어 그의 입에 갖다댔다. 무정은 마치 사막을 걸어서 횡단한 사람처럼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로봇은 컵을 내려놓고 다시 무정을 뉘었다. "지금 몇 시나 됐나?" 무정이 물었다. "14시 49분입니다, 대위님." 로봇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내가 여기에 얼마동안 누워있었지?" "오늘 아침 8시 53분에 입원하셨습니다, 대위님." 로봇은 대뜸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기종이었다. 좀 자세히 설명해 주면 안 되나? 그저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로봇. 지금 이 세상 어디에도 이런 수준의 로봇을 사용 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산업체의 생산 라인 용을 제외한다 면. 어쩌면 이것은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었다. 소장은 연구 소의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 사적인 교류를 단절시키고 있다. 그것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여 인간들에게 대화 충동을 방지 하기 위해서 이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 내가 여기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보게. 누가 어떻게 해서 데려오게 되었는지를." 무정은 마치 어린 아이에게 질문을 하듯 세세한 것까지 언 급하면서 물어보았다. 안 그러면 수많은질문과 답변이 오갈 터였다. "8시 49분, 상황실 근무자인 록포드 중위는 대위님이 출근 을 안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8시 50분, 록포드 중위는 대위 님의 숙소를 찾아갔습니다. 8시 51분, 록포드 중위는 앰뷸런 스를 호출하였습니다. 8시 52분, 앰뷸런스가 대위님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8시 53분, 의무실에...." "됐어, 그만!" 무정은 로봇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건 도무지 정이 가지 않은 놈이었다. 자세하게 설명하라 니까 이렇게까지 지겹게 늘어놓다니. 마치 적진에 침투하기 위해 세부적인 작전계획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무정은 눈을 감았다. 어지러웠다. 그런 가운데 업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상황실은 잘 되어가고 있겠지. 록포드 중위와 켈리 중사가 잘 하고 있겠 지. 그건 그렇고 소장이 나중에 뭐라고 할까? 또 한 마디 하 겠지. 그때는 뭐라고 대답하지? 애꿎은 리뀔레 소위의 죽음 때문에.... 리뀔레 소위. 소위의 죽음. 계획적인 살인. 그것은 분명히 살인이었다. 단지 군법재판에 넘기기만 했어도 되는 것을. 빌어먹을. 점점 의식이 희미해졌다. "이봐, 물 좀 갖다 주게." 무정은 몸을 일으킨 후 제일 먼저 물을 찾았다. "알았습니다, 대위님." 물 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물을 새로이 가져와야 했다. 의 료 로봇은 빈 잔을 들고 다리도 아닌 바퀴를 구르면서 입원 실을 빠져나갔다. 무정은 천천히 침대 위에서 다리를 내렸다. 그러다가 비틀 거리면서 무너져 내렸다. 그는 몸을 구르면서 약품 보관용 냉장고에 부딪혔다. 냉장고 문의 손잡이를 잡으며 몸을 일으 키려 하자 문짝이 열려버렸다. 무정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 켰다. 그의 눈은 빠르게 냉장고 안을 훑었다. 어느 새 그의 손에는 MIR-2가 쥐어져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불과 몇 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정은 비틀거리면서 냉장고의 문을 닫았다. 로봇이 물 한 잔을 들고 돌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대위님?" 로봇이 물었다. "음, 아직 몸이 안 좋군." 무정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MIR-2를 들고 있는 왼손은 자연스럽게 허리 뒤를 짚고 있었 다. "아직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대위님." "알았네." 무정은 침대에 걸터앉으면서 대꾸했다. "물 여기 있습니다, 대위님." 로봇이 물 잔을 내밀었다. 무정은 그것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실제로 매우 목이 말랐다. 무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은 성공이었다. 실제로 목이 마르긴 했지만 로봇에게 물을 떠오도록 시킨 일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잠시 깨었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졌던 무정이 깨어났을 때, 그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작전이었다. 그의 계획, 그의 목표. 더욱이 그는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의무실에 와있었다. 그렇잖아도 의무실을 찾아왔어야 했는 데. 그래서 그는 로봇을 따돌리기 위해 물을 가져오라고 했고 감시용 카메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비틀거리는 척하 며 연극을 했던 것이다. 아마 상황실에서 지켜보는 록포드 중위는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걱정만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리고.... 지금 그의 손에는 MIR-2가 쥐어져 있었다. 29. 8월 30일. 소장실. 소장이 몸을 반쯤 일으키며 반겼다. "오, 어서 오게." 무정은 경례를 하고 나서 소장의 손짓에 따라 소장 책상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그래, 이제 좀 괜찮나?" 무정은 가볍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젠 좋습니다." "음, 다행이군." 소장이 그 특유의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한데 그날 왜 자네가 직접 나섰나?" 무정은 일부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구명정 수거 작업 말일세." "아, 그일 말이군요?" 무정은 새삼스럽다는 듯이 대꾸했다. "안타까웠습니다. 사관학교 후배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 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무정은 고개를 숙였다. 소장은 무정의 눈치를 살피면서 무겁게 말했다. "음, 그래. 그건 너무 안 된 일이야. 매우 안 된 일이지. 하지만 우리 연구소는 그만큼 중요한 곳이네. 지구 연방의 안보와 관련되는 가장 중대한 연구가 여기서 진행되고 있으 니까 말야. 자네도 그 중요성은 익히 알고 있겠지?" 정말 안 된 일일까? 소장 당신에게? 무정은 마음 같아선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다 소용 없는 짓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리뀔레 소위가 되살아나는 것 도, 그의 영혼이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무정 자 신의 마음이 조금쯤 후련해질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다. 그 잠깐의 감정 때문에 이 중대한 계획을 망칠 수는 없 었다. 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는 없지만 계획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 소장의 비위에 맞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저도 이곳에서 생 활하면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통해 여기 일이 매우 중대하리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정은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서 한 마디 덧붙였다.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네." 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음은 아프다네. 장래가 유망한 소위 하나가 아깝 게 죽어버린 것은 우리 지구 연방에 있어서는 큰 손실이지. 하지만 그의 죽음은 전체를 위한 희생이었다네. 정말 아까운 일이야." 소장은 오늘따라 그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감정의 표현도 많았고 인간적인 얘기도 많이 꺼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이 그는 살인자였다. 그도 멀쩡한 사람을 죽여 놓고 눈 하나 꿈쩍 안할 만큼 뻔뻔스러운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이 세상 누구도 고위직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런 면모를 보일 수는 없 는 것이었다. 무정은 시간을 끌기 위해 계속 얘기거리를 만들었다.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그렇다네." 소장은 대꾸한 후 잠시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뭔 가 둘러댈 만한 얘기를 만들고 있는 중일 것이라고 무정은 생각했다. 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지. 아까운 젊음 하나가 사 라졌는데 잠이 오겠나? 괴로운 마음에 밤을 새웠다네. 죽은 그 친구 때문에." 그게 아니겠지. 무정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면 애초에 리뀔레 소위를 죽일 생각도 못했을 거야. 무정이 생각하기에는 소장이 이 골치 아픈 일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잠을 못 이루었을 것 같았다. 더욱 이 따지고 들기 좋아하는 무정에게 어떻게 변명을 할 것인 가도 또 하나의 골치거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무정이 순응적으로 나오고 있자 마음이 놓였 을 것이다. 어쩌면 소장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 다. 무정이 규정을 어기고 술을 잔뜩 퍼마신 것이 마음에 걸 려서 그의 말에 잘 따르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술을 마 신 것은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소장은 앞으로 무정이 더욱 조심하고 지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할 것이다. 이미 그 술 덕분에 MIR-2까지 훔쳐낼 수 있었지 만. "매우 피로해 보이시는군요." 무정은 그 자신도 피로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네. 벌써 이틀 밤을...." 무정은 소장의 말을 들으면서 바지 주머니에 조용히 손을 넣었다. 작은 물건이 손에 잡혔다. 그것은 휴대용 구강청정 액 분무기였다. 그는 그것을 쥔 손을 자연스럽게 소장 책상 위에 올렸다. "...더욱이 베랑송 연구원은 반쯤 히스테리가 되어 버렸다 네. 아마 진정이 된다 해도 더 이상 연구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돌려보내기로 했네. 그러니 내가 얼마나 속이 상하겠 나.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내 심정을...." 무정은 소장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서서히 조는 척하고 있었다. "어, 이 사람, 자고 있군?" 소장이 눈치를 챈 것은 얼마쯤 더 지나서였다. 그 자신도 고개를 숙인 채 흐릿한 눈빛으로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무정은 책상 위에 얹은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차가운 액체가 조금씩 흘러나와 손을 적셨다. 무정은 얼굴을 묻은 다른 손으로 코를 꽉 막고 호흡을 멈추었다. 나미, 당신만 믿어요. 만약 당신이 장난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혹은 당신 말이 틀린다면.... "아함, 그러고 보니 나도 졸리네. 음, 이거...." 소장이 하품을 했다. 일 초, 이 초. "음, 졸리는군." 소장이 중얼거렸다. 삼 초, 사 초. "음...." 웅얼거리는 소리. 오 초, 육 초. "쩝!" 입맛 다시는 소리. 칠 초, 팔 초. 그리고 깊어지는 숨소리. 구 초, 십 초. 이제 가늘게 코 고는 소리. 무정은 잠시 더 기다린 후 눈을 가늘게 뜨고 소장을 바라 보았다. 소장은 커다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잠들어있 었다. 나미의 말은 맞았다. 무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은 것은 그 후유증 문제였다. 설마 나미가 거짓말은 안했겠지. 그 강력한 효과 에서 입증이 되듯이 후유증이 없다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겠 지. 무정은 분무기를 소장 앞으로 뻗어 그 얼굴을 향해 한 번 더 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소장 앞을 떠나서 한쪽 옆에 있는 컴퓨터 단말기를 향해서. 분무기 안에는 어제 의무실에서 훔친 MIR-2 마취액이 들어 있었다. 무정은 그것을 구강청정액 분무기에 옮겨 담았고 지 금 그것은 효과를 발휘했다. 나미가 장담했던 것처럼. 단말기는 두 대였다. 하나는 안보국 용, 다른 하나는 연구소 용. 무정은 그 중 연구소 단말기 앞에 앉았다. 소장이 깨어나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또한 소장이 호출하 기 전에는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가능하면 빨리, 뭔가 가장 중요한 핵심을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 핵심이란.... 우선 연구소 관리 시스템의 전체 구성부터 알아야 했다. 사용법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모든 컴퓨터의 접근 방식이나 용어들은 동일하게 프로그램 되어있으니까. 모니터 화면의 주 메뉴에는 다음과 같은 부 메뉴들이 나타 나 있었다. 시스템 구성 시스템 감시/제어 연구원 상태 CCTV 화면 연구자료 입력 핵심 연구 돈 루카 돈 루카? 돈 루카가 뭐지? 그건 이곳 연구소 이름인데? 혹시 연구소 소개 프로그램? 하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이런 비밀투 성이 연구소에서 무슨 소개 프로그램이.... 그는 <돈 루카>를 선택했다. 모니터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시오.> 이런 젠장! 그는 명령을 취소하고 다른 항목을 돌아보았다. <시스템 구성.> 그것이 눈에 띄었다. 무정은 그 항목을 선택했다. 화면이 바뀌면서 연구소 시스템의 전체 구성도가 나타났 다. 그 구성도에 나타난 각종 장치들 중에 터미널 I/O 컨트 롤러에 연결된 장치들의 큰 묶음은 주 메뉴에 나타난 항목들 과 거의 비슷했다. 아마 주 메뉴에서는 각종 업무 상황들을 직접 관여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기기 들의 실질적인 구성 에 대한 것인 듯 싶었다. 시스템 구성 ----------- 연구소 상황실 소장실 시스템 감시/제어 연구원 상태 CCTV 화면 연구자료 입력 핵심 연구 돈 루카 무정은 그 중에 <소장실>을 선택했다.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에는 소장실 내부의 단말기 및 회선에 대한 구성도가 나타나 있었다. 그 중에는 안보국 상황실 단말기와 회선들도 나타나 있었다. 화면 한 쪽 구석에는 관련작업 메뉴 아이콘 들이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맙소사! 무정은 신음소리를 냈다. 이럴 수가. 연구소 단말기에는 안보국 단말기 용 회선이 연결되어 있 었다. 역으로 말한다면 안보국에서 연구소를 침투할 수 있다 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소장의 단말 기를 거쳐서 가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정은 새로운 것을 찾아내었다. 그 안에는 연구소와 안보국을 연결하는 20개나 되는 회선 용의 인터페이스 버스가 있었다. 다만 그것은 현재 미사용 중이라는 의미의 빨간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아마 유사시 에 사용하려고 설치해 둔 것 같았다. 무정은 그 부분을 선택했다. 그 부분의 장치 아이콘이 입체적으로 변했다. 또한 화면 한 쪽 귀퉁이의 관련 메뉴 중에 <연결>이라고 쓰여진 아이콘 이 입체화되었다. 만약 실행 아이콘을 누르면 두 곳의 네트 웍은 연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 부분의 회선 표시도 파란 색으로 바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눈치를 챌 것 이고.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눈치챌 확률은? 어떻게 생각하면 그다지 위험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과연 그들이 번거롭게 매일 그것을 확인할 것인가. 어차피 이곳은 시스템 자체의 감시가 심해서 사람들은 한가하게 시 간이나 때우고 있는 판인데. 하지만 어쨌든 발각될 확률은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모두가 해이해지는밤에만 사용을? 그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밤에 사용을 한다 해도 이 곳에 와서 회선을 접속시켜야 하니까. 물론 해제할 때는 안 보국 쪽에서도 가능하지만 한 번 쓰고 그만둘 수는 없는 일 이었다. 전체의 내막을 알아내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니 까. 그렇다고 밤마다 소장실을 찾아온다는 것은 말도 안 되 는 일이었다. 도중에 설치된 수많은 안보국의 감시 카메라 때문에. 물론 부하들이 눈감아 준다면 별 문제 아니지만 이 것은 절대 남을 끌어들일 만한 성격의 일이 아니었다. 잠시 화면을 검토하던 무정은 메뉴 아이콘 중에 <설치위 치>라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그는 그 아이콘을 선택했다. 다시 화면이 바뀌면서 소장실 내부 평면도가 나타났다. 그 평면도에는 각종 기기의 위치 및 전기, 각종 전자기기, 전 화, 컴퓨터 등 모든 선로가 나타나 있었다. 무정의 눈이 빠르게 화면을 훑었다. 그는 곧 두 개의 호스트가 연결되는 인터페이스 버스가 있 는 곳을 찾아내었다. 바로 컴퓨터 회선용 배선상자 안쪽이었 다. 그 배선상자는 실내의 한 쪽 구석에 있었다. 무정은 즉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장이 깨어나지 않 도록 주의하면서. 배선상자 뚜껑을 열자 많은 회선들이 연결되어 있는 인터 페이스가 보였다. 그 아래쪽에는 또 하나의 뚜껑이 있었다. 어떤 기대를 가지면서 뚜껑을 열자 역시 많은 회선들이 나타 났다. 그 중간에는 인터페이스 버스가 보였는데 모든 딥 스 위치는 0쪽으로 놓여 있었다. 무정은 그 중 1번 스위치를 1 쪽으로 옮겼다. 이제 적어도 한 개의 회선은 연결된 것이었 다. 무정은 빠른 걸음으로 단말기 앞으로 돌아와서 회선의 색 이 변했는지를 살폈다. 빨간 색 그대로였다. 혹시나 싶어 십여 초를 기다려 보았지만 역시 그대로 빨간 색으로 남아있었다. 어리석은 것들. 무정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덕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시스템 설계자의 누 락, 또는 실수 때문에 그가 덕을 보고 있었다. 두 시스템의 회선을 수동으로 연결할 경우는 그 상태가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항상 그 입출력 채널이 활성화 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으음." 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정은 돌아보았다. 소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논 렘 수 면 상태였다. 저런 상태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작은 자극만으 로도 깨어나기 십상이었다. 무정은 조용하게, 그러나 재빨리 화면을 처음 상태로 돌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면서 의자에 와서 앉았을 때 삐 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정은 얼른 자는 척 자세를 취했 다. "음, 음, 쩝. 음냐...." 의자 소리에 깨었는지 소장이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렸 다. 잠시 후 그의 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내가 졸았군. 얼마나 됐지?" 소장이 중얼거렸다. 무정은 여전히 자는 척 했다. 소장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소리. 그 발소 리는 곧 무정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장이 조용히 무정의 몸을 흔들었다. "이봐, 박 대위. 일어나게. 일어나라고." 무정은 나른한 척하며 슬쩍 눈을 떴다. 그리고 깜짝 놀란 듯이 벌떡 일어섰다. "몹시 피곤한가 보군. 숙소에 가서 쉬도록 하게. 상황실에 알려두고 말야." 소장이 말했다. "아, 아닙니다." 무정이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아냐, 아직 자네는 상태가 안 좋아. 몸을 생각해야지. 어 서 가서 쉬라고." 뱀이 개구리를 생각해 주는가? "알았습니다, 그럼." 무정은 소장에게 경례를 하고 문을 향해 돌아섰다. 30. 숙소. 무정은 문을 닫고는 얼른 잠가버렸다. 낮에 문을 잠그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가 하는 일은 절대 누가 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지금 범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소장실에서 오는 길에 상황실에 들러 몸이 안 좋다고 말을 하고서는 떳떳이 그곳을 나섰다. 물론 소장이 쉬라고 한다는 것까지 말해두었다. 그래야 부하들이 윗사람을 근무태만으로 얕보지 않을 것 아닌가. 무정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물을 찾는 사막의 방랑자 같 은 마음으로 단말기 앞에 앉았다. 단말기의 스위치를 켜자 곧 모니터 화면이 밝아졌다. 화면에는 언제나처럼 검은 바탕 에 돈 루카 연구소의 로고가 나타났다. 화면 왼쪽 위에는 안 보국의 마크가 나타나있고 로고 아래쪽에는 구호가 보였다. <미래의 창조, 창조의 미래!> 무정이 모니터와 똑같은 화면이 나타난 탁자 위의 터치스 크린에 손바닥을 갖다대자 화면 아래쪽에 비밀번호를 입력하 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무정은 그 부분에 손을 대고는 마 음속으로 알파벳을 불렀다. 무정의 비밀번호는 <태양을 당신에게>라는 의미가 아니었 다. 그것은 선유의 이름을 영문자로 옮긴 것이었다. 뇌파가 손끝을 통해 입력되고 곧 화면의 로고가 사라졌다. 이어 주 메뉴가 나타났다. 긴급상황 보고사항 시스템 구성 감시/제어 - 건물외부 - 도킹포트 - 기계장치 - 거주구역 - 공공시설 방송 및 호출 첫 눈에 보아도 느낄 수 있는 것, 연구소 시스템에 비해 오히려 이곳 전체를 관장하는 안보국 시스템의 화면이 더 단 출했다. 무정은 <시스템 구성>을 선택했다. 화면이 바뀌면서 부 메뉴가 나타났다. 시스템 구성 ----------- 컴퓨터 실 안보 상황실 소장실 시스템 감시/제어 CCTV 화면 무정은 그 중에 <소장실>을 선택했다. 화면에는 소장실의 각종 장치 구성도가 나타났다. 전에는 그다지 눈 여겨 보지 않았던 부분이 이제는 새롭게 눈 앞에 부각되었다. 소장실 단말기와 연결된 회선 및 기타 장치용 회선 등 파란 색으로 표시된 것들 이외에도 아무런 용도를 알 수 없었던 20개의 빨간 색 회선. 그것들은 소장실 안에서 그냥 끝나있었다. 그것이 연구소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다는 흔적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그 때문에 전에는 무정이 무심 코 넘겨버린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연구소로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아니, 역으로 연구소 쪽의 지배를 받도록 되어 있을 줄이야. 이것은 기만이었다. 연구소 쪽에서는 이곳을 연결할 수 있지만 이쪽에서는 연결할 수 없는 그것들. 무정은 그 20개의 회선 중 소장실에서 수동으로 연결시켜 두었던 1번 회선을 선택했다. 그 부분이 입체화되는 동시에 우측 구석의 관련 메뉴에 있는 <연결> 아이콘이 입체화되었 다. 무정은 맨 위의 <실행> 아이콘을 선택했다. 곧 연구소 네트웍 용의 1번 회선이 녹색으로 변했다. 이제 그것은 그의 단말기에 연결된 회선임을 뜻하고 있었다. 즉, 그의 단말기 회선이 안보 컴퓨터의 I/O 컨트롤러 내부에서 소장실의 연구 소 네트웍 1번 회선과 연결된 것이다. 무정은 다시 메뉴 아이콘 중에서 <외부접속>을 선택했다. 화면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외부 통신망과 연결됩니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더니 새로운 메뉴가 나타났다. 아까 소장실에서 본 연구소 단말기의 주 메뉴였다. 그는 외마디 환호를 내질렀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시스템 구성 시스템 감시/제어 연구원 상태 CCTV 화면 연구자료 입력 핵심 연구 돈 루카 뭐가 이상하지? 잠시 생각하던 무정은 곧 깨달았다. 연구소 시스템과 연결 될 때 연구소 로고가 그려진 초기 화면이 나타나지 않은 것 이었다. 그것은 무정으로서는 매우 다행이었다. 우선 주 메 뉴에도 들어가기 전부터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고충을 덜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좀 이상했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 분명히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 정상일 텐데. 만약 일이 잘못 되면 그때는.... 잠시 생각하던 그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원래 이 회선은 양방향 용이 아니었다. 단지 연구소 측에 서 긴급 시에만 사용하려고 놔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절 대로 반대쪽에서 침투하리라는 것은 생각도 않고 있었던 것 이다. 그 회선은 언제나 연구소 시스템의 최상위 프로그램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즉, 이것은 일반 단말기 회선이 아 니었으므로 언제나 사용하기 편하도록 바로 연결이 되는 것 이었다. 다만 각 부 메뉴로 들어갈 때도 비밀번호가 나오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프로그램 자체는 다 똑같은 것이니까. 하지만 혹시라도.... 무정은 불가능에 가까운 한 가닥의 기대를 가지고 먼저 <연구원 상태>를 선택했다. 화면 아래쪽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시오.> 역시. 역시 불가능이었다. 한 가닥의 기대는 없었다. 비밀번호. 도대체 그 비밀번호의 구성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모든 시 스템에서 비밀번호에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문자는 로마자 대 소문자 52자, 그리고 숫자 열 자, 거기에 하이픈(-), 마침 표, 쉼표까지 합쳐 도합 65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비밀 번호의 최대길이가 20이므로 번호를 모를 경우에는 65의 20 조합만큼이나 두들겨대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그 <경 우의 수>는 얼마가 나오게 되는가! 인간의 능력으로는 65명이 나누어서 평생동안 밥도 안 먹 고 입력시킨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운이 좋으면 첫 번 째에 걸릴 수도 있지만 절대 그런 번호를 입력해 두었을 리 는 없다. 물론 다른 컴퓨터가 있으면 이것은 식은 죽 먹기였 다. 인간의 뇌파와 동조되는 단말기를 갖춘 컴퓨터에서 1부 터 시작해서 끊임없는 조합을 만들어 보내면 될 것이다. 그 처리장치가 빠르면 빠를 수록 승부는 빨리 끝날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 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자, 이제 또 다른 짓을 할 차례였다. 소장에게 알아낼 것인가? 마취를 시켜 최면상 태에 빠뜨림으로써? 아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연구소 호 스트 내에, 기존의 메뉴와 똑같은 함정 프로그램을 만들어 넣는 것이다. 단, 그 프로그램은 만든 사람 자신이 아직 각 세부 내용을 모르는 만큼 단지 메뉴만 나타날 뿐, 실제 작업 을 할 수는 없다. 만약 실제 작업까지 안다면 그것까지 그대 로 실행되게 하면 좋겠지만. 그리고 그 함정 프로그램을 수행시켜 특정 단말기에 함정 메뉴를 내보낸다. 그것을 모르는 사용자는 비밀번호를 입력 한다. 그러면 프로그램은 스스로 그 번호를 어딘가에 저장시 키고, 함정을 만든 사람은 저장된 번호를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쉬운 일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 그 프로그램을 만들 것인가. 또한 그 프로그램이 시스템 내의 감시 프로그램에 의해 불 법이라는 것이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수행되게 하려면 그 체계부터 알아내야 했다. 한시가 급한 이 판국에. 우선 무정은 생각나는 대로 두들겨 보기로 했다. 소장의 이름이었다. 금세 붉은 바탕에 노란 글자의 경고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다시 입력하십시오.> 이런! 무정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이번에는 대문자만으로 구성 된 소장의 이름을 입력시켰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다시 입력하십시오.> 이번에도 실패였다. 이미 그는 두 번을 실패했다. 만약 한 번만 더 실패하면 연구소 상황실에 경고음이 울리거나 기록에 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정은 만약을 생각해서 작업을 취소시킨 뒤 처음부터 다 시 시작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시오.> 이번에는 소장 이름에서 대소문자를 바꿔서 입력시켰다. 하지만 역시 결과는....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다시 입력하십시오.> 무정은 계속 붙들고 늘어졌다. 일단 소장 이름과 관련된 것은 다 시도해 보기로 했다. , , , , 등등.... 소장의 이름만 가지고도 수많은 조합이 나왔다. 문득 그 옛날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너드 쇼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쇼가 영국에서 저명인사가 되었을 때 어느 잡지사에서 편 지가 왔다. 그 내용은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극작가 열 두 명을 추천해 달라는 것이었다. 조지 버너드 쇼는 거침없이 열 두 개의 이름을 적어보냈다. 그 이름들은 <조지 버너드 쇼>, <조지 쇼>, <버너드 쇼>, <조지 B. 쇼>, , , , , 등등이었다 던가? 무정은 피식 웃고 말았다. 너무 많아서 기억도 나지 않았 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더욱 힘들었다. 대소문자까지 따져 가면서 하려니....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었다. 31. 식당. 저쪽에 슈타이너 중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금껏 그를 기다리고 있던 무정은 우연을 가장하고 걸어 가서 그와 마주쳤다. 중사는 오늘이 비번이었다. "잘 있었나, 중사." 무정이 인사했다. "오랜만이군요, 대위님." 중사는 사무적인 말투로 인사하고 있었다. "음, 그렇게 됐네." 무정이 대꾸하고는 배식 창구로 가는 대열의 뒤에 섰다. "몸은 좀 괜찮으신 지요?" 슈타이너 중사는 여전히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겉치 레 인사였다. "음, 덕분에. 자네들에게만 수고를 끼치는군." "아닙니다, 대위님." 무정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갑자기 너무 친 근감 있게 대하면 슈타이너 중사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무정은 일부러 괴로운 표정으로 쓴 입맛을 다셨다. "리뀔레 소위 건은 참 안 됐습니다." 슈타이너 중사가 약간 착잡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무정이 노리던 바였다. "음, 난 그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네." 무정이 말했다. "처참했겠군요?" 중사가 물었다. 무정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느새 줄이 다 줄어들어 무정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배 식을 받고 나서 슈타이너 중사를 기다렸다. 저쪽에 나미가 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보였으나 그는 못 본 척했다. 슈타이 너 중사가 홀 쪽으로 나왔다. "어때? 모처럼 나와 함께 식사하겠나?" 무정이 슈타이너 중사에게 말했다. "좋으실 대로. 어차피 누군가와 대화하며 먹는 게 건강에 좋으니까요." "고맙네." 두 사람은 함께 적당한 자리를 찾아갔다. 문득 나미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는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그녀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 다. 그는 그저께 저녁 이후로 처음 식당에 나타나는 것이었 다. 생각 같아선 그녀와 함께 앉고 싶었다. 무정 자신의 욕심 이 아니라 나미가 걱정하기 때문에. 이런 마음은 처음이었 다. 그녀의 마음까지 걱정해 주다니. "이 연구소가 매우 중요한 것은 알지만," 무정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 젊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아픔을 느꼈 다네." 슈타이너 중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정은 이어서 말했다. "더욱이 그 장면을 지켜보는 베랑송 연구원의 마음은 어땠 겠나?"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슈 타이너 중사와 사적인 대화를 한 적도 거의 없었지만 오늘 같이 인간적인 대화도 처음이었다. 다만, 모든 것이 다 계획 에 의해서. "그건 대위님 마음도 같겠군요?" 슈타이너 중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깔았다. 무정은 중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중사도 무정을 마 주보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무정이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슈타이너 중사도 포크를 내려놓았다. "제가 이 연구소에서 5년을 근무했지만 이런 큰 사건은 처 음이었습니다. 물론 사고 자체는 내부에서 생긴 것이 아니지 만 결국 내부와 관련된 것이니까요." 무정은 나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것을 언뜻 볼 수 있었다. 나미는 무정으로부터 몇 미터 거리를 지나가면서 힐 끔 쳐다보고는 나가버렸다. 생각 같아선 당장 쫓아가 나미를 잡고 싶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지금은 매우 중요한 시간 이었다.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었다. "돈 루카 연구소라, 도대체 난 이 이름의 뜻을 모르겠네." 무정이 지나가는 말처럼 넌지시 던졌다. 하지만 슈타이너 중사는 평소와는 달리 그 한 마디도 그냥 넘기지 않고 대꾸 했다. "글쎄요, 뭐 다른 뜻이 있긴 하지만 저는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냥 돈 루카입니다. 저는 5년 동안 그 의미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서 일어나는 일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는 거죠. 그냥 내 할 일이 아니라면,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게 제 소신입니 다. 여기에선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더군요." 무정은 슈타이너 중사의 말에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척했지만 사실 그는 중사의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도록 신경 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무정은 중사의 말에 수긍하는 척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 자네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아." 음식이 계속 식어가고 있었다. 너무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식사를 계속하면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 다. "아, 이거 미안하군. 우선 식사부터 마쳐야겠네." 무정은 다시 포크를집어들었다. 32. 숙소. 화면에 연구소의 주 메뉴가 나타났다. 비밀번호. 분명히 그 비밀번호는 사용자마다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사용자가 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이곳 은 감시가 매우 철저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 경을 쓰지 않을 것이고. 문제는 그 단순한 비밀번호가 무엇 이냐 하는 것이었다. 저녁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는 이런 것을 입력시켜 본 적도 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지겨운 소장 이름을 수십 번이나 입력시켜 본 뒤에 새로이 시작한 연구소 이름 변형 시리즈였 다. , , 심지어는 나 등과 같은 철자 변환 시리즈까지. 그러나 모두 실패였다. 이제 그는 다시 단말기 앞에 앉아 제일 먼저 입력시킨 것 이 있었다. 아예 발음은 달라도 그 의미는 같으니까. 루카나 루크나 어차피 같은 성서의 인물 <누가>를 의미하고 있으니까. 그저 사용하는 나라에 따라 바뀌었을 뿐. , 지겨울 정도로 같은 단어를 많이도 입력해보고 있었다. 왜, 한글은 안 되나? 아예 <돈루크>라고 한글로도 써보지. 순간, 뭔가가 그의 뇌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것> 슈타이너 중사가 한 말이 머리 속에서 윙윙거렸다. 혹시.... 그것인지도 몰랐다! 돈 루카, 돈 루크, 돈 룩! 무정은 새로운 비밀번호를 입력시켰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다시 입력하십시오.> 약간 실망은 했지만 포기하진 않았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다시 입력하십시오.> 두 번 틀렸으니 이 시점에서 작업을 취소시킨 뒤 다시. 제발, 제발. 이번에는 경고 메시지가 나오지 않았다. 잠시 화면이 정지 되어 있었다. 어, 드디어? 그 상태로 몇 초가 흘렀다. 왜 그러지? 다시 몇 초가 흘렀다. 혹시 너무 자주 틀려서 이상이 생겼나? 그렇게 되면. 그리고.... 갑자기 화면이 바뀌며 새로운 화면이 나타났다. ==================================================== 연구원 상태 화면 ---------------- 연구원 번호 : 이 름 : 전 입 일 자 : 국 적 : [ 현재상태 ] 현등급 : 돈루카 : 건강 신 장 : 체 중 : 지방지수 : 혈 액 : 호 르 몬 : 두 뇌 : 심 장 : 혈압 : 폐 부 : 위 장 : 간 장 : 대 장 : 신 장 : 자 궁 : 규격 : 정신 : 사상 : 주의사항 : 생 년 월 일 : . . . ==================================================== 무정은 환호를 지르려다가 멈추었다. 강바닥의 흙탕물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의혹이 환희를 나꿔채고 먼저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눈이 화면을 빠르게 훑어 내렸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건 뭔가 이상했다. 일반적인 고용자 조회화면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가장 위 에 나와야 할 개인신상에 대한 항목들이 뒤쪽으로 밀려있었 다. 도대체 이러한 화면을 구성한 저의가 뭐지? 또한 <돈루카>라고 표기된 항목은 또 무엇인가? 연구소 이름이 하나의 항목명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쩌면 이 연구 소의 핵심이 그것과 관련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개개인 의 상태가 연구소의 존재가치라.... 이건 좀 깊이 생각해 봐 야 할 문제였다. 더욱이 신체 내부기관 하나하나까지 검토하고. 꼭 이럴 필 요가 있을까? 이 정도까지 체크를 해야 하는 걸까? 더욱이 자궁은 또 뭐야? 자궁 상태와 규격이 왜 필요하지? 혹시 이 곳 연구가 자궁에 치명적인 해악을? 자궁암? 수태불능? 왜 지? 약품 때문에? 아니면 방사선? 그렇다면 선유도 그것 때 문에? 그의 폐부 깊은 곳으로부터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33. 숙소.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무정은 샤워를 하고 나서 몸을 몸을 말리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왜 안 되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미를 영문자로 어떻게 써야 하 지? 나미, 정나미. 정말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신경을 쓰 게 만들었다. 그는 건조기 스위치를 끄고 샤워실을 나와 옷을 주워 입었 다. 정나미, 정나미. 도대체 영문자로 어떻게 쓴 거야? 무정은 다시 단말기 앞에 앉았다. 모니터에 떠올라 있는 연구원 상태 화면. 그 화면을 조회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연구원 번호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알 수가 없 었다. 미리 알아두었으면 되었겠지만 설마 그것이 필요하게 될 줄이야. 그렇다고 내일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조금이 라도 빨리 뭔가를 알아내고 싶었다. 무정은 다른 방법을 취했었다. 고유번호를 모르면 이름을 입력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영문자로 어떻게 쓰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 렇게 단순한 이름이 영어로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찾다가 안 돼서 이름 입력 규칙에서 어긋나는 처럼 대문자만으로 쓴다던가, 처 럼 성을 뒤에 쓰는 방법까지 다 동원해 보았다. 그러나 결국 은 찾아내지 못했다. 설마 그녀 이름이 등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었다. 또는 그녀가 따 로 영어식 이름을 쓰는가 하는 생각도. 하지만 그녀 이름은 워낙 영문표기가 단순한 데다가, 영어권 국가에서도 이질적 인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구태여 영어식 이름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일반적인 조회화면에는 다른 방법도 있었다. 그것은 전체 연구원의 데이터를 다 훑어보는 방법이었다. 연구원 번호와 이름, 그리고 간단한 자료 몇 가지만 나오게 해서 한 줄에 한 사람의 데이터가 나타나게 하는 가장 기본 적인 방법. 그러나 이 시스템에서는 그것이 되지 않았다. 아 니,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도의 메뉴를 찾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별도의 메뉴를 찾아내는 것도 문제 이기에 그는 포기하고 말았다. 정말 지겹도록 까다로운 시스템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무정은 다른 화면부터 검색할까 생각하 다가 몸도 씻을 겸, 머리를 식히기 위해 샤워부터 한 것이었 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우선 다른 사람부터 조회해 보기로 했다. 너무 나미에게만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마음은 다급하지만. 그 자신도 뼈저리게,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는 다른 이름부터. 샤를롯 베랑송. 무정은 그 이름을 입력했다. 금세 화면에 자료들이 나타났다. ==================================================== 연구원 상태 화면 ---------------- 연구원 번호 : F-095D-015 이 름 : BerenSon,Charlotte 전 입 일 자 : 095.11.09 국 적 : 프랑스 [ 현재상태 ] 현등급 : D (고용해제) 돈루카 : 정상 건강 최근검진일자 : 096.08.09 신 장 : 176 체 중 : 58 지방지수 : 1.0 혈 액 : 정상 호 르 몬 : 정상 두 뇌 : 정상 심 장 : 정상 혈압 : 정상 폐 부 : 정상 위 장 : 정상 간 장 : 정상 대 장 : 정상 신 장 : 정상 자 궁 : 정상 규격 : 4.1 정신 : 비정상-히스테리 사상 : 요주의 주의사항 : 히스테리. 조치 : 고용해제. 귀환조치. . . ==================================================== 잘들 하는군. 무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인이 죽어서 히스테리에 빠졌 다고..., 고용해제, 그런 건 좋다고 치자, 하지만 요주의라 는 둥 현등급 따위는 또 뭐란 말인가? 도대체 그 여자들을 얼마나 감시하고 있는 거지? 잠시 분개하던 무정은 다시 이성을 찾았다. 지금 이 상태에서 머물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분석을 시작해 보자. 연구원 번호 F-095D-015. 이것을 대충 훑어보면 F는 여자임을 의미했고, 095는 연도 를 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D는 무엇일까? 이 자료만으 로는 조금 분석이 어려웠다. 무정은 다른 여자의 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그 여자 이름이 뭐였지? 그 여자가...재클린 맥...맥 뭐더 라? 음, 맥..., 맞아, 맥과이어! 무정은 그 이름을 입력시켰다. 화면에 맥과이어의 자료가 나타났다. 이런! 세상에.... 그것을 훑어보던 무정이 탄식했다. ==================================================== 연구원 상태 화면 ---------------- 연구원 번호 : F-096A-007 이 름 : McGuire,Jacklin 전 입 일 자 : 096.02.09 국 적 : 아메리카 합중국 (U.S.A) [ 현재상태 ] 현등급 : B (중급) 돈루카 : 감소 (0.03) 건강 최근검진일자 : 096.08.24 신 장 : 174 체 중 : 53 지방지수 : 0.9 두 뇌 : 정상 심 장 : 정상 혈압 : 정상 폐 부 : 정상 위 장 : 정상 간 장 : 정상 대 장 : 정상 신 장 : 정상 자 궁 : 주의-1차 규격 : 4.2 정신 : 정상 사상 : 정상 주의사항 : 1차 발작 조치 : 단축검사 (주 1회) . . ==================================================== 빌어먹을 자식들! 무정은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자궁 항목의 <1차> 라는 말은 주의사항에 있는 <1차 발작>과 같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최근검진일자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베랑송 이 8월 9일인데 비해 맥과이어는 24일이니까. 따라서 지난 17일에 발생한 일, 그때 맥과이어는 자궁에 발작을 일으켰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보고사항에는 단지 식 중독으로 나타나 있었다. 개자식들,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어! 베랑송의 최근검진일이 8월 9일인데 반해 맥과이어가 24일 인 것은 그녀가 주 1회 검진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8월 9일은 나미가 검진을 받은 날이었다. 그렇다면 모든 여 자들도 적어도 3개월에 한 번은 자궁검사를 포함하는 종합진 단을 받는 것이다. 또한 <돈루카>의 감소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돈루카라 는 것이 무엇인데 수치로 표시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 순히 연구소 이름이 아닌 어떤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인간 신체 어느 부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했 다. 항목명이 위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서는 신체의 전체지수 라던지 혹은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 이것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무정은 흥분하면서다른 자료들을 분석했다. 베랑송이 95 년 11월 전입에 095D이고 맥과이어가 96년 2월 전입에 096A 라면 그 분류방법은 A부터 D까지가 있음을 의미했다. 즉 네 개의 알파벳. 그는 그 기호가 의미하는 바를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분기를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나미는 096C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세 자 리는 분기별 연구원 일련번호를 의미할 것이다. 아마 세 자 리로 설정해 둔 이유는 나중에 인원이 백 명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매 분기당 20명이었으므로 나미의 번호는 1부터 20 사이일 것이었다. 무정은 귀찮지만 그것을 일일이 입력시켜보기로 했다. 잘 하면 첫 번째가 될 수도 있고 운 나쁘면 스무 번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평균확률은 10이었다. 다행히 나미의 번호는 앞쪽에 있었다. 두 번의 실패 끝에 그가 F-096C-003을 입력하자 나미에 대한 자료가 나타났다. ==================================================== 연구원 상태 화면 ---------------- 연구원 번호 : F-096C-003 이 름 : Jeong,Nahmii 전 입 일 자 : 096.02.09 국 적 : 대한연방공화국 (U.R.K) [ 현재상태 ] 현등급 : A (상급) 돈루카 : 없음 건강 최근검사일자 : 096.08.09 신 장 : 175 체 중 : 56 지방지수 : 1.0 혈 액 : 정상 호 르 몬 : 정상 두 뇌 : 정상 심 장 : 정상 혈압 : 정상 폐 부 : 정상 위 장 : 정상 간 장 : 정상 대 장 : 정상 신 장 : 정상 자 궁 : 정상 규격 : 4.0 정신 : 정상 사상 : 정상 주의사항 : 없음 조치 : 없음 . . ==================================================== 나미의 자료를 훑으면서 무정은 혀를 찼다. 나미의 이름은 어이없게도 Nahmii로 되어있었다. 일반적으 로 한국식 이름 사이에 넣는 하이픈도 빠져 있었고 더욱이 철자도 특이했다. 그러나 무정은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런 식 으로 쓰는 것은 서구권 어느 나라에서나 발음하는 데 잘못이 없도록 한 배려였다. 무정 자신만 해도 <박>자를 대부분 사 람들처럼 Park가 아닌 Pahk로 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방식은 영어 단어와 혼동이 될 뿐만 아니라 유럽국가에서는 <파르크>라고 읽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R자를 빼 버렸다간 미국에서 <팩>으로 발음할 것이 다. 그것은 오히려 공원이나 주차장만도 못했다. 포장을 의 미하고 있으니까.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서구권 어느 나 라에서나 공통으로 발음할 수 있는 Pahk를 쓰는 것이었다. 나미의 경우는 이름에 있어 그런 배려를 한 것이었다. 그 녀는 <내미>라든가 <내마이> 따위로 불리고 싶진 않았을 것 이다. 나미에 대한 모든 상태는 정상이었다. 그런데 뭔가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나미의 <돈루카> 상 태는 <없음>이었다. 도대체 돈 루카가 무엇이란 말인가? 무 정의 머리 속은 뒤죽박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여자는 정상, 다른 여자는 감소, 그리고 나미에게는 없음,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한 상태나 수치가 아닌 존재유무까지 관련되는 것이었다. 돈루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도대체 무 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4.0은 또 무엇인가? 그 규격의 기준은 어디에 둔 거지?여자의 생리구조에 대해 문외한인 그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문득 무정은 또 한 가지 이상한 항목이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다른 여자들을 살필 때는 무심코 넘겼지만 그 대상이 나미가 되자 어느 하나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지방지수. 이건 또 뭐란 말인가? 이 기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지방지수 1은 어떤 상태일까? 지금 나미의 몸매 같은 상태가 바로 지방지수 1인가? 거의 완벽한 몸매? 살이 찌면 그 지수 가 올라가고 마른 여자는 떨어지는 건가? 그러기에 애초에 선발할 때도 수영복심사 아닌 반바지 심사를 한 것일까? 정말 어이 없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제 그가 살펴봐야 하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사실은 가장 먼저 살폈어야 했지만 잊고 있었던 사람. 원래의 목적 이었던 사람. 무정을 이 머나먼 곳까지 오게 만든 사람. 선유. 그는 선유의 이름을 입력했다. 즉시 오류 메시지가 나타났다. <없는 이름입니다. 다시 입력하십시오> 또 시작이군. 무정은 짜증이 났다. 이거 정말, 피곤하군. 분명히 그 이 름은 이상이 없었다. 무정이 선유의 이름 철자조차 모른단 말인가? 설마 이 연구소에서 다른 철자를 쓸 리는 없었다. 선유가 무정에게 매주마다 보내왔던 영상편지에도 그렇게 표 기되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혹시 이미 유효기간이 끝난 자료는 조회할 수 없는 것일 까? 그럴 리는 없었다. 이런 중요한 연구소에서는 모든 기록 을 오랜 기간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무정은 선유의 고유번 호를 추측해 보았다. 그녀는 지난 해 5월에 이곳에 전입되었었다. F-095B-0??. 따라서 여기까지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이제 또 평균 확률 10에 기대를 걸어야 했다. 무정은 첫 번째 번호를 입력시켰다. 무정은 기대를 가지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화면에 집중했 다. 그러나 자료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가 튀어나 왔다. <과거 자료를 조회하시겠습니까?> 무정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비밀번호를 입력하십시오.> 또야? 무정은 그대로 의자에 눕고 말았다. 이건 정말 예상도 못한 일이었다. 또 비밀번호라니. 이미 처음에 사용했던 비밀번호를 다시 쓸 리는 없었다. 그렇게 중첩되게 쓴다면 구태여 비밀번호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그 러나 무정은 혹시나 하는 기대로 그것을 입력시켰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다시 입력해 주십시오.> 예상대로였다. 기대는 깨어졌다. 이미 예상했던 일임에도 맥이 빠져 달아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빌어먹을. 무정은 일단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은 머리가 돌 지경이었 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머릿속 이 복잡한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었다. 그 동안 무정은 분명한 사실 하나를 밝혀냈다. 아직 진상에 는 접근하지 못했지만 분류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돈루카라는 것에 대한 어렴풋한 정체였다. 나미와 함께 들어온 모든 여자들은 돈루카가 없다고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직업병 같은 것인가? 그러나 그것 은 아니었다. 연구원 번호가 인 여자들에게도 돈루카가 없었다. 그들은 지난 2월에 전입을 온, 말하자면 3 차 분기에 해당하는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2차 분기에 해당 하는 여자들에게는 돈루카가 있었다. 즉, 돈루카는3개월을 주기로 발생과 소멸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들이 2 년을 근무하면 돈루카의 존재상태는 4번, 3년이면 6번에 해 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연구원의 건강에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근무기간이 1년뿐인 것만을 보더라 도. 무정은 다시 최초의 메뉴로 돌아왔다. 시스템 구성 시스템 감시/제어 연구원 상태 CCTV 화면 연구자료 입력 핵심 연구 돈 루카 그 중에 을 선택하니 곧 모니터에는 새로운 메 뉴가 떠올랐다. 컴퓨터실 연구원 구역 핵심 연구 구역 돈 루카 구역 무정은 연구원 구역을 선택했다. 그 옆쪽에 문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카메라 번호 : / 전체 확인 : 수동/자동> 카메라 번호에 대해서는 그도 알 수 없었으므로 <전체 확 인>을 선택했다. 그러자 수동/자동 선택 부분이 마킹되었다. 무정은 수동을 선택했다. 첫 번째 카메라의 화면이 나타났다. 한 연구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각종 실험기구 및 전자기기들이 들어차 있는 그 방 안에는 한 연구원이 배 양접시가 가득한 탁자 앞에 앉아서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 었다. 그녀는 연한 녹색 가운을 걸치고 머리에는 같은 색의 두건을 쓰고 있었다. 실내에는 1인용의 시설 이상은 되어있 지 않았다. 무정은 화면 위에 나타난 자막을 훑어보았다. <카메라 번호 : FR-101> <연구원 이름 : 이리나 미하일로바> 무정은 그 카메라 번호가 1인 1연구실 체제와 관련되어 있 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나미가 있는 연구실의 카메라 번호는 쉽게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선은 미하 일로바의 작업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나 무정은 이미 실망하고 있었다. 그 연구원이 작업하 고 있는 모습은 이 연구소의 비밀만큼이나 화려하지 않았다. 무정은 뭔가 어마어마한 시설과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이한 연구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외적인 면만 보면 안 되지. 무정은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미하일로바가 연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지만, 이 모니터 크기로 는 더 이상 자세한 것은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카메라를 줌인 시켜서 확대해 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연구소 상황 실에서 눈치를 챌 테니까. 다른 방법은 커다란 모니터를 통 해 보는 것이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었다. 안보 상황실에 가 서 이런 일을 공공연히 한다는 것은 정말 미친 짓이었다. 무정은 다음 화면을 불렀다. 번 카메라에 연구원은 <제인 윌리엄즈>. 역시 시 설은 1번 연구실과 동일했고 하는 일도 별 차이가 없어 보였 다. 아니, 전혀 다른 구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무 정 자신이 보기에는. 무정은 다음 화면을 불렀다. 나미의 모 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후후, 재미있군. 무정은 나미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 지었다. 항상 세련된 외모의 그녀만 보다가 가운을 입고 머리에 두건을 둘러쓴 모 습을 보자 우습기 그지 없었다. 그녀가 하는 일도 별 다를 것이 없었지만 현재 그녀는 시 험관 하나를 들어 살펴보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머리를 뒤로 넘기고 두건 아래 로 넓은 이마가 드러난 그녀 모습이 무정에게 애정을 불러일 으켰다. 그 큰 아가씨가 10대 소녀처럼 귀여운 모습으로 가 슴 속에 스며들었다. 무정은 미소지으면서 한참 그녀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 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은 이곳에 그다지 위험해 보이는 시설 은 없다는 것이었다. 무정이 예상한 것처럼 방사능이라든가, 전자파, 혹은 유독 가스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 려 연구실은 다른 구역보다 훨씬 청결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요소는 무엇인가? 지금 무정은 해답을 찾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복잡한 미로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연구원들이 저 시설 이외의 곳으로 벗어날 일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개개인의 일이 서 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니까. 따라서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요소는 저 연구실 내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그들의 잦은 검진은 단지 오지에 서 닫혀진 환경이라는 상황 때문 만일까? 무정은 카메라 선택을 수동으로 해서 2차 분기부터 4차 분 기까지의 연구실 몇 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모두 같은 환 경, 같은 조건이었다. 근무 기간이 지날 수록 점점 열악한 환경 하에서 근무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핵심에 접근하면 할 수록 수수께끼는 더 많아졌다. 34. 8월 31일 04:16. 숙소. 무정은 다시 단말기 앞에 앉았다. 서서히 쏟아져오는 잠을 쫓기 위해 찬물로 얼굴을 씻고 돌 아온 것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후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런 뒤에 그는 다시 모니터를 쏘아보았다. 화면에는 주 메뉴가 나타나 있었다. 무정은 <연구자료 입력>을 선택했다. 예상대로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시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번호를 입력했다. 역시 그가 예상했던 대로 주 메뉴에서의 비밀번호는 동일 했다.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연구원 번호 : / 전체 확인 : 수동/자동> 무정은 나미의 연구원 번호를 입력했다. 새로이 나타난 자료 화면은 다른 생물학 연구소와 비교할 때 별로 특기할 만한 사항이 없었다. 그저 일반적인 내용에 세부 항목들만 조금 색다를 뿐이었다. 그 내용으로 보아 보 통의 유전공학 연구소의 연구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또한 유전공학자가 아닌 그로서는 <아데닌>, <시토신>, <구아닌>, <티민> 등의 항목명이 염기 배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이상 의 알 길이 없었다. 도대체 이 자식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거지? 무정은 욕을 해대면서 이어 다른 연구원들의 작업내용을 살펴보았지만 모두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모든 연구원들의 작업내용이 같았다. 1차 분기이든 4차 분기이든 간에. 따라서 연구원들을 분류하는 기준은 작업방법이 아닌 돈루 카의 존재여부에 의거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 <돈루카>가 무 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무정은 다시 주 메뉴로 돌아왔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다음 자료를 검토하기 전에 잠시 머리를 식히기로 했다. 이제 <돈 루카>라고 되어있는 메뉴로 들어갈 차례였다. 그러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 면서 점점 더 정신이 없었다. 이미 그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더욱 많은 사 실을 알게 되면 머릿속은 더욱 엉킬 것이고, 더욱이 흥분이 극에 달해서 자신도 모르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상태였 다. 따라서 그는 잠시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 전반에 관한 종 합적인 추리를 해보았다. 그가 연구실 작업 환경이나 작업내용을 살펴본 바에 의하 면 사실 이런 작업에는 사람들이 그다지 필요한 것 같았다. 더욱이 협동 작업이 아닌 개인 작업이라면 더욱 단순하므로 로봇만으로도 다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점이 궁금하지 않았다. 이 연구소의 연구 목표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있었다. 인간. 특히 여성. 이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연구원들 그 자 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연구원들은 스스로를 연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자기 자신을 연구한다. 철학적이라고? 글쎄.... 무정이 생각하기에는 전혀 철학적인 구석이 없었다. 35. 같은 날 07:54. 상황실. 무정은 쏟아져 나오는 하품을 참으며 상황실에 들어섰다. 마이어 중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하십니까, 대위님?" "잘 있었나, 중위?" 무정은 대꾸하면서 상황실을 둘러보았다. 슈타이너 중사가 보이지 않았다. 마이어 중위가 눈치를 채고는 먼저 말을 꺼 냈다. "슈타이너 중사는 오늘 비상 외곽근무입니다." "비상 외곽근무?" 무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아침에 출근하니 록포드 중위가 전달하더군요. 오늘 아침 07시 부로 3급 비상태세가 발령되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로?" 무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계속감시해 왔던 아까쓰끼 단의 태양계 외곽 함대인 <검 은 닌자> 함대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 다지 큰 문제가 아니지만 이미 연방군 함대들은 2급 비상태 세에 돌입했습니다." "아까쓰끼?" 무정이 물었다. 갑자기 잠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는 거의 밤을 새고 불 과 몇 시간 못 잔 상태에서 출근했다. 지금도 졸음이 그를 지배하려 들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상황실에서 틈틈이 잠 을 자 두고 퇴근 후에는 다시 연구소 컴퓨터를 뒤져보려고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아까쓰끼란 말인가. 아까 쓰끼라면.... 무정이 물었다. "그래서 슈타이너 중사도...." "중사는 외곽 상태 점검을 하는 직원들과 함께 나갔습니 다." "어디 한 번 보세." "네." 마이어 중위가 단말기를 조작하자 곧 거대한 중앙 스크린 에 연구소 외벽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화면은 연구소 주변 에 떠있는 감시위성으로부터 전송된 것이었다. 세 척의 우주정들이 연구소 외벽을 따라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중 두 척은 정비보수용의 2인승 함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1인승 초계정이었다. 그 초계정에는 슈타이너 중사가 타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어 슈타이너 중사가 타고 있는 초계정에 설치 된 카메라로부터 전송된 장면이 나타났다. 두 척의 보수정이 앞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음, 됐네. 이제 아까쓰끼에 대한 것을 보여주게." 아까쓰끼 단은 수십 년 전에 일본에서 발생한 테러 단체였 다. 그들은 달을 그들의 상징으로 삼는 비밀 종교 단체로서 전 세계의 약소민족으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교세를 확장시켜나갔다. 그들의 교리는 단순했다. 그것은 체제와 전 통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 사탕발림 같은 교리는 사회 소외 계층에게 큰 공감을 얻어 이제는 세계적인 단체가 되어있었 다. 일종의 다국적 점조직 테러 집단이라고 볼 수 있었다. 더욱이 지금은 우주를 무대로 한 테러 및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전력을 높이기 위해 중요한 병기나 첨 단과학 연구들을 가로채기도 했다. 특히 유명한 것은 얼마 전 목성의 위성 가니메데 궤도상에 위치한 한국-러시아 공동 연구소인 미르를 파괴한 것이었다(주: <칼날의 끝에 서서> 참조). 당시 그들은 수십 명의 연구소 직원들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목성-지구간 여객선 <엘렉트라>호를 납치해서 인질 극을 벌이던 끝에 승객 전원을 학살하기까지 했다. 처음에 그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하던 단체였다. 따라서 그들의 상징은 일본기와는 반대인 검은 하늘에 뜬 붉 은 달이었다. 그 기를 그들은 <암천적월기>라고 불렀고 영어 로는 <라이징 문>이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그 사실만 보아도 그 모든 것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었 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전세계를 상대로 명분 없는 테러를 일삼고 있었다. "자, 이걸 보십시오." 마이어 중위가 말했다. 커다란 스크린에는 태양계 성도가 나타나 있었다. 그 성도에 소행성대를 지나는 아까쓰끼 함대의 궤적이 나 타났다. 그 궤적은 소행성대에서 목성을 향해 움직이다가 그 중간의 어느 한 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만약 그들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면 그 궤도는 목성을 향하 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게 언제 일인가?" 무정이 물었다. 마이어 중위가 화면을 가리켜가면서 설명했다. "벌써 3주쯤 지난 일입니다. 당시 연방군 목성 함대와 목 성 안보국에는 1급 비상태세가 발령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까지 그들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이제는 여기 토성까지 비상 태세에 들어가도록 지구에 있는 본부로부터 지시가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그들이 공격목표가 목성궤도에 있었다면 이 미 그들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으로 봐서 그들의 목표는 목성이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 아침 07시 부로 토성에 비상이 발령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1급 비상이 아니라 2급이지?" 무정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까지 아까쓰끼의 행동범위는 목성궤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번에 토성까지 그들이 온 다면 그 목표는 뻔합니다. 바로 우리 연구소이죠." "음." 무정은 낮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이건 또 다른 골치거리였다. 전혀 예상도 못했던 사건. 아 까쓰끼가 이곳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이미 거의 이곳에 도착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러한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단 지 현재 보이지 않게 행동하는 그들이 은밀하게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면.... "그런데 자네는 그들이 이곳을 노리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에서 매우 비밀스러운 연구가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은 극비에 붙여져 있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극히 소수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 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이 연구소의 기밀성 자체가 그 들의 구미를 당긴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위협을 느꼈다는 겁니다." 중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목표는 <비밀> 그 자체인 것 같습니 다." "음, 그렇군." 무정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36. 같은 날 12:07. 식당. 무정은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식당에서 나오고 있는 슈타이너 중사와 마주쳤다. 중 사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안녕하십니까?" 중사가 말했다. "그래, 벌써 식사를 했군?" 무정이 대꾸했다. "네, 급해서 먼저. 그런데 이제 몸이 나으셨나 보군요?" 중사가 물었다. "음, 그래. 그런데 자네 외곽 근무는 끝났나?" "아닙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그 아까쓰끼인지 때문에 철저한 검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밤을 새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정말 수고가 많군." "네. 그럼 수고하십시오." 중사는 빨리 말을 끊고 움직였다. "그래, 자네도." 무정은 슈타이너 중사가 복도를 따라 걸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배식을 받은 무정은 나미가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나미는 곁눈으로 무정을 흘끗 흘겨보더니 모르는 척하고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삐쳐도 단단히 삐 쳐버린 것 같았다. "오랜만이네요?" 무정이 나미의 맞은 편에 앉으며 말했다. 나미는 대꾸도 하지 않고 힐끔 쳐다보더니 식사만 계속했다. "화가 났군요?" 무정이 포크를 들며 말했다. 나미는 잠시 동작을 멈췄을 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정말 미안해요. 이거 제가 요즘 일이 많이 터져서." 그러나 나미는 이제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아예 무정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무정은 잠시 생각하다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지난 번처럼 뻔뻔스럽게 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무정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제가 나미 씨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 말에 나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얼굴에 매우 희 미한 웃음이 스치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 을 지으면서 무정을 노려보다가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이것도 안 통하는군. 무정은 새로운 작전을 모색했다. 뭐가 좋을까? 곧 그는 무 거운 분위기로 돌입했다. 아무래도 이럴 때는 모성본능을 자 극하는 편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싫은," 무정이 무겁게 말했다. "한 동안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지난 번 리뀔레 소위 사건 때 구명정 수거를 하면서...." 너무 많은 말을 하면 안 되겠지? 천 마디 말보다 적당히 여백을 두면서.... 나미가 무정을 바라보았다. 무정은 모르는 척 하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얼굴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미는 식사를 멈추고 계속 무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뀔레 소위요?" 나미가 물었다. 무정은 슬쩍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면서 끄덕거린 후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그녀 얼굴에는 근심이 떠올라 있었다. "그 수거작업을 무정 씨가 했나요?" 나미가 물었다. 무정은 그저 끄덕이기만 했다. "그랬군요." 나미가 말했다. 잠시 시간을끌면서 분위기를 침전시키던 무정이 물었다. "베랑송 연구원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저도 그날 이후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휴게실에도 안 오 니까요. 아마 계속 의무실에 입원중인 것 같아요. 아마 며칠 후 목성에서 오는 정기 연락선을 타고 떠날 것 같아요." 무정은 끄덕거리기만 했다. 지구와 토성 간의 정기 여객선은 한 달에 한 번 밖에 없었 다. 따라서 급히 지구로 가야할 사람이나 화물들은 목성행 연락선을 타고 그곳에서 지구행 여객선을 타야했다. 무정은 이제 나미와의 사이에 대화가 트였으니지난 밤에 연구소 컴퓨터에서 보았던 내용들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나미 자신이 그 사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들이 이 연구 소 안에 머무는 한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별히 할 말이 없어진 무정은 화제를 돌렸다. "건강에 신경 쓰세요." 나미가 입안에 음식을 가득 물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표정은 묻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요즘 문제들이 많아요. 맥과이어 연구원이 때 아닌 식중 독에, 베랑송 연구원은 귀환조치를당하고." 나미가 끄덕거리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정말 조심해야겠어요. 여기서 무사히 근무기간을 채우려 면." "맞아요." 무정이 끄덕이며 대답했다. 갑자기 나미는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난 돈이 필요해요." 무정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나미도 개의치 않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37. 같은 날 16:51. 상황실. "긴급전문입니다!" 마이어 중위가 말했다. 무정은 고개를 돌려 중앙 스크린을 보았다. 거기에 자막이 나타나 있었다. 발신 : 지구연방군 사령관 수신 : 지구연방군 소속 장병 전원, 안보국 요원 전원 자막이 사라지자 연방군 사령관 미하엘 쾨니히스발트 대원 수의 모습이 나타났다. 쾨니히스발트 대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긴급 상황이다. 지구표준시 15시 14분에 입수된 정보를 전 장병들에게 하달한다. 아까쓰끼 테러단이 신무기 를 개발했다. 그것은 반입자 포라고 알려졌다." 반입자 포! 강한 충격이 무정의 머리를 엄습해왔다. "현재 추정되는 바로는 아까쓰끼 테러단의 <검은 닌자> 함 대가 토성궤도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17시 부로 연방군 토성기지는 물론 목성 기지 전역에 1급 비상태 세를 선포한다." "이런, 제기랄!" 무정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마이어 중위가 돌 아보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세부 사항은 각 기지별로 하달한다. 이상 끝이다." 쾨니히스발트 대원수의 모습이 사라졌다. 동시에 화면에는 비상태세 전문이 나타났다. 제1부. 마마콘 1. 제2부. 지구연방군 사령관. 제3부. 2096년 8월 31일 17시 정각. 제4부. 규정대로 실시. 토성 <돈 루카> 연구소 방어 중점. 토성 함대 전투태세 돌입. 목성 제3함대 토성으로 이동. 별도 첨부한 <반원자 포> 자료를 참조할 것.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군요?" 마이어 중위가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래, <검은 닌자> 함대의 전력은 어떻게 되나?" 무정 역시 창백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이어는 단말기를 조작했다. 스크린에 적 함대의 도표가 나타났다. 무정도 이미 그것을 보고 있었지만 흥분한 마이어 중위는 그 화면을 읽고 있었다. "시나노 급 항모 1척, 야마또 급 전함 1척, 그리고 순양함 2척에 구축함 4척. 엄청나군요? 하지만 우리 함대가 훨씬 더 강합니다. 더욱이 목성 제3함대 일부가 훈련차 이미 이곳에 와있으니까요."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마이어 중위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반입자 포가 있다고 하니 그게 문제 입니다." "몽둥이 든 골리앗과 창을 든 다윗의 싸움이 되겠군?" 무정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입자 포는 말 그대로 반입자를 발사하는 포였다. 반입자 라는 것은 현재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들에 대한 반대되는 성질의 입자였다. 예를 들어 전자에는 그 전기적 특성이나 기타 주요성질이 정반대인 양전자가 존재하는 것이 었다. 전자 같은 입자와 양전자 같은 반입자는 서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를 발생하면서 소멸되어 버린다. 무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입자를 취급하기는 힘들텐데, 그렇다면 놈들의 전함과 순양함 포에만 사용되겠지?" 무정의 말에 답한 것은 마이어 중위가 아니었다. 화면에는 비상태세 전문에 별첨된 또 다른 전문이 나타나 있었다. < 반원자 포 > 아까쓰끼 테러단은 세계의 유명 물리학자들을 납치하여 소 행성대의 연구소에 거대한 입자가속기를 건설하고 반입자들 을 생산해왔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반입자가 아닌 반원자 이다. 그들은 반원자를 원자종류별로 생산하고 있다. 이 반 입자들을 조합하여 반원자를 생성하는 기술은 아직 지구상에 서는 실험단계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까쓰끼 테러단이 이 반원자의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감으로써 지구는 새로운 위기 에 직면하게 되었다. 반원자는 양전자나 반양성자 등의 반입자에 비해 저장이나 취급에 있어 훨씬 용이하다. 모든 원자에는 전자와 양성자가 있기 때문에 양전자나 반양성자를 취급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반입자를 무기로 만드는 데는 대규 모 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순양함 이상의 운송시설이 필요 하다. 그러나 반원자는 그에 상응하는 원자를 만나지 않으면 반 응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취급에 필요한 장치는 매우 축소 화될 수 있으므로 최소한 전투기에까지 설치가 가능하다. 아까쓰끼 테러단의 반원자 포에서 사용되는 반원자는 대부 분의 우주선이나 우주구조물을 이루고 있는 철 원자의 반대 인 철 반원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 가지 더 추정할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은 필요에 따라 여 러 종류의 반원자를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전투기까지?" 무정이 탄식했다. "이건 생각보다 더욱 심각하군요?" 마이어 중위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38. 같은 날 18:11. 식당. 무정은 나미의 옆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늘 마마콘 1이 발령된 거 알죠?" 무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미는 조금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무정은 계속 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까쓰끼가 이쪽으로 오고 있 는 것 같아요. 만약 연구실에 있을 때라도, 마마콘 제로가 발령되면 빨리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거주구역으로 돌아가 요. 자칫 충격으로 화학 물질들이 엎어지거나 하면 위험하니 까요." "하지만 위험한 화학물질들은 엎어지지 않는 곳에 들어있 어요. 또한 무슨 일이 있으면 자동차단되고요." 나미가 대답했다. "그렇다 치더라도 적색경보가 울리면 빨리 연구실을 떠나 요." "그건 이미 교육 받았어요." "다행이군요." 무정이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하지만 절대 연구실에 미련 두지 않고 떠나야 한다는 것 도 절대 잊지 말아요." 무정이 말했다. 나미는 어린애처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39. 9월 1일 08:49. 숙소. 무정은 나른한 몸을 침대에 눕혔다. 그는 지난 밤을 상황실에서 샌 것이었다.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눈을 붙이긴 했지만 얼마 자지 못했다. 그나마 도 신경이 쓰여서 선잠을 잤을 뿐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토스트로 아침 식사를 대충 때우고 나니 더 욱 나른했다. 이제 잠이 유령처럼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무정은 근무복장을 입은 그대로 누워있었다. 언제라도 비 상이 발령되면 그대로 뛰어나가야 했다. 잠의 유령은 그를 점점 깊은 늪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 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의식은 계속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 19세기 러시아 토벌대의 말 뒤에 끌려가는 반 란군의 시체처럼. 질질. 꾸웍--! 꾸웍--! 꾸웍--!. 갑자기 경계경보가 울렸다. 무정은 눈을 떴다. "아까쓰끼입니다!" 모니터가 켜지면서 록포드 중위가 외쳤다. 40. 같은 날 08:50. 상황실. 문이 열리고 무정이 뛰어들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마이어 중위가 충혈 된 눈 으로 돌아볼 뿐이었다. 이미 상황실에는 모든 근무자들이 모 여있었다. 무정이 전입을 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 나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무정은 중앙 스크린을 주시했다. 함대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토성 함대 전체가 연구소 근처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 중 에는 항공모함 <드라켄> 호도 있었다. 드라켄 호의 갑판으로 부터 전투기들이 날아올랐다. "놈들은 어디까지 왔지?" 무정이 외치듯이 물었다. "화면을 보십시오." 록포드 중위가 말했다. 커다란 화면이 네 개로 갈라지면서 각 화면마다 서로 다른 장면들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오른쪽 아래의 아까쓰끼 항모 시나노였다. 화면에 나타난 모습은 측면도였는데 온통 검은 색의 선체에 중앙에는 붉은 동심원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그 검은 색 때문에 배경의 우주공간과 식별하기가 힘들었다. 다음은 왼쪽 위에 나타난 전역 상황도였다. 그 화면에는 토성궤도 내의 상황이 한 눈에 알 수 있게 표 시되어 있었는데 적의 함대는 돈 루카 연구소를 향해 다가오 고 있었다. 거리는 약 5만 킬로미터 정도였지만 시나노에서 발진한 전투기들은 훨씬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또한 미란다 위성궤도상의 토성 안보기지에서 발진한 연방군 공격 비행대들은 적을 향해, 그리고 전투비행대는 연구소를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왼쪽 아래 화면에는 토성기지로부터 날아오는 연방군 전투 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흰 색으로 칠해진 전투기들은 검은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매우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위의 화면에는 연구소를 호위하는 연방 군 함대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많은 전투기들이 적 함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무정이 외쳤다. "도대체 이 연구소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저렇게 난리들이 지?" 한 화면이 바뀌면서 끝없는 별밭을 향해 날아가는 백색 전 투기들의 무리를 보여주었다. 화면 위에는 <항모 드라켄 소 속 제3전투비행단 빅토르 I. 삐예뜨로프 대령>이라는 자막이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놈들은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났나?" 무정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놈들은 운석군을 이용했습니다." 록포드 중위가 슬쩍 돌아보면서 대답했다. 전역 상황도 화면이 바뀌면서 적의 함대가 침투한 경로를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운석군을 의미하는 기호가 토성 궤도 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운석군이 향로가 토성에서 벗 어날 듯 하자 거기서 여러 개의 붉은 점 하나가 갈라져 나왔 다. 그 점이 확대되면서 <검은 닌자> 함대의 모습으로 바뀌 었다. "개자식들! 별 짓을 다 하는군." 무정이 내뱉었다. 적 함대에 다가가던 연방군 전투기들이 산개하기 시작했 다. 곧 녹색의 빔들이 날아왔다. 화면은 심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삐예뜨로프 대령의 전 투기가 급회전을 하는 것이었다. "저 화면을 확대해 봐!" 무정이 외쳤다. 곧 그 장면이 스크린에 가득 찼다. 왼쪽 구석에는 양측의 전력 비교표가 나타나 있었다. 수적으로만 따진다면 아군이 세 배는 우세했다. 갑자기 멀리서 폭발이 이는 것이 보였다. "어느 편이지?" 무정은 전력 비교표를 보았다. 아군기 한 대가 줄어들어있 었다. "이런!" 무정이 혀를 찼다. 삐예뜨로프 대령의 전투기에서 핑크 빛의 빔이 적들을 향 해 날았다. 이제 화면 안에는 온통 핑크 색과 녹색의 빔이 뒤엉켜 흐르고 있었다. 가끔씩 하얀 전투기들이 화면을 가로 지르는 모습이 보였지만 적기는 보이지 않았다. 적들은 온통 검은 색이었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잘 식별되지 않았다. 다만 전투기에서는 레이더를 이용해 적을 식별하고 있을 것이다. 녹색 빔이 아군 전투기의 동체를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보였다. 순간 그 전투기는 그대로 불덩이가 되어버렸다. "저럴 수가!" 누군가가 신음소리를 냈다. 반원자 포의 위력은 무서웠다. 경미하게 스치는 것만으로 도 끝장이었다. 더욱이 반원자는 별도의 유도장치가 없이도 가까운 대응 물질을 찾아갔다. 아마 적 전투기가 쏘아대는 탄종은 알루미늄에 반응하는 알루미늄 반원자로 되어있을 것 이다. 전투기 기체에 사용되는 울트랄루민 합금의 주된 소재 는 알루미늄이었다. 전역은 적기와 아군기가 뒤엉켜 완전히 독파이트 양상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적 공격 편대들은 아군 전투 비행대를 그대로 돌파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아군 전투기들 은 적을 쫓지 않았다. 연구소 주변의 전투기들이 그들을 맞 아 싸울 것이다. 하지만 연구소의 안전은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문득 무정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서있었던 무정은 그의 자리로 가더니 단말기를 조 작해서 소장실을 불렀다. 즉시 소장의 얼굴이 나타났다. "뭔가?" 소장이 돌아보며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장은 한쪽 벽의 대형 모니터를 통해 전투 상황을 지켜보 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연구원들은 어떻습니까? 모두 대피했겠죠?" 무정이 다급하게 물었다. 소장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대피시킬 필요가 없네. 저들은 여기까지 오지 못해."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도 지금은 전투상황입니다." 무정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소장도 따라서 날카롭게 말했다. "지금 연구원들을 불안하게 하면 안 돼. 난 억지로 작업을 진행시키는 게 아니라 그들을 안심시키려는 것이네." "그렇다면 거긴 공습경보도 발령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 상황에서." 무정은 목소리를 높이고는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그 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봐, 대위! 적은 아직 여기까지 오지 않았어. 그리고 자 네는 그곳 일만 신경 쓰면 되네." 소장의 말은 강압적이었다. "그래도 연구원들은 안전한 곳으로...." "그들에겐 연구실이 제일 안전해!" 소장이 무정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들에게 불안을 조성하면 건강을 해친단 말일세!" 건강? 빌어먹을 건강! "하지만 연구실은 건물 외측 아닙니까? 만약 적의 공격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소리 말게! 적은 여기까지 못 와!" 두 사람의 말이 엉키고 있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목 소리를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건강이 목숨보다 중요합니까? 그러다가 그 여자들이 죽거 나 다치기라도 하면." "절대로! 그들을 불안하게 하면 안 돼! 그리고 말했지만 적은 여기까지 못 와!" 갑자기 소장이 대형 모니터 쪽을 돌아보았다. 소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무정도 중앙 스크린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화면이 바뀌어 있었다.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서 보내온 화면이었다. 아군 전투기들이 우주공간을 향해 쏟아져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 핑크 빛 빛살들이 날아갔다. 그에 장단을 맞추듯 녹색 빛살들이 날아왔다. "놈들이 도착했습니다!" 켈리 중사가 외쳤다. 곧 아군 함대 주변에서 독파이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화면 아래쪽에는 작은 화면 여덟 개가 나타나 있었다. 연 구소, 감시위성, 항모 드라켄, 함대 주변의 근거리 요격기, 적 함대를 향해 가는 공격기, 두 함대 사이에서 싸우는 장거 리 전투기 등에서 보내오는 화면이었다. 그 중 장거리 전투기의 삐예뜨로프 대령 화면에 수없이 쏟 아져오는 녹색 빛살들이 보였다. 그 빛살들은 비처럼 집중적 으로 쏟아져 내렸다. 갑자기 화면에 섬광이 번쩍거리며 하얗 게 타오르더니 이내 어두워지고 말았다. "당했어!" 록포드 중위가 외쳤다. 삐예뜨로프 대령이 당한 것이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서 보내오는 큰 화면에는 엄청난 난 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축함 한 척이 적 공격기들의 집 중포화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함선들은 적기들을 향해 대공 포화를 쏟아 붓고 있었다. 자칫하면 적기와 싸우던 아군 전 투기까지 당할 판이었다. "연구소 화면으로 돌려!" 무정이 외쳤다. 큰 화면이 바뀌면서 연구소 외부에서 촬영된 장면이 보였 다. 여러 척의 함선 주변에서 파리 떼들이 날아다니며 형형 색색의 빛살들이 사방으로 쏟아져나가고 있었다. 그 중 불빛 하나가 연구소 쪽을 향해 달려왔다. "적 전투기입니다!" 마이어 중위가 외쳤다. "제기랄!" 켈리 중사가 답변하듯 소리쳤다. 적의 전투기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 모습이 확대되어 화면 한쪽 구석에 나타났다. "블랙 스코피언이야!" 무정이 외쳤다. 블랙 스코피언은 그 형태가 전갈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동체 앞쪽에서 양옆으로 뻗어나온 두개의 추진 장치와 후미 위로 솟아오른 또 하나의 추진장치가 그러한 형 태를 만들고 있었다. 또한 각 추진장치 앞에는 연사포가 달 려있어 전갈의 공격방식과도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형태가 많이 다릅니다." 슈타이너 중사가 비교적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알기론 신 기종 같습니다. 3식까지의 어떤 기종과도 다릅니다. 아마 4식 정도인 것 같은데요." 슈타이너 중사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적의 전투기는 빠 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그 전투기에 핑크 빛살이 쏟아 지면서 그대로 불타오르고 말았다. "와!" 모두 함성을 질렀다. 화면에는 그쪽을 향해 달려가는 세 대의 아군 전투기가 보 였다. 한쪽 구석에 확대된 화면을 보니 영국 <스페이스 호 커>사 제의 맨티스 Mk-2 기종이었다. 앞으로 달려나가던 세 대의 맨티스 기들은 속도를 줄이면 서 선회하더니 다시 연구소 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연구소 주변을 영국 전투비행대가 지키나?" 무정이 빠르게 물었다. "한국 비행대도 있습니다. 4개 영국 편대와 2개의 한국 편 대가 지키고 있습니다." 록포드 중위가 대답했다. 한국 비행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안보기지에서 발진한 전투비행 대 중에 한국 편대도 있었다니. 무정은 이 급박한 상황에서 도 가슴 속에 반가움이 차 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어디 좀 볼까?" 무정이 말했다. 주 화면의 영상이 연구소 감시위성에서 전송된 것으로 바 뀌었다. 연구소 주변에는 최소한 20기가 넘는 전투기들이 인 공위성처럼 궤도를 따라 회전하고 있었다. 한국 전투비행대 소속 전투기 하나가 구석으로 확대되었 다. 천둥새 G형인 것 같았다. 동체 측면에는 우주연방군 마 크 옆에 한국 우주군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후우, 나도 저걸 몰아본 적이 있었지." 무정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다른 화면이 주 화면으로 옮겨졌다. 연구소 외부 카메라였다. 연구소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는 적 공격기 편대가 보였 다. 공격기는 전투기에 비해 기동성이 떨어지는 반면 함선이 나 대형구조물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무기가 탑재 되어 있었다. 모두 긴장하고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적 공격기들을 향해 핑크 빛살이 쏟아지며 아군기 2개 편 대가 달려나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적 공격기 한 대가 타올 랐다. 다음 순간, 적 공격기에서 발사된 녹색의 굵은 빛살 하나 가 연구소 쪽으로 날아왔다.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보 았다. 빛살이 화면 범위 밖으로 사라졌다. 컴퓨터가 관장하는 자동 화면 전환에 의해 위성 화면이 주 화면으로 옮겨갔다. 녹색 빛살이 연구소에서 가까운 거리를 비껴 지나 우주의 암흑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다시 주 화면에는 연구소 외부 카메라가 자리잡았다. 적 공격기가 아군 전투기를 피해 크게 선회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연구소를 향해 질주해 왔다. 아군 전투기 두 대가 그 공격기를 따라 쫓아왔다. 그 뒤쪽 에는 아군 전투기의 집중 포화를 받은 다른 적 공격기가 불 을 뿜으며 큰 호를 그리고 있었다. 연구소를 향해 다가오던 공격기에게도 핑크 빛살들이 쏟아 졌다. 그 빛살이 적기를 스치면서 기체 한 곳에 손상을 입혔 다. 그러나 적기는 비틀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또 다른 빛살이 적기의 엔진을 가격하면서 불길이 타올랐다. 적기는 발악을 하듯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이쪽을 향해 녹 색의 빛살을 쏘아댔다. 다음순간 적기는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야호!"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갑자기 건물이 흔들거렸다. 조명이 불안정하게 깜빡거렸 다. "뭐야?" 무정이 외쳤다. 순식간에 모든 조명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모든 모니 터가 꺼졌다가 지직거리며 다시 켜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록포드 중위가 악을 썼다. "당했습니다." 슈타이너 상사가 외쳤다. 중앙 스크린에는 위성화면이 나타나 있었다. 연구소 건물 외부에서 섬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저런!" 무정이 외쳤다. "어디가 당한 거지?" 마이어 중위가 외쳤다. "좌측면!" 록포드 중위의 목소리였다. 스크린에 연구소의 3차원 투시도가 나타났다. 피격을 당한 곳은 연구실 아래층이었다. "맙소사!" 무정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연구실 아래층이 당했다면.... 무정은 요원들 눈치를 살폈다. 모두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 다. 그러나 화면에는 연구실 구역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나 타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었기 때문에. 무정은 상황실을 가로질러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41. 같은 날 09:58. 숙소. 무정은 뛰어들다시피 하여 숙소에 들어섰다. 단말기를 켜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서 안보국 컴퓨터로 들어 갔다. "빨리, 빨리." 무정은 다급하게 내뱉었다. 소장실을 통해 연구소 컴퓨터로 연결된 회선을 선택한 뒤 연구소 컴퓨터를 불렀다. 곧 연구소 주 메뉴가 나타났다. 메뉴 위에 경고 메시지가 점멸하고 있었다. <비상! 연구실 화재> "이런!" 무정은 짧게 내뱉으며 CCTV 감시화면을 불렀다. 첫 번째 화면은 연기가 자욱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맙소사! 다시 그 화면 위에 경고 메시지가 점멸했다. <비상! 연구소 출입문 고장> 갑자기 화면이 사라졌다. 동시에 안보국 컴퓨터의 소장실 장치 구성도 화면으로 돌 아왔다. 맙소사! 연구실 컴퓨터가 나갔어! 무정은 단말기를 꺼버리고 뛰쳐나갔다. 42. 같은 날 10:02. 연구소 출입구. 무정은 헐떡거리며 연구소 출입문 앞에 도착했다. 문은 거대했다. 관리실 소속의 몇몇 직원들이 그 문을 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문은 워낙 견 고했기 때문에 기계장치 없이 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 옆에는 워킹 로더가 연기를 뿜으며 나자빠져 있었다. 아마 문을 열려다가 실패한 듯 싶었다. 로더가 들이받았었는지 문 에는 흠집이 나있었다. 그러나 찌그러진 흔적 하나 없었다. 오히려 워킹 로더만 부서져 버렸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무정이 고함을 질렀다. 직원들이 돌아보았다. 그 중에는 클린턴 하사도 있었다. "문이 안 열립니다, 대위님." 클린턴이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나?" 무정이 으르렁거리며 클린턴에게 다가섰다. "없습니다." 클린턴이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비상대책도 없나?" "없습니다. 워낙 완벽한 시스템이었기에 이런 일은...." "완벽 좋아하네." 무정이 클린턴의 멱살을 쥐어짰다. 클린턴은 목이 조이는 듯 캑캑거렸다. "이 안에 누가 있나?" 무정이 클린턴의 얼굴에 대고 내뱉었다. "모두 다 있습니다." 시퍼렇게 질린 클린턴이 대답했다. "빌어먹을 소장!" 무정은 악을 쓰며 클린턴을 밀어버렸다. 클린턴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짝에 부딪히고는 주저앉아 버렸다. 다른 직원 들도 사색이 되어 무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뭣들 해? 방법을 생각해 봐!" 무정은 다가가서 그들의 머리를 후려쳤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덜덜 떨며 말했다. "왜 없어! 빨리 해!" 무정은 그의 따귀를 때렸다. "도대체 열지 못하는 이유가 뭐야!" 무정은 계속 고함을 질러댔다. 다른 사람들은 겁이 나서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무정은 그 중 한 명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어붙였다. "너, 말해봐! 왜 못 여나?" 그는 벌벌 떨며 대답했다. "이 문은 5중 스테인레스 강판으로 되어있습니다. 두께가 10센티미터가 넘고 무게는 2톤이나 됩니다." 무정은 그 자의 멱살을 풀어주었다. 이제 그의 흥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마음 속에서는 더욱 안달이 났다. 무정은 문에 다가가 살펴보았다. 문은 위쪽으로 열리게 되 어있었다. 절대로 들어올릴 수 없는 상태였다. 또한 워킹 로 더를 동원시킨다 해도 문 밑으로 집게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미치겠군!" 무정은 한탄을 하며 주먹으로 문을 가격했다. 그러나 그의 주먹만 아플 뿐이었다. "소장, 개새끼!" 무정은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그 새끼가 이 속에 갇혔어야 했는데." 그는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못들은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무정은 차분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래, 이성을 되찾고, 어려운 얘기지만 이성을 찾고, 침착하게. 그러나 그다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무정은 다시 직원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여기 말고 다른 입구는?" "도킹 포트로 통하는 화물 출입구 뿐입니다." 한 직원이 대답했다. "화물 출입구?" "네, 하지만 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직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화물 출입구. 도킹 포트에서 연구실 입구로 통하는 길은 큰 화물들이 드 나드는 만큼 통로의 폭이 매우 넓었다. 전에 눈으로 그 폭을 가늠했을 때 3미터는 족히 되는 걸로 기억되고 있었다. 3미 터라..., 그렇다면.... 무정은 거세게 몸을 돌려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움 찔했다. 무정은 그들을 향해 한 마디 한 마디 씹으면서 말했 다. "모두 여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빨리 가서 소화장비와 유 독가스 중화탄을 가지고 화물 출입구 쪽으로 가라. 알았나?" 모두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그리고, 한 놈이라도 농땡이 치면 알아서 해!" 무정은 갑자기 고함을 쳤다. "자, 움직여! 빨리!" 모두 질겁을 하며 후닥닥 뛰어 달아났다. 무정은 도킹 포트를 향해 뛰어갔다. 43. 같은 날 10:07. 도킹 포트. 도킹 포트로 뛰어들어온 무정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먼저 기압복 착의실로 뛰어들어가 서둘러 기압복을 착용한 그는 1인용 초계정 격납고로 들어가 초계정에 올랐다. 공기 펌프를 작동시킨 그는 공기가 빠져나가는 동안 초계정의 엔 진을 점화하고 무선통신으로 상황실을 불렀다. "그라운드 제로! 여기는 샐리 원. 이상." 아무 응답도 없었다. 무정은 반복해서 불렀다. "그라운드 제로! 여기는 샐리 원. 이상!" 잠시 후 딸깍거리는 소리에 이어 켈리 중사의 날카로운 목 소리가 들렸다. "샐리 원.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거기 누군가? 이상." 그들은 눈 앞에 벌어진 전쟁에 정신이 없던 나머지 건물 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긴, 지 금 내부의 사건들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연구소 자 체의 존폐가 위협받고 있는 시기였다. "그라운드 제로. 나는 박 대위이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지금 연구소 구역에 화재가 발생했다. 빨리 구출하 지 않으면 모두 죽고 만다. 우선 외부 화물 출구와 샐리 원 의 출구를 개방하라. 이상."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대로 하 겠다. 이상." 켈리 중사의 목소리는 착잡한 상태였다. 지금 하는 짓은 평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비상 사태였 다. 무정은 이 연구소에서 안보에 관한 한은 소장 다음의 위 치였다. 소장 유고 시에는 무정이 모든 명령권을 가질 수 있 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도 소장의 명령이 우선이고 먼저 소장에게 보고 해야 했다. 그러나 켈리 중사도 불과 수십 분 전에 무정과 소장이 다투는 것을 보았었다. 연구실에서 발생하는 인명피 해에 대해서는 소장이 그 책임을 물어야 했다. 또한 켈리 중 사는 무정의 직속 부하였다. 지금 하려는 일에 대한 모든 책 임은 무정이 지는 것이었다. 우주공간으로 나가는 출구가 열리자 무정은 아래쪽의 가이 드 스키드가 출구 밖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이 샐리 원을 이륙시켜 출구를 빠져나갔다. 밖에서는 계속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 연구소에 접 근하는 적기는 없었다. 무정은 샐리 원을 몰아 앞으로 쭉 나 갔다가 셔틀선 용 화물출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멀리 연구소 구역의 외벽에 불길이 뻗쳐 나오는 것이 보였다. 불길들은 우주의 진공을 향해 날름거리다가 사라져갔다. 무정은 다시 회전하여 화물출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입구는 폐쇄 되어 있었다. 무정은 이물 악물고는 상황실을 불렀다. "그라운드 제로! 여기는 샐리 원. 이상!" "샐리 원.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켈리 중사가 대답했다. "왜 출입구를 안 열었나?" 무정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문을 열어줄 수가 없다. 이상." 켈리 중사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제기랄! 빨리 열어!" 무정은 악을 쓰고 있었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그럴 수가 없다 이상." "왜 안 되나? 이상!" "록포드 중위가...." 딸깍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록포드 중위의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규정상 그건 안 된다. 이상." "록포드 중위! 지금 비상 사태다. 이상!"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절대 열어 줄 수가 없다. 이상." "연구실 전원이 타죽도록 그냥 놔둘 건가?"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우린 그쪽 상황을 알 수 없다. 이 상." "내가 안다! 지금 연구실이 불타고 있다. 빨리 열어라, 이 상!"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그럴 수 없다. 이상!" "그럼 자네가 다 책임질 텐가?" 무정의 얼굴에는 핏발이 일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록포드 중위의 목소리는 초연했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아무튼 규정은 규정이다. 이상." "그럼 빨리 소장을 불러라. 이상!"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지금 소장에게 연결이 안 된다. 이상." 무정의 가슴이 덜컹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소장이 자리에 없는 것 같다. 이 상." "이런, 쌍! 빨리 열어! 지금은 내가 통수권자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그건 아직...." "록포드 중위. 열어 줘!" 스피커에서 마이어 중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규정은 지켜야 돼." 록포드 중위가 말했다. "지금 규정이 문젠가? 사람이 죽어 가는데." 마이어 중위가 말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아나? 여기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데." "그래도 대위님이 그렇지 않나?" "빨리 열어라! 모두 타죽어!" 무정이 다시 소리쳤다. "여기는 그라운...." "록포드. 사람이 다 죽는데 이러고 있을 거야?" 마이어 중위가 록포드 중위의말을 끊었다. 록포드 중위가 빠르게 설명했다. "이봐, 여긴 연구소야. 우린 여기서 아무것도 아냐. 우린 시킨 대로만 해야 돼. 안 그러면...." 다시 마이어 중위가 말을 가로챘다. "그래, 여긴 연구소야! 그런데 연구원이 다 죽으면 이게 무슨 필요가 있지?" 이제는 마이어 중위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자넨 아직 뭘 몰라. 난 지난 번에 연구실 문제에 개입했 다가...." 록포드 중위가 변명하다가 말이 끊어졌다. 순간 출입문이 약간 열리고 있었다. 무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야.... "무슨 짓이야, 마이어?" 그러나 록포드 중위의 외침과 함께 문은 다시 닫히고 말았 다. "뭐야? 뭣들 하는 거야?" 무정이 소리쳤다. 스피커에서는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아마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듯 싶었다. "아직 소장의 지시가 없었어!" 록포드 중위가 외쳤다. "그래도 일단 사람은 살려야 하잖아!" 마이어 중위였다. 두 사람은 계속 밀고 밀치는 듯 싶었다. "무슨 지랄들이야? 빨리 열어!" 무정이 절규에 가까운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계속 다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고 있었다. "샐리 원.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빨리 들어오라. 이상." 슈타이너 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슈타이너 중사, 고맙다." 무정이 감격해서 말했다. "중사! 뭐 하는 거야?" 록포드 중위가 소리쳤다. "중사, 빨리...." 이번엔 마이어 중위였다. 록포드 중위와 마이어 중위는 서로 붙잡고 힘을 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틈에 슈타이너 중사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모든 상황근무자가 상황실에 모여있지만 지금은 록포 드 중위가 당직사관이었다. 더욱이 당직사령인 무정은 자리 에 없었다. 따라서 무슨 일이 발생할 경우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록포드 중위였다. 결국 마이어 중위는 내란을 일으킨 셈이었다. 이제 문은 완전히 완전히 열렸다. 무정은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잘 들어올 수 있는가? 이상." 슈타이너 중사가 물었다. "그렇다. 지금 진입중이다. 이상." 무정이 대답했다. "제기랄! 자네가 다 책임져!" 록포드 중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물출구의 폭은 좁았다. 단지 셔틀선과의 연결용이었으므 로 화물이 통과할 수 있는 최소한의 크기로 만들어진 것이었 다. 무정은 바짝 긴장을 한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샐리 원을 몰 아 화물출입구를 통과했다. 이제 초계정은 셔틀선 대기실 위에 둥둥 떠있었다. 무정은 선수를 연구실행 통로 쪽으로 향하고 상황실을 불 렀다. "그라운드 제로. 여기는 샐리 원. 이제 화물출입구를 닫고 연구실행 통로를 개방하라. 이상."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알았다. 이상." 이번에는 켈리 중사가 대답했다. 뒤에서 문이 닫히고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공기가 들 어차고 있었다. 빠른 공기의 흐름에 초계정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초계정은 측면 분사를 통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이제 연구실행 문을 열겠다. 이 상." "여기는 샐리 원. 알았다. 이상." 문이 열렸다. 무정은 서서히 문을 향해 샐리 원을 몰았다. 문에 거의 가 까워질 무렵, 다시 연구소 건물이 흔들렸다. "여기는 샐리 원. 무슨 일인가? 이상." 잠시 후 딸깍 소리와 함께 켈리 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지금 한 곳이 더 피격 당했다. 이 상." 무정은 서서히 문을 통과하면서 물었다. "여기는 샐리 원. 어디가 당했나? 이상."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외부 산소탱크 하나가 당했다. 이 상." 중사가 대답했다. 이런! 무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샐리 원은 문 안으로 반쯤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또 적기가 공격해오고 있다. 빨리 움직여라. 이상." 켈리 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쪽에서 섬광이 일었다. 건물이 흔들거리면서 샐리 원의 동체가 문간에 긁혔다. 다 음 순간 무정은 샐리 원이 서서히 뒤로 끌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맙소사! 뭐지?" 무정은 후방 감시 카메라를 연결했다. 모니터 화면에 뚫린 외벽의 모습이 들어왔다. 도킹 포트가 당한 것이다. 그에 따라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샐리 원을 끌 어내려 하고 있었다. "이..., 쌍!" 무정은 욕을 내뱉으면서 초계정의 추진력을 높였다. 이미 샐리 원은 연구실행 문에서 거의 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엄 청난 기압의 폭풍이 샐리 원을 날려버리려는 것이었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빨리 들어오라. 이상!" 켈리 중사가 악을 썼다. 지금은 샐리 원이 문간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지만 만 약 완전히 빠져나가 버리면, 최악의 경우 켈리 중사가 문을 차단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샐리 원은 더 이상 어쩔 도리 없이 도킹 포트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끝내는 균형을 잃고 폭풍에 실려나가 외벽의 구멍에 충돌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무정의 머리에는 리뀔레 소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처참한 형상 위에 자신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것은 상 상도 하기 싫은 모습이었다. 무정은 샐리 원의 출력을 더욱 높였다. 자칫하면 앞으로 튀어나가 사고가 날 수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 안에서 나는 사고는 적어 도.... 리뀔레 소위보다는 나을 것이다. 샐리 원이 문간에 심하게 긁히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순 간, 저 앞에서 통로를 따라 뭔가가 떠내려오고 있었다. 사람 이었다. 클린턴 하사가 기압 폭풍에 휩쓸린 것이었다. "빨리 문을 닫아!" 무정이 외쳤다. 클린턴 하사는 샐리 원 앞으로 날아와 선수에 한 번 부딪 히고는 캐노피 옆을 미끄러지며 뒤로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저 앞에 또 누군가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정이 외쳤다. "이런! 빨리...." 갑자기 선체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무정의 몸은 심하게 뒤 로 밀렸다. 샐리 원은 벽면에 심하게 부딪히며 앞으로 날아 갔다. 겨우 정신을 차린 무정은 전진 출력을 낮추면서 역분사를 시켰다. 선체의 속도가 줄어들다가 갑자기 제자리에서 기우 뚱거렸다. 무정은 앞의 계기판에 몸을 부딪히고 말았다. 후방감시 화면을 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두 번째로 떠내 려가던 사람은 겨우 끌려나가는 것을 모면하고 통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아니었다. 무정은 샐리 원을 조심스레 몰면서 가능한 한 빠르게 통로 를 따라 연구실로 다가갔다. 44. 같은 날 10:21. 연구실 입구. 직원들이 기겁을 하며 돌아보았다. 연구소 건물 내에 초계정이 날아들어왔으니 무리도 아니었 다. 그들은 모두 개스 마스크를 머리 위로 매달고 있었다. 무정은 캐노피를 열고 외쳤다. "빨리 한 사람만 저 통로로 가서 다친 사람을 도와 줘!" "알았습니다!" 한 직원이 힘차게 대꾸하고 초계정 뒤쪽으로 달려갔다. "자, 너희들은 모두 비켜." 무정이 말하기 무섭게 직원들은 복도 모퉁이를 돌아 숨어 버렸다. 무정은 캐노피를 닫은 후 포의 출력을 조정했다. 곧 포의 출력이 원하는 준위로 맞춰졌다. 무정은 문을 조준한 뒤에 발사스위치를 눌렀다. 선수로부 터 핑크 빛 빔이 쏟아져 나갔다. 눈 앞에서 섬광이 일어났 다. 불덩이가 사방으로 튀었다. 무정은 포의 각도를 바꾸면 서 문의 이곳저곳을 향해 계속 쏘아댔다. 만약 문 뒤에 사람들이 있다면 문이 뚫리는 순간 쏟아져 들어가는 빔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알아서 그들이 비켜야 한다. 설마 문이 벌 겋게 달아오르는 것도 모르고 서있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었다. 무정은 잠시 사격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문의 일부는 구멍 이 뚫려 있었지만 아직은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었다. 통로 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무정은 빔을 얼마간 더 쏘아댄 뒤 캐노피를 열고 내렸다. 기압복 헬멧의 유리를 통해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자, 다들 나와!" 무정이 복도를 돌아보며 외쳤다. 직원들이 개스마스크를 쓴 채로 어기적거리며 걸어나왔다. "빨리 저 문을 때려부숴! 식기 전에." 몇 사람이 바닥에 뒹굴던 커다란 해머를 들어 문을 내리쳤 다. 쩍! 마치 커다란 수박이 쪼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문 이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나갔다. 그 파편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직원들은 소화기를 들어 벌겋게 달궈 진 문을 식혔다. 그 사이 무정은 헬멧을 잠그고 그들 틈을 지나 안으로 들 어섰다. 다른 직원들이 유독개스 중화탄을 들고 무정의 뒤를 따랐다. 안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직원들은 중화탄을 여기 저기 터뜨렸다. 직원 한 사람이 생체반응 감지기를 작동시키다가 외쳤다. "저쪽입니다!" 그가 가리키는 쪽은 어둠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정은 헬멧의 불을 켜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기압복 때문 에 매우 둔했지만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젖 먹던 힘, 아 니, 평소에 자신이 잘 쓰던 표현처럼 어머니 뱃속에서 양수 를 빨아들이던 힘까지 다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앞이 막혀있었다. 손전등을 든 직원들 이 뒤를 따라왔다. "어떻게 된 거야?" 무정이 물었다. "글쎄요, 바로 이곳인데." 그가 중얼거렸다. "그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나?" "네." 무정은 이곳저곳에 헤드라이트를 비춰보았다. 저쪽에 문 하나가 보였다. 탈의실 표시가 되어있는 문이었다. 무정은 그곳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은 매우 묵직했 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무정은 주변을 살펴보 았다. 한쪽 벽면 유리창 안쪽에 화재진압용 도끼가 들어있었 다. 무정은 유리문을 열고 도끼를 꺼냈다. "물러서." 옆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나서 무정은 도끼로 문짝 을 내리찍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저쪽에도 몇 명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체반응 감지기를 든 직원이 다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몇 사람이 가봐." 무정이 힐끗 돌아보며 지시했다. 무정은 다시 문짝을 내리찍었다. 문짝이 찢겨나가면서 안 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이 외치는 소리였다. 곧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무정은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은 맑았다. 또한 흐릿하긴 하지만 비상등도 켜있었 다. 수십 명의 연구원들이 그곳에 모여있었다. 몇 명을 제외 하고는 모두 여자였다. 마치 미인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여자들은 무정에게로 달려왔다. 무정은 헬멧을 벗고 외쳤다. "다친 사람 없습니까?" "여기 있어요." 누군가가 말했다. 무정은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도와 줘." 직원들이 여자들을 헤치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바야흐로 금남의 성역 여성 탈의실에 남자들이 뒤집고 다니는 판이었 다. 더욱이 돈 루카 연구소라는 엄격한 규정이 지배하는 곳 에서. 갑자기 한쪽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여자들이 뒤를 돌아 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들 틈을 헤치고 나왔다. 나미였다. 아미는 그들 틈을 달려와 무정에게 와락 안겼다. 무정도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기압복 때문에 아무런 감촉 도 느낄 수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소란에 두 사람은 떨어졌다. 모두가 두 사람을 향해서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모두 무사했군요?" 무정이 나미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여기는 탈의실에요. 살균소독을 위한 산소가 남아있었어 요." 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도 곧 다 떨어져가고 있었지만." 나미가 덧붙였다. 45. 같은 날 10:42. 상황실. 무정이 들어서자 모두들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록포드 중위는 살인죄라도 지은 듯한 표정이었다. 다 만 언제나 그랬듯이 슈타이너 중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 다. 무정은 그들을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보고 나서 안도의 한 숨을 내쉬고는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됐습니까?" 마이어 중위가 무정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다 잘 됐어." 무정은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별 큰 사고는 없었습니까?" 중위가 확인하듯이 물었다. "음, 적어도 죽은 사람은 없는 것 같네. 모두 수고했어." 기진맥진한 무정은 중위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다행이군요." 마이어 중위가 말했다. 록포드 중위는 한쪽 구석에 서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 다. 무정은 고개를 들어 록포드 중위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 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한숨을 쉬고 다시 무정을 바라보았다. 록포드 중위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대위님." "그만 됐어. 이제 우리는 저기 신경 써야 돼." 무정은 중앙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주 화면에는 연구소 카메라에 잡힌 근해의 교전상황이 보 이고 있었다. 전투는 뜸해져가고 있었다. "전투는 어떻게 되었나?" 무정이 록포드 중위에게 물었다. "거의...끝나가고 있습니다." 록포드 중위는 느릿느릿 말했다. "적의 함선들이 함포 사격권 안에까지 들어와서 함선간의 포격전이 있었습니다. 적 항모 시나노는 파괴되어 버렸고, 야마또는 비틀거리면서 선수를 돌리는 중입니다. 아군 공격 기들은 야마또의 숨통을 끊어 버리기 위해서 계속 공격중입 니다." "다행이군." 무정이 끄덕였다. "남은 적기들은 돌아갈 곳을 잃은 셈입니다." 켈리 중사가 끼여들었다. "그래. 이제 놈들은 우주의 미아가되거나 항복하겠지." 무정이 대꾸했다. "하지만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당했습니다." 마이어 중위가 말했다. "그래?" 무정이 눈을 치켜 떴다. "네, 화면을 보십시오." 마이어 중위는 대꾸를 하며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장면이 바뀌어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모습이 나타났다. 프 린스 오브 웨일즈 호는 불덩이와 연기를 우주 공간에 흩뿌리 며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선수가 기울어지면서 거대한 위성 티탄을 향해 서서히 침몰해 가는 그 장엄한 광경이 실내 분 위기를 어둡게 만들었다. "어떻게 된 건가?" 무정이 물었다. "야마또의 함포에 당했습니다." 마이어 중위가 무겁게 말했다. "게다가 갈 곳을 잃은 적기들 몇 대가 자살공격을 했습니 다." "음, 그랬군." 무정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한 마디로 가미가제로군. 쪽발이 새끼들!" 무정이 덧붙이고는 피로한 듯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제 복구작업이 시작되겠군요?" 마이어 중위가 물었다. "그렇지. 다시 모든 걸 원상대로 돌려놔야겠지." 무정이 대답했다. 46. 같은 날 11:31. 복도. 무정은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비상사태 이후 파괴된 건물 복구 등 뒤처리 문제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정은 소장실로 가고 있었다. 과연 소장이 어떻게 나올까? 무정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강압적이고 관료적인 태도 의 소장이 이번 일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신경을 거슬리고 있었다. 적 함대의 접근, 연구실 작 업의 속행, 무정의 반발, 소장의 압제, 연구소 구역의 화재, 연구실 입구 파괴, 금지구역 진입, 이 복잡한 일들에 대해 과연 소장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무정에게는 소장이 절대 자신의 잘못을 수긍하려 들지 않 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소장은 닳고 닳은 사기꾼이었 다. 소장은 궤변가이며 책략가였다. 절대 그는 연구실 문제 를 놓고 책임을 질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정의 잘못을 문책하고 나설 수도 있었다. 전투상황에서의 근무장소 이탈, 연구실 기밀 정탐, 주요시설 파괴, 금지구역 진입 등 모든 것이 만들어내기만 하면 죄목이 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 연구소의 기밀을 철저하게 강압적으로 유지해 온 것만을 봐 도 소장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책임을 벗어날 지는 불을 보 듯 뻔한 일이었다. 설사 군법 재판이 열린다 해도 무정이 이 기긴 힘들 것이다. 어차피 무정이 소장에게 불리한 발언을 하면 소장은 물론이거니와 연구소의 기밀에 대해 세계의 매 스컴이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니까. 만약 무정이 연구소의 비밀을 폭로하고 나선다면 그 이전에 정보국에서 제재를 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무정을 제거하려 들지도 모 르는 일이었다. 무정은 입을 굳게 다물고 통로를 걸어갔다. 앞에서 무라야마 중위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위님." 무라야마 중위가 걸어오면서 인사를 했다. 쪽발이 놈. 문득 아까쓰끼 테러단을 연상한 무정은 속으로 욕을 내뱉 으며 목례만으로 대꾸했다. 무라야마 중위는 바쁜 걸음으로 무정을 스쳐지나갔다. 47. 같은 날 11:32. 소장실. 무정은 소장실 문 앞에 섰다. 잠시 주저하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장이 눈을 들어 힐 끔 쳐다보았다. 무정은 경례를 하고 소장 책상 앞으로 가 섰다. 소장은 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거기 앉게." 잠시 뜸을 들인 후 소장이 말했다. 무정은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분명히 소장은 신경전을 벌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거의 무정이 예상한 대로였다. 과 연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무조건 소장에게 굴 복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오목조목 소장의 책임을 따지고 들며 강경하게 대응할 것인가? 그 어느 쪽도 옳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적당히, 줄다리기를 하듯 적당히 공격과 방어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았다. 때로는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때로는 늦춰주면서. 그리고 그 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소장 자신도 그런 식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면 서로간에 오가는 말과 말의 다툼 속에서 적당한 타협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소장을 이기려고 해봤자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또한 소장 자신도 절대적인 승리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자신도 잘못이 많이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그냥 무승부로 끝내면 되는 것이다. 소장을 이기려고 애쓸 필요조차도 없었다. 다행히 연구원들에게 큰 피해는 없었으 니까. 그가 이 연구소에 온 본연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니 까. 결국 이 싸움은 의례적인 몸짓에 불과했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서 아예 없었던 일로 무마해 버리면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는 쪽이 스스로에게 잘못 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그냥 형식적으로 떠벌 리는 일이 될 것이다. 말 그대로 그냥. "내가 자네를 왜 불렀는지는 알겠지?" 소장이 연신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무정은 잠시 생각한 끝에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대답 을 끄집어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이런 대답은 마치 자신 이 죄를 지은 사람처럼 느껴질 만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 다. 그렇다고 따지고 드는 말투도 옳지 않을 것이다. 왜 부 르셨죠? 이런 말투는 매우 도전적으로 들릴 것이 뻔했다. 첫 마디 하나가 대화 전체의 흐름을 좌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 다. 소장 자신도 그 첫 번째 질문의 선택에 크게 신경을 썼을 것이다. 소장도 무정을 힐책한다거나 반대로 칭찬하려면 다 른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자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또는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 수고가 많았 네. 하지만 소장은 매우 모호한, 무정 스스로가 내부에서 판 단해서 스스로에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했고 무정도 모호 한 말로 답했다. 이 하나만으로 모든 대화는 결정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전투가 끝난 직후부터 무정이 머리 속에서 계속 준비해온 논쟁 시나리오가 필요 없어진 것 을 의미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이번 일에 대해서 더 할 말이 있나?" 소장이 계속 곁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무정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친다면 소장 이 느끼기에 무정이 스스로의 잘못을 시인했다고 착각할 소 지도 있었다. 따라서 무정은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덧붙였 다. "소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소장의 눈썹이 움찔했다. 소장은 굳게 다문 입술을 약간 비틀고 있었다. 역시 만만 찮은 녀석이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무정 은 짐작했다. 소장이 침이 끈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네." 잠시 침묵이 그들 주변을 감돌았다. 그 침묵 속에는 보이 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암투였다. "아무튼 별 문제 없이 일이 끝났으니 다 지나간 일로 생각 하는 게 좋겠다고 나는 생각하네." 소장은 훨씬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무정의 얼굴을 바라보다 가 덧붙였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무정도 소장의 변화에 맞춰 경직된 표정을 완화시키려 애 쓰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좋아." 소장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그럼 내 얘기는 끝났네. 더 할 말은 없나?" "없습니다." 소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그럼 가보도록 하게. 빨리 복구를 서둘러야지." "알았습니다." 무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한 후 문을 향해 돌아섰 다. "잠깐." 무정이 몇 걸음 옮겼을 때 소장이 불렀다. 소장 특유의 뜸 들이기 방식의 연장이었다. 그럼으로써 사람을 감동시켜 보 려는 잘 짜여진 그의 연극. 소장의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소장이 거드름을 피우며 한 마디 던졌다. "아무튼 수고 많았네." 무정은 눈짓으로 답하고 소장실을 나섰다. 48. 같은 날 12:05. 식당. 무정은 배식을 받기 위해 줄에 끼어있었다. 많은 여성 연구원들이 오가며 무정을 쳐다보았다. 그 중에 는 자기들끼리 손짓을 하며 웃음 짓는 여자들도 있었고, 심 지어는 다가와서 인사를 하는 여자까지 있었다. 흠, 이거 괜찮은데? 무정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배식을 받아서 나미가 앉은 쪽으로 걸어가는 도중에도 마 주치는 연구원들이 인사를 하거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아 가서 크게 환영하는 제스처를 보이는 연구원도 있었다. 무정은 그들에게 일일이 고갯짓으로 인사하며 나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인기가 좋군요?" 나미가 웃으면서 말했다. 무정은 그저 싱글거리며 나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어때요? 몸은 괜찮아요?" 무정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예." 나미가 대답했다. "다른 연구원들은요?" "잘 모르겠어요. 80명이 넘는 사람들을 다 진단하려면 시 간이 걸릴 거에요." "나미 씨는요?" 무정이 스테이크를 썰며 물었다. "저는 끝났어요. 우선 다친 사람 몇 명과 심리적인 후유증 을 보이는 사람들부터 진단했지만 크게 문제가 있는 사람들 은 없었던 거 같아요." "다행이군요." 무정은 말을 끝내고 식사를 시작했다. 도중에 슬쩍 나미를 바라보니 나미는 시종 미소를 지으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 고 있었다. "그때는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나미가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자르며 말했다. "으흠?" 무정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눈짓으로 물었다. "무정 씨가 탈의실 문을 부수며 들어올 때 말에요." 나미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문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려 모두 긴장하고 있었 어요.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죠. 불길이 문을 가열해 서 문짝이 갈라져나가는 줄 알고요." 무정도 나미가 종알거리는 소리를 즐거운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런데 웬 걸, 도끼가 마구 문을 부수더니 기압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서는 거지 뭐에요?" 나미는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무정도 따라서 웃었다. "그때는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 같더군요. 모두 그렇게 생 각했을 거에요." "티탄에 살고 있는 천사라..., 그거 괜찮군요." 무정이 거들었다. "그래요, 천사. 그리고 무정 씨는 온통 영웅이 되어버렸 죠. 연구원들 전체가 무정 씨를..., 음, 뭐랄까? 존경? 아니 면 사모한다 고나 할까요?" "하하하, 사모요?" 무정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후후, 그렇다 고나 할까요?" "음, 걱정이군요. 그 많은 여자들에게서 사모를 받다니." "하지만 딴 데 눈독 들이지 말아요." 나미가 살짝 눈을 흘겼다. 그게 무슨 뜻이지? 무정은 입 밖까지 튀어나오려던 질문을 겨우 눌러 참았다. 딴 데 눈독 들이지 말라. 그 말은 연구소 규정을 생각해서 행동에 주의하라는 뜻일까, 아니면 자기 외의 딴 여자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일까? 무정은 말을 돌리는 척 하면서 나미의 심중을 떠보았다. "아무튼 나도 그때는 감동적이었죠." "그래요?" 나미가 눈을 크게 떴다. "네." "하긴 그럴 거에요. 많은 사람들을 구해냈다는 그 보람, 그리고 사명감." "그런 거 말고요." "그럼요?" 무정은 짓궂게 웃었다. "나미 씨가 저에게 뛰어와서 안길 때, 그때는 정말...." 나미가 새침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나 무정은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덩달아 나미 씨도 인기인이 되었죠?" 나미는 아무말도 않고 눈만 흘기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사실도 공개석상 에서알려졌고." "정말 그러실 거에요?" 끝내 나미가 한 마디 하고 나섰다. "하하, 농담입니다." 무정은 두 손을 내저었다. 나미는 무정을 흘겨보는 듯 미소를 지었다. 무정은 그 틈 을 놓치지 않고 공격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것만은 농담이 아닌 걸요?" 다시 나미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정도 그녀의 눈길을 피하 지 않고 마주보고 있었다. 49. 9월 2일. 복도. 건물 내부는 붐비고 있었다. 상황실에서 나온 무정은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낯선 얼굴들도 많이 보였다. 바야흐로 연 구소 복구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연구실 화물 출입문에 이르자 시설부 직원 한 사람이 샐리 원에 올라 서서히 뒤로 후진하고 있었다. 샐리 원은 벽에 긁 히고 열에 그을려 엉망이 되어있었다. 무정이 나타나자 직원들이 일제히 경례를 했다. 전날 매우 엄격하게 다루었던 것에 대한 후유증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어제는 수고들이 많았네." 무정이 웃으면서 그들을 격려했다. 한 직원이 이마를 긁으며 웃었다. 50. 9월 5일. 건물 외곽. 수리정 한 척이 바로 앞쪽으로 지나갔다. 돈 루카 연구소 의 로고가 눈 앞에 크게 보이다가 사라져갔다. 무정은 탐색정인 베티 원에 타고 도킹 포트 밖에 멈춰 서 서 공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킹 포트의 벽 한 쪽에는 지름 2미터 정도 되는 구멍이 뚫려있었다. 검게 그을려 있는 구멍 주변에서 무정은 문득 리뀔레 소위의 구명정을 떠올렸다. 몇 척의 수리정들이 구멍 근처에 모여있었다. 그 중에는 위성 미란다의 안보국 기지에서 온 수리정도 보였다. 구멍의 안과 밖에는 우주유영 장치를 장착한 공병대원들이 떠다니며 작업에 열중하고있었다. 무정은 베티 원을 움직여 연구소 건물의 주변을 돌아보기 위해 천천히 외벽을 따라 나아갔다. 51. 9월 8일. 숙소. 무정은 모니터를 조작해서 연구소 시스템에 접근을 시도했 다. 화면에 주 메뉴가 떠올랐지만 그 위에 안내 메시지가 점 멸하고 있었다. <아직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무정은 다시 안보국 시스템으로 빠져 나왔다. 후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시스템은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미의 말 에 의하면 연구실 업무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모든 업무는 각 연구실에 있는 독자적 시스템만의 가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정은 당분간 연구소 시스템에 대한 접근을 삼가기로 했 다. 복구 후에는 전반적인 테스트가 있을 것이 뻔한 일인데 그때 시스템을 사용하다가 자칫하면 모든 것이 들통날 수도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52. 9월 13일. 상황실. 중앙 스크린에는 도킹 포트가 나타나 있었다. 그 커다란 구멍은 사라지고 없었다. 몇 척의 수리정과 우 주를 유영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제는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위님, 소장님 전화입니다." 슈타이너 중사가 말했다. "연결하게." 무정이 나른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네." 슈타이너 중사의 대답이 있기 무섭게 곧 스크린에는 소장 의 얼굴이 나타났다. "좋은 아침이군, 박 대위." "좋은 아침입니다, 소장님." 무정은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좋은 아침? 빌어먹을, 좋긴 뭐가 좋단 말인가. 연구소 꼴이 이렇게 되 어있는데. 더욱이 연구소 컴퓨터 시스템에 침투하지 못하고 있는 무정으로서는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며칠째 연구소의 기밀을 밝혀나가다가 그 실마리를 잡았다 생각할 무렵, 갑자 기 모든 일을 중단해 버리자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단 지 선유만 생각한다면 그다지 서둘지 않아도 되지만, 이제 그는 서서히 그 사랑을 나미에게 돌리고 있었다. 선유가 빠 져나가버린 그 자리의 공백을 나미로 메워가고 있는 중이었 다. 그런데 지금 나미는 선유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걷고 있 다. 이 연구소의 음산한 기운이 나미에게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아서 무정은 한시바삐 그 정체를 밝혀내고 싶었다. "자네 오늘 할 일이있네." 소장의 안경 너머로 사마귀 같은 눈빛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무정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순양함 미란다에 다녀오게." "예? 무슨 일로요?" 무정은 몸을 바짝 세웠다. "이번 아까쓰끼 사건 이후 연구소의 방공망을 강화시키기 로 했네. 그에 따라 대공포 시스템을 교체하기로 했는데, 현 재 가장 적절하다고 결정된 것은 미란다가 장비하고 있는 함 포라네." 빌어먹을 방공망! 무정은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불과 얼마 전에 죽은 리뀔 레 소위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이제는 잊고 싶었던 그 기억이. 그런데 또 방공망 이야기가 나오다니. 그런데, 가만! 미란다? 미란다라면 리뀔레 소위가 소속되어 있던 순양함이 아닌 가! 이것은 좋은 기회였다. 미란다에 가면 중요한 정보를 수 집할 가능성이 있었다. 리뀔레 소위도 이 연구소의 정체에 대해 극명한 정보를 얻게 되었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왔 던 것 아닌가. 무정은 기쁜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그 시스템에 대한 조사를 해오라는 것입니까?" "그렇지. 가서 기술적 측면, 효용성 등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해 보고, 시범 사격까지 지켜보고 오게." "알았습니다, 소장님. 언제 떠날까요?" "바로 지금 떠나게. 모든 조치는 다 취해놓았으니까." "네, 그럼 지금 떠나죠. 이동에 필요한 함정은 샐리 투를 이용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짧은 대답과 함께 소장의 얼굴이 사라지고 화면에는 다시 도킹 포트 공사 현장이 나타났다. 여전히 수리정들이 화면 속을 오가고 있었다. "이상하군요, 대위님?" 마이어 중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가 말인가?" "소장님이 왜 그런 지시를 모니터를통해 내렸는지 말입니 다. 방공망 시스템 교체 문제라면 매우 중대한 일이라서 다 른 때 같으면 대위님을 직접 소장실로 호출했을 텐데요." "글쎄,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무정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소장은 아까쓰끼의 침공 이후 무정과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소장 자신 의 잘못이 너무 많아서인지 무정과 단 둘이 만나는 것을 꺼 리고 있었다. 앞으로도 기밀을 요하는 일이 아니라면 부르지 않겠지. 무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상황실을 나섰다. 53. 토성 궤도. 거대한 토성을 배경으로 샐리 투가 날고 있었다. 토성은 연한 크림색 바탕에 오렌지 색의 줄무늬를 그린 공 처럼 매우 아름다웠다. 어찌 보면 덜 익은 거대한 수박처럼 보이기도 했다. 토성 주변을 둘러싼 넓은 고리는 하나의 장 관이었다. 그 위를 따라 미끄러져 가는 샐리 투는 빙판의 트 랙을 달리고 있는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였다. 무정은 눈 아래 펼쳐진 토성의 띠를 따라 달리면서 지구로 부터 13억 킬로미터나 떨어진 어두운 우주에서의 스케이팅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가까이 가서 보면 그 아름다운 테가 얼 음과 암석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금은 그런 사실을 염 두에 두고 싶지 않았다. 무정은 모처럼 골치 아픈 연구소에 서 벗어난 만큼 눈 앞에 보이는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왼쪽 위에는 위성 엔켈라두스가 그 하얀 얼굴을 내밀고 무 정의 배를 다소곳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꿈과 같은 멋 진 광경이었다. 54. 순양함 미란다. 샐리 투는 거대한 순양함의 좌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샐리 투. 여기는 스피카 제로. 이상." 무선 송수신기의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피카 제로. 여기는 샐리 투. 이상." 무정은 흥분되는 마음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 흥분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정도 소위 시절에 함선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지금 직접 함정을 몰고 거대 한 함선에 접근하자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이곳에서는 어떤 결정적인 실마리를 얻어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즐거운 추억과 달 갑지 않은 현실, 그 두 가지 사념이 그의 머릿속에서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으며 아옹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매 우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흥분은 흥분이었다. 함선 상황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기는 스피카 제로. 샐리 투는 3번 격납고로 진입하라. 이상." "여기는 샐리 투. 알았다. 3번 격납고로 진입하겠다. 이 상." "여기는 스피카 제로. 이제 통제를 격납고 요원에게 넘기 겠다. 송신완료. 끝." 딸깍 소리가 나면서 수신이 끝났다. 무정은 밝은 회색의 선체에 자주색으로 쓰여진 커다란 3자 를 향해 샐리 투를 몰고 갔다. 그 글자 아래 격납고 입구가 보였다. 무정은 그 입구를 향해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55. 순양함 미란다, 함정 격납고. 샐리 투는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기는 함선 내 격납고에 떠 서 자세제어를 위해 약간 흔들거리다가 가벼운 충격음과 함 께 바닥에 내려앉았다. 곧 격납고 외부 통로가 닫히고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잠시 후 조종실 계기판에 외부 공기 압력이 정상임을 알리 는 불이 들어왔다. 무정은 캐노피를 열고 몸을 일으켰다. 그 와 동시에 선내로 통하는 출입구의 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박 대위." 한 장교가 격납고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했다. 무정은 헬멧을 벗어놓고 초계정 밖으로 나와서 대꾸를 했 다. "예, 안녕하십니까?" 그 장교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하우어 대위입니다. 지크프리트 하우어. 미란다의 병참 장교이죠." "반갑습니다. 박무정 대위입니다." 무정은 손을 내밀어 하우어 대위와 악수했다. 하우어 대위는 날카로운 듯 하면서도 어딘가 철학적인 분 위기를 풍기는 금발의 사내였다. "자, 갑시다." 하우어 대위가 손짓으로 안내하며 앞장섰다. 무정은 하우 어 대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56. 순양함 미란다, 선내 통로. 하우어 대위는 격납고 구역을 빠져 나와 빠른 걸음으로 걸 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통로를 오가고 있었다. 무정은 오랜만에 북적거리는 환경을 접하고 있었다. 정말 이곳이야말로 살아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돈 루카 연구소 같 은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자신감 있는 얼굴에 생기를 띄고 오가는 사람들. 그 활력적인 모습들, 이 살맛 나는 분 위기! 때때로 군복을 입은 여성 근무자들의 모습도 있었다. 외모 로 따진다면 돈 루카의 연구원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훨 씬 밝은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하긴 돈 루카의 미인 80명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했지만. 57. 순양함 미란다, 브리핑 룸. 하우어 대위가 커다란 스크린 앞에 서있었다. 그는 이 함선의 방공 시스템에 대해서 개괄적인 설명을 하 고 있었다. 대공 방어체계, 대공포의 제원 및 성능 등에 대 해 그는 빠르게 짚어나갔다. 하우어 대위가 말했다. "그러므로 신 개념의 방공망 구축에 있어서는 이 시스템이 가장 적절한 것입니다." 무정의 옆에는 다른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한 사람은 포 술 장교 안드레이 투볼레프 중위, 또 한 사람은 포수 비외른 예테보르이 중사, 마지막 사람은 레이더 장교인 장-루이 베 리에 대위였다. 그들은 무정에게 각자의 전문분야에 대한 브 리핑도 할 겸, 관련된 타 병과에 대한 전문지식을 듣기 위해 함께 앉아있는 것이었다. 화면에는 하우어 대위의 설명에 따 라 자료 화면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대공포로서는 현재 가장 신형이라고 할 수 있는 FLAK-93을 장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3개월 전에 이 새로운 대공포로 교체했죠. FLAK-93은 독일 라인메탈 사에서 새로 개발한 75밀리미터 2련장 고속 우라늄 포로서 포 하나의 분 당 발사속도가 1200발에 이릅니다." "그거 대단하군요? 75밀리 짜리가 1200발씩이나." 무정은 약간 놀라는 듯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두 문이 한 조이므로 2400발이 되 는 것이죠.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 포가 세계 최고의 발사속 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우어 대위가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58. 순양함 미란다, 대공포탑. 원통형의 통로를 따라 바닥판만 있는 엘리베이터가 올라갔 다. 무정은 브리핑을 하던 네 사람과 함께 서있었다. 곧 엘 리베이터가 멈추자 포탑 내부가 눈 앞에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박 대위님." 중사 한 사람이 경례를 하며 맞이했다. "1번 대공포탑에 견학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 중사의 뒤로 몇 명의 포탑 요원들이 보였다. 무정은 엘 리베이터에서 내려서면서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다지 넓지는 않았지만 안에는 여러 대의 모니터와 계기들이 빽빽하게 들 어차 있었다. 투볼레프 중위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무섭게 포탑 안을 둘러보고는 한쪽 모니터 앞에 앉아 뭔가를 두드려댔다. "음, 모든 준비가 끝나있군요." 투볼레프 중위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이 포탑은 성능 면에서나 인체 공학적인 면에서 볼 때 가 장 완벽합니다." 중위는 손바닥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수동과 자동의 전환은 물론 기계식과 전자식의 전환이 완 벽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기 기에 이상이 생길지라도 전자식에서 기계식, 기계식에서 수 동식으로의 전환이 아무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야말로 방공능력은 물론 생존성에 대한 배려도 잘 된 시스 템이죠." 투볼레프 중위는 포술 장교라기보다는 병기 제작회사의 영 업사원처럼 보였다. 그의 유창한 말투에 네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질문 한 마디 없이 듣고만 있었다. 59. 순양함 미란다, 함교. "사격시범 준비가 끝났습니다." 메인 스크린에 나타난 투볼레프 중위가 말했다. 함교의 메인 스크린은 좌우로 길게 벌어진 파노라마 화면 으로, 그것을 여러 개로 분할해도 큰 화면을 볼 수 있는 것 이 장점이었다. 지금은 그 화면이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중 가운데 화면에 투볼레프 중위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 다. "좋아. 그럼 시작하라." 하우어 대위가 가볍게 끄덕인 후 지시했다. "네, 사격시범을 시작합니다." 투볼레프 중위가 복창하고 나서 돌아섰다. 그의 주변에는 1번 대공포탑 내부 장면이 비치고 있었다. 몇 명의 포탑 요 원들이 모니터를 지켜보며 사격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예테보르이 중사도 있었다. 포탑 요원들이 지 켜보고 있는 목표추적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것은 부분적으 로 확대된 위성 미란다의 모습이었다. 메인 스크린의 오른쪽 분할부분에는 1번 대공포탑에서 전 송된 목표추적 화면이 나타나 있었다. 무정은 고개를 돌려 그 화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위쪽으로 큰 호를 그리고 있는 미란다 뒤에서 매우 작은 빛의 점 하나가 떠올랐다. 주변의 별들이 정지되어 있는 것 으로 볼 때 그것은 인공적인 물체였다. "표적이 나타났다." 왼쪽 화면 속에서 투볼레프 중위가 말했다. "목표 추적장치 작동 개시." 투볼레프 중위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곧 목표추적 화면에는 붉은 십자선이 나타나 움직이는 표 적을 따라 중앙 좌표가 변해갔다. 화면 아래 쪽에는 <목표추 적>이라는 자막이 나타나 점멸하고 오른쪽 상단에는 수평/수 직 좌표가 표적의 움직임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표적까지의 거리는 약 3천 킬로미터였다. "목표 추적장치 작동 개시 완료." 예테보르이 중사는 제어반을 조작한 후 복창했다. "함포 발사준비." "함포 발사준비 완료." "잠금 해제." "잠금 해제 완료." 계속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지다가 투볼레프 중위의 목소리 가 높아졌다. 무정은 얼른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메인 스 크린의 왼쪽을 차지한 화면에는 함교 외부 카메라에서 촬영 된 1번 대공포탑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그 대공포탑 뒤로 칙칙한 미란다와 표적의 모습이 보였다. "발사!" "발사!" 예테보르이 중사의 복창과 함께 대공포탑에서 두 개의 핑 크 색 빛줄기가 뻗어나갔다. 빔은 미란다 위에 떠있는 표적 을 향해 날아갔다. 무정은 얼른 눈을 목표추적 화면으로 옮 겨갔다. 곧 섬광이 번쩍거렸다. 잠시 후 섬광의 잔영이 사라 지자 표적은 사라져 있었다. "좋았어!" 하우어 대위가 낮은 소리로 외치며 천천히 박수를 쳤다. 무정도 따라서 박수를 보냈다. 하우어 대위가 무정을 돌아보았다. "자, 이것은 단지궤도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표적을 잡 은 것에 불과합니다. 대포로 코끼리를 맞추는 것처럼 쉬운 일이죠." 무정이 눈짓으로 답했다. 하우어 대위는 계속했다. "문제는 파리 떼입니다.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귀찮은 표적들." 대위는 다시 스크린을 향했다. "중위, 다음 시범을 시작하게." "네." 이번에는 갑판을 비추고 있던 왼쪽 화면의 경치가 멀어지 면서 함선의 갑판 주변이 넓게 나타났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훈련용 표적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함 교 가까이 다가오다가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연한 오렌지 색 을 띄고 있는 금속구였다. 화면 구석에 그 표적에 대한 정보 가 나타났다. 그 크기는 약 60센티미터 정도에 전체 개수는 열 개였다. 표적들이 불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표적 확 인 좌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마구 움직이고 있었 다. "비조준 사격 준비." 투볼레프 중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정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오직 갑판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조준 사격 준비 완료." 예테보르이 중사가 복창했다. 곧 표적추적 화면에서 십자 선이 사라졌다. "연사 상태 전환." "연사 상태 전환 완료." "잠금 해제." "잠금 해제 완료." "발사!" "발사!" 화면에 작게 나타난 포탑이 마구 회전하면서 빛줄기가 이 리저리 뻗어나갔다. 표적들은 빔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빠 르게 움직였다. 그 중 하나가 빔 근처를 지나가자 섬광이 일어났다. 곧 표 적의 개수 표시는 아홉으로 줄어 있었다. "근접 자동폭발 장치군요." 무정이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하우어 대위는 돌아보지 않 은 채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여기저기 섬광이 일어나면서 표적의 수가 계속 줄어들었 다. 59. 식당. 무정은 네 명의 시범 담당자들을 따라 식당에 들어섰다. 식당 내부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홀에는 약 5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식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함선의 식당은 구획 에 따라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홀에는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앉아 식사 중이었다. 그들 다섯 사람은 배식을 받아 사람들이 없는 구석에 가서 앉았다. 식사 도중 하우어 대위가 말을 꺼냈다. "어떻습니까? 시범을 본 소감이." 무정은 냅킨으로 입을 닦고 나서 대답했다. "대단하더군요. 75밀리미터 포가 그렇게 연사를 해대다 니." "하하, 그래서 미란다에 그것을 설치한 것 아닙니까. 쥐새 끼들이 다가오면 그대로 팍, 팍!" 하우어 대위는 자랑스러웠던지 주먹을 쥐고 크게 제스처를 써가며 말했다. 무정은 하우어 대위의 들뜬 기분이 가라앉기 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제 본론에 들어갈 차례였다. 무정이 알고자 하는 것, 단지 화력시범 관람이 아 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온 자신의 의도대로. "그런데 그 대단한 무기체계에도 불구하고...," 무정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뒤를 이었다. "이번 전투에 미란다는 참가하지 않았더군요?" 하우어 대위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잠시 후 말했다. "우리는 안보기지를 지켰죠. 아마 내 생각에는...." 하우어 대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무정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우어 대위는 다시 뒤를 이었다. "아마, 리뀔레 소위 사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과 같군요." 무정은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우리 연구소도 베랑송 연구원 때문에 꽤나 시끄러웠죠." "두 사람은 약혼자 사이였다던 데요?" 예테보르이 중사가 끼여들었다. "그렇지. 베랑송 양이 연구소 근무가 끝나는 대로 결혼할 예정이었지." 하우어 대위가 대꾸했다. 그것은 무정으로서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한 솥 밥을 먹 고 지내는 사이에도 전혀 보안과는 관계없는 그런 사실들조 차 알 수 없는 돈 루카의 기밀 체계는 정말 신물이 날 지경 이었다. "그렇다면...." 무정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넌지시 운을 띄웠다. "그렇죠. 돌아오는 11월이죠. 베랑송 연구원은 근무기간이 끝나는 대로 우리 함선에 와서 결혼식을 올린 후 목성의 위 성 에우로파로 신혼여행을 갈 예정이었죠. 아무래도 그곳은 여기보다 개발이 잘 되어있으니까요." "음." 무정은 무거운 신음소리를 흘렸다. "정말 안 된 일이죠. 리뀔레 소위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 데." 투볼레프 중위가 나섰다. "그렇다면 갑자기 여자에 미쳐서 그렇게 된 건가요?" 무정의 눈이 빛났다. "절대로, 그건 아니죠." 베리에 대위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무정은 그 단어에 주목했다. 베리에 대위는 그 단어에 힘 을 주고 있었다. 문득 연구소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 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구원들과 가까이 지내진 말게, 절대 로!> "그렇다면 왜...?" "박 대위 앞에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베리에 대위는 말을 꺼내다가 멈추고는 하우어 대위를 돌 아보았다. 하우어 대위는 눈을 내리깔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 다. 베리에 대위가 뒤를 이었다. "사실 돈 루카 연구소는 평판이 안 좋은 곳이죠." 무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만." 무정은 나 자신도 그렇다고 말하려다가 만일을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을 들먹였다. "알고 계시는군요. 그곳은 매너가 엉망인 곳입니다. 몇 달 전에도 제가 레이더 문제로 방문한 적이 있지만 감시가 너무 심하더군요." "맞아요. 정말 짜증나는 곳이죠. 마치 우리를 첩자 보듯이 하죠." 하우어 대위가 거들었다. 무정은 여기서 중용을 지켜야 했다. 무조건 그들과 장단을 맞춰서 연구소를 비방하고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을 묵인, 또 는 동조는 아닐지언정 약간의 수긍이라도 해야 했다. "예, 그런 말이 많이 들리죠." 무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인했다. "나는 그때, 그러니까 리뀔레 소위가 죽었을 때 말인데, 분통이 터져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베리에 대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전혀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탈영한 사람을 꼭 그렇 게 죽여야 했는지. 그리고 사실은 그가 탈영한 원인도 그 연 구소에 있는데 말입니다." 잠깐, 아주 잠깐 아무도 모르게 무정의 눈이 번쩍거렸다. 탈영의 원인이 연구소에 있다? "리뀔레 소위는 베리에 대위의 고향 후배인 셈이죠." 하우어 대위가 베리에 대위의 팔을 툭툭 두드리며 위로하 는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루르 지방이라고 했던가?" 하우어 대위는 베리에 대위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그렇지. 루르. 내가 태어난 곳." 베리에 대위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 지구의 한 구석에서 대망을 품고 이 머나먼 토성까지 와서 그런 개죽음을 당할 줄이야." "정말 돈 루카에는 문제가 많아.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엄 청난 비리가 숨겨져 있어." 하우어 대위가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들먹일 수는 없죠. 지구 연방 직속 으로 되어있으니까요." 투볼레프 중위가 한마디 거들었다. "난 어느 정도 알고 있어. 그곳에서는 여성 연구원들을 대 상으로 어떤 비리를 행하고 있다던데." 베리에 대위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무정은 자신의 짐작이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고 있다는 것 을 느꼈다. 소장이 그토록 쉬쉬했지만 그 진상이 이미 어느 정도는 알려져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양성적으로 드러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투볼레프 중위 말처럼. "확실하진 않아." 하우어 대위가 말했다. "어느 정도 떠도는 이야기는 있지만." 베리에 대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리뀔레 소위와 대화해 본 적이 있어. 소위는 그의 애인이 근무하고 있는 연구소가 온통 비밀에 싸여있는 것을 알고 사방으로 정보를 수집하러 다녔지. 그가 알아낸 것 중 엄청난 사실이 하나 있어." "그게 뭐지?" 하우어 대위가 물었다. "돈 루카에는 생산시설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지." 베리에 대위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꽝! 뭔가 강력한 것이 무정의 머리를 때려왔다. 갑자기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생산시설. 무정은 처음연구소에서 브리핑을 받을 때 스크린에 나타 난 장면을 생각했다. 자동창고 시스템처럼 보이던 그것. 그 리고 창고 구조물의 각 셀마다 들어있던 캡슐 비슷한 물건. 그 다음 떠오른 영상은 엘렉트라 호의 도킹 포트에 연구소에 서 온 셔틀선이 도착했을 때의 장면이었다. 20명의 미녀가 내리고 화물통로 쪽에서는 연구원들의 짐 뒤쪽에 돈 루카의 로고가 새겨진 화물들이 내려지고 있었다. 생산시설. 역시 단순한 연구소가 아닌 생산시설이었단 말인가? 도대 체 그곳에서 무엇을 생산하고 있단 말인가? 그 캡슐의 정체 는 뭐지? "그 증거물이라도 있나?" 하우어 대위가 물었다. "물론이지. 3개월마다 여성 연구원들이 지구로 귀환할 때, 거기에는 정체 불명의 화물이 따르게 되지. 그 여성 연구원 들과 함께 말야." 모두 묵묵히 베리에 대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단서만으로도 추측할 수 있지. 지구로 귀환하는 여객선이 목성 궤도를 통과할 무렵에는 1개 함대가 그 여객선을 호위하지 않나. 지구에서 올 때는 없던 호위함 대가 왜 귀환할 때만 붙겠나? 연구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고? 그건 말도 안 되지. 돈 루카가 언제 그토록 연구원들 개 개인 신상에 신경을 써줬나? 아니면 귀향 퍼레이드라도 하 나? 그 잘난 연구소에 있었다고? 천만에. 단지 그들은 연구 소의 목적에 연구원들을 필요로 할 뿐이지. 지구로 귀환하고 있는 연구원들은 이제 연구소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 연구소 를 떠나는 순간부터 그걸로 땡이란 말야. 그렇게 본다면 오 히려 연구원들이 귀환할 때보다 처음 연구소로 갈 때 보호를 해야겠지." 베리에 대위는 빠른 말투로 쉬지 않고 얘기했다. 그의 말 이 끝나자 더 이상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냥 찜찜한 분위기 속에 포크와 나이프를 딸깍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60. 샐리 투는 다시 트랙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광막한 암흑을 뒤로 한 채 연구소를 향해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커다란 고리에 둘러싸인 토성은 여전히 덜 익은 수박과 같은 빛을 우주공간에 뿌려대고 있고 주변의 위성들 은 저마다의 갈 길을 부지런히 가고 있었다. 무정은 머리 속에서 그 동안 알아낸 정보들을 종합해 보았 다. 리뀔레 소위, 베랑송 연구원, 연구소, 연구원 관리 화 면, 개인별신체 기록, 돈루카, 지구행 화물, 생산 시스템, 정체 불명의 캡슐. 캡슐.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리뀔레 소위와 베랑송. 선유와 무정 자신. 죽은 자와 산 자. 애인 관계. 선유. 악마의 씨. 악마의 씨, 선유가 부르짖었다는 그 말. 악마의 씨. 그것 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씨. 자식. 임신. 자궁. 자궁! 그렇다면 연구소에서는 여성 연구원들에게 뭔가를 임신시 키고 있단 말인가? 여성들에게 임신을? 아냐, 이건 너무 큰 비약이야!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아니지, 이건 비약이 아닐지도 몰라. 너무 단서가 많아. 임신. 하지만 임신이라면, 여자들을 임신시켰다면 왜 여자 자신 들이 그걸 모르는 거지? 그건 말도 안 돼. 임신을 했다면 이 미 월경이 멈추고 몇 달 후면 배가 불러올 텐데 왜 그걸 모 르지? 그런 기미는 전혀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만약에, 만 약에.... 만약에 임신을 시킨다 해도 누구의 씨를 어떻게 임신시키 는 거지? 인공 수정을 하나? 언제? 어떻게? 무정은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무정의 마음과는 관계없이 샐리 투는 계속 트랙을 따라 스 케이팅을 즐기고 있었다. 곧 토성의 둥근 지평선 뒤에서 티 탄이 떠오르고 있었다. 62. 9월 14일. 식당. 무정은 다른 날보다 조금 빠르게 식당에 도착했다. 홀 안을 둘러보니 아직 나미는 안에 없었다. 무정은 식당 입구에서 나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무정은 아침에 상황실에 출근하자 곧 모니터를 통해 소장 을 불렀었다. 어제 미란다에 다녀온 일을 보고하자 소장은 보고서를 작성해서 그 자료와 함께 오늘 중으로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전산망을 통해서였다. 특히 요즘 들어 소장 은 계속 무정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꺼리고 있었다. 무정은 오전 내내 상황실에 앉아서 보고서 문안을 구상하다가 일찌 감치 식당으로 온 것이었다. 나미를 만나기 위해서. 무정은 여자들이 재잘대는 소리를 듣고 그쪽을 돌아보았 다. 다른 연구원들과 함께 나미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미는 무정을 보고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나미 씨?" 무정이 웃으며 인사했다. "예, 안녕하세요? 그런데 웬 일로 이렇게 일찍...." 나미가 반가운 듯이 말했다. "아, 나미 씨를 보고 싶어서요." 무정이 능청을 떨었다. "짓궂긴." 나미는 무정을 흘겨보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나미와 동행하던 다른 연구원들도 무정을 보고 인사했다. 무정도 친절하게 예의를 표했다. "나미 씨와 함께 줄을 서보긴 처음이군요?" 배식 대열에 끼여들며 무정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나미가 맞장구쳤다. 배식을 받은 두 사람은 함께 언제나 앉던 쪽으로 걸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제 연구실은 다 복구 되었나요?" 식사를 하며 무정이 사무적으로 물었다. "글쎄요. 아직은 호스트 컴퓨터가 작동 안 돼요. 아무래도 네트웍이 많이 손상을 입은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테스트 중이죠. 덕분에 우리는 계속 수작업 해야하는 부분들도 있고 요." 나미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요즘 들어 나미는 연구소 사정을 조금씩 이야기하고 있었 다. 아까쓰끼 사건은 무정이 돈 루카의 비밀을 캐는 데 있어 서 서로 상반된 두 가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 하나는 당분간 연구실 컴퓨터를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 서 핵심적인 기밀을 캐내려면 컴퓨터 네트웍이 복구되길 기 다려야 했다. 다른 하나는 그 덕분에 주변에서 직접 접하는 정보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제 연구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정은 경계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방공망 시스템의 교체라 는 절호의 기회를 잡아 미란다에서 정보를 수집해 올 수 있 었다. 그러나 역시 핵심적인 정보는 컴퓨터를 통해 얻는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박 대위 아닙니까?" 누군가가 다가오며 말했다. 무정과 나미의 눈이 동시에 그쪽으로 돌아갔다. 연구소 직 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끔 식당에서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정 양도 함께 앉아있군요?" 그 남자는 나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나미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함께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 남자가 물었다. "예, 기꺼이." 무정이 대답했다. 그 남자는 식판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손을 내밀며 자기 소개를 했다. "아, 두 분은 저를 모르시겠지요. 저는 조지프 레널즈라고 합니다. 연구실 전산실장이죠." 순간 무정의 눈이 반짝였다. "아, 그렇습니까? 박무정 대위입니다." 무정은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를 했다. "참, 정 양도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전산실을 관리하 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잘 알고 있죠." 레널즈는자리에 앉으면서 나미를 향해 말했다. "그렇군요. 안녕하세요?" 나미는 형식적인 미소를 만들며 대꾸했다. "그리고 박 대위에 대해서는 지난번 화재 때문에 잘 알게 됐죠. 아마 연구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유명 인사이니까요." 레널즈가 약간은 관료주의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무정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덕분에 모두 무사했죠. 그리고 시설도 큰 피해를 면했고요." 시설. 무정은 조금 켕기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시 설들이 다 타버렸어야 했는데. 그때 그냥 두었다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인명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되었다면 선유의 죽음 에 얽힌 비밀은 영원히 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생각이 무정의 의식 속에서 충돌했다. 죄의식 비슷한 것도 느껴졌다. 만약 지금 연구실에 직원들이 없는 상태에서 불이 난다면? 그것을 꺼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선유를 생각한다면 연구실이 계속 운영되어야 한 다. 그래야 그 비밀을 캐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 우에는 여성 연구원들에게 행해지는 어떤 비리를 묵과해야 할 것이다. 다른 연구원들을 위한다면 당연히 그 시설들이 모두 타서 없어지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곳의 내막을 모 르는 연구원들은 그것을 바라지 않겠지만. 그녀들은 이 먼 곳까지 와서 빈 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안다면? 그때는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가 려 할 것이다. 아무튼 무정은 선유와 다른 연구원들과의 사이에서 방황해 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과연 나는 그 연구원들을 보호하자 고 여기까지 온 것인가? 그건 분명 아니었다. 무정이 온 목 적은 오로지 연구소에 얽힌 비밀을 캐기 위한 것이었다. 그 러나 꼭 그것이 선유를 위하는 길일까? 그건 단지 무정 자신 의 욕심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선유가 이 사실을 안다면 다 른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연구원들을 도우라고 할 것이다. "정말 박 대위 도움이 컸습니다." 레널즈가 말했다. "그래, 컴퓨터는 잘 가동되고 있습니까?" 무정은 레널즈를 유도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네. 컴퓨터는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요. 다만 네트웍이 좀 엉망이 되었죠. 지금 그걸 보수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빨리 정상가동 되어야 할텐데." "아, 그건 좀 시간이 걸리죠. 연구실 내의 수많은 회선들 을 교체해야 하니까요. 아마 열흘은 더 걸릴 겁니다." 열흘 씩이나? 무정은 지금까지 2주를 기다려왔다. 그런데 또 열흘이라 면, 거의 한 달을 아무런 대책 없이 기다리는 꼴이었다. "아, 이거 식사가 식어가는군요. 우선 드시면서 이야기 나 누시죠." 레널즈가 포크를 들며 말했다. 그들은 다시 식사를 계속했 다. 63. 14일. 상황실. 무정은 순양함 미란다에서 받아온 라인메탈 FLAK-93 대공 포에 대한 자료가 들어있는 메모리 칩을 칩 스캐너에 연결해 서 그 자료를 입력시켰다. 그리고 바로 성능시범 참관 결과 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써야 하는지가 망설여졌다. 오전 내내 구상은 했지만 특별히 이렇다 하게 정리가 된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미란다에서 베 리에 대위를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이 마음 속에 또아리를 틀 고 다른 생각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무정은 단말기 입출력 패널 위에 있는 뇌파 입력 포인트에 손을 얹고 머릿속에 대충 정리했던 생각들을 내보내기 시작 했다. 곧 모니터에는 글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소장님 앞. 먼저 FLAK-93 신형 대공포에 대한 자료부터 읽으신 뒤에 이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FLAK-93의 성능시범을 참관하면서 느낀 바는 그 신형 대공포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시스템보다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료에 들어있는 시범 화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FLAK-93 은 3천 킬로미터 밖에 있는 궤도위성을 정확하게 명중시킬 수 있으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적 전투기들에대해서도 매 우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무정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을 때 돌연 경 보음이 들려왔다. 무정은 중앙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는 한 사나이가 뛰어가는 뒷모습이 나타났다. 카메라 번호 CS-211. 연구실 아래층, 아까쓰끼의 공격기에 피격 당했던 화학약 품 처리실 구역이었다. 그 사나이의 모습이 멀어져 갈 무렵 다른 남자 하나가 뒤따라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곧 컴퓨 터의 자율 선택에 의해 자동적으로 카메라가 바뀌었다. CS-209. 뛰어오는 사나이의 앞모습이 보였다. 언뜻 보니 그 복장에서 해군 소속 기술요원임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무정이 내뱉었다. 이어 화면에는 뒤따라오는 사나이가 나타났다. "저런!" 무정이 짧은 숨을 내쉬었다. "어? 저건?" 록포드 중위가 소리쳤다. 슈타이너 중사가 달려오고 있었 다. 슈타이너 중사는 운동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내 그는 카메라 시계를 벗어나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정이 록포드 중위를 향해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슈타이너 중사가 왜 저기에 가있는지." "슈타이너 중사는 오늘 비번인데." 켈리 중사가 덧붙였다. "어디 화재라도 발생했나?" 무정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런 보고는 없었습니다." 록포드 중위가 빠른 말투로 대답했다. 장면이 다시 바뀌어 해군 기술요원이 도킹 포트를 향해 뛰 어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화면 오른쪽 구석에 작은 윈도우가 나타나며 그 요원의 얼굴과 신상기록이 나타났다. 성명 : 후루야마, 찰리 계급 : 중위 군번 : SS-9305441 소속 : 항모 드라켄 계측제어부 기록과 함께 나타난 후루야마 중위의 얼굴은 일본인 치고 는 비교적 잘 생긴 편이었다. 그러나 무정은 그 일본적인 눈 빛에서 그다지 달갑지 않은 감정을 느꼈다. "어디로 뛰어가는 거야?" 무정이 소리쳤다. "아무래도 사고가 발생한 거 아닐까요?" 켈리 중사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이상이 발생했다는 보고는 없는데?" 록포드 중위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연구소 구역이라면 우리가 모를 수도 있지." 무정이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 번 연구실의 화재가 생각났다. 나미는? 나미는 잘 있겠지? 무정은 혀끝으로 메마 른 윗입술을 핥았다. "빌어먹을 연구실!" 무정이 욕설을 내뱉었다. 지난 번에도 경험했듯이 그들은 연구실 구역에서 어떤 일 이 일어나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안보국이라는 존재의 입 지가 이곳에서는 전혀 무의미했다. 그럴 리는 없지만, 연구 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도 모를 지경이었다. 다시 장면이 바뀌면서 후루야마 중위는 도킹 포트의 외부 함정 격납고에 정박 중인 항모 드라켄 소속의 2인승 쾌속정 에 뛰어들었다. 캐노피가 닫히는 것이 보이더니 이어 화면에 후루야마 중위의 얼굴이 나타나며 무선 수신기 스피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라운드 제로. 여기는 디오네 식스. 급하다! 빨리 통로 를 개방하라! 이상."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무슨 일인가? 이상." "여기는 디오네 식스. 급한 일이 발생했다. 빨리 개방하 라. 이상!" "개방할까요?" 켈리 중사가 무정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정은 고개를 끄덕 이자 켈리 중사는 디오네 식스 격납고의 에어 펌프를 작동시 켰다. 화면이 둘로 갈라지면서 오른쪽에 슈타이너 중사가 샐리 투 격납고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슈타이너 중사는 격납 고 벽에 있는 제어반의 비상 벨을 눌렀다. 요란한 벨 소리가 상황실 내에 울려 퍼졌다. "여기는 디오네 식스. 빨리 개방하라. 이상!" 다시 후루야마 중위가 소리쳤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알았다. 곧 개방한다. 이상." 켈리 중사가 대답했다. 격납고 에어록의 공기가 다 빠져나갔는지 통로 차단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디오네 식스는 이미 공중에 떠올라 통로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슈타이너 중사가 샐리 투에 뛰어들고 잠깐 조작을 하는 모 습이 보이더니 곧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면에는 중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라운드 제로. 여기는 샐리 투. 이상."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이상." 록포드 중위가 대답했다. "여기는 샐리 투. 디오네 식스를 막아라. 이상!" "뭐?" 무정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록포드 중위를 쳐다보았 다. 중위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무슨 소리인가? 이상." 록포드 중위가 물었다. "여기는 샐리 투. 후루야마 중위는 스파이다. 이상." 슈타이너 중사가 빠르게 말했다. "스파이?" 무정은 낮게 외치며 후루야마 중위의 화면을 쳐다보았다. 이미 통로는 완전히 개방되어 디오네 식스가 빠져나가고 있 었다. "맙소사! 빨리 저걸 차단해!" 무정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켈리 중사의 몸이 급히 움직였 다. 다시 차단문이 서서히 내려갔다. 디오네 식스는 문에 눌 려 아래로 밀려내려 갔다. 순간 디오네 식스가 가속하며 튀 어나갔다. "이런!" 록포드 중위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샐리 투. 빨리 통로를 개방하라! 이상!" 슈타이너 중사도 초계정 내의 모니터로 그 장면을 보았는 지 급히 외쳤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통로를 개방한다. 이상." 록포드 중위가 대꾸하고 나서 무정을 돌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죠?" "빨리 순양함 아킬레스에 연락해. 켈리 중사는 소장에게 보고하고." "알았습니다." 록포드 중위는 짧게 대답한 뒤 외부 채널을 선택했다. 잠 시 후 중앙 스크린이 셋으로 갈라지면서 가운데 화면에 함선 상황실을 배경으로 한 동양인 얼굴이 나타났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화면 아래쪽에 <대위 유안, 챵 후>라는 자막이 나타났다. 중국인이었다. "지금 이곳에 침투했던 스파이가 달아나고 있습니다. 그는 항모 드라켄 소속 후루야마 중위로 지금 2인승 쾌속정을 타 고 달아나는 중입니다. 빨리 지원바랍니다." 무정은 빠른 말투로 설명했다. "후루야마 중위? 그럴 리가?" 유안 대위가 중국식 억양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급합니다! 우리 측에선 슈타이너 중사가 초계정으로 추격중이지만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정이 언성을 높였다. "알았습니다. 곧 추격대를 내보내겠습니다." 유안 대위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예, 가능하면 빨리." 무정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화면이 꺼졌다. 다시 스크린 은 두 개로 바뀌었다. 왼쪽에는 위성화면이 달아나는 후루야 마 중위의 초계정을 보여주고 있고 오른쪽은 샐리 투 전방 카메라가 잡은 장면이었다. 무정은 슈타이너 중사에게 사건의 경위를 물어보려다가 그 만두었다.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디오네 식스. 여기는 샐리 투. 빨리 포기하고 귀환하라. 이상." 슈타이너 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후루야마 중위 로부터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디오네 식스. 여기는 샐리 투. 빨리 포기하고 귀환하라. 이상!" 슈타이너 중사가 목소리를 높여 반복했다. 그것이 헛된 짓 임을 무정은 알고 있었다. "여기는 샐리 투. 만약 다섯을 셀 동안 선수를 돌리지 않 으면 발포하겠다. 이상." 디오네 식스는 연구소 방위 한계선을 벗어나고 있는 듯했 다. 슈타이너 중사의 말이 그것을 뒷받침 해주고 있었다. "다섯!" 슈타이너 중사가 숫자를 세었다. 엉뚱하게도 카운트다운이 었다. "넷!" 디오네 식스는 아무 대꾸도 없이 그냥 달아나고 있었다. "셋!" 위성화면에는 아킬레스에서 발진한 세 대의 뇌격기가 디오 네 식스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Y자 형 으로 생긴 동체가 묘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둘!" 갑자기 샐리 투를 향해 핑크 빛 빔들이 날아왔다. 샐리 투 는 빔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저런!" 무정이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후루야마 중위가 선수를 돌려 공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샐 리 투에서도 밝은 빛을 발하며 빔이 날아갔다. "죽으려고 환장했군?" 켈리 중위가 빈정거렸다. 하얀 물체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샐리 투 위 로 스쳐지나갔다. 샐리 투는 크게 선회하며 선수를 돌렸다. 저 앞에 디오네 식스가 다시 선회하는 모습이 보였다. 디오 네 식스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샐리 투 는 속도를 높여 디오네 식스에게 다가갔다. 다시 빔들이 디오네 식스를 향해 날아갔다. 디오네 식스는 샐리 투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배 경에는 거대한 공, 토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빔 하나가 디오네 식스의 동체를 스치고 지나갔다. 작은 불꽃이 일었지만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샐리 투는 계속 공 격을 퍼부으며 다가갔다. 갑자기 디오네 식스의 엔진 부근에 서 불꽃이 일더니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순식간에 그 속 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샐리 투는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속 도를 줄이며 다가갔다. 그때 샐리 투의 오른 쪽에서 하얀 물체 세 개가 디오네 식 스를 향해 달려나갔다. 아킬레스에서 발진한 뇌격기 편대였 다. "어? 공격할 기세인데요?" 켈리 중사가 외쳤다. "블러드 튜나! 여기는 샐리 투! 디오네 식스를 공격하지 마라. 이상!" 슈타이너 중사가 뇌격기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뇌격기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통신 채널도 열어놓지 않은 듯 했다. "여기는 샐리 투! 디오네 식스를 생포해야 한다. 이상!" 슈타이너 중사가 다시 소리질렀다. 뇌격기 한 대에서 검붉은 물체가 튀어나갔다. "어뢰야!" 록포드 중위가 소리쳤다. 어뢰는 디오네 식스를 향해 곧장 다가갔다. 디오네 식스는 비틀거리면서도 어뢰를 피하기 위해 급선회하고 있었다. 그 러나 어뢰는 먹이를 쫓는 표범처럼 디오네 식스를 따라갔다. 그 어뢰가 디오네 식스에 따라붙는 순간 옆쪽에서 다른 어뢰 하나가 달려들었다. 섬광이 번쩍였다. 모두입을 벌리고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 또 한 번의 섬광이 일어났다. 수 많은 불덩이들이 우주공간을 향해 불꽃처럼 퍼져나갔다. 인력이 없는 우주공간에서 불덩이들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는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64. 9월 15일. 상황실. 무정은 출근하기 무섭게 슈타이너 중사에게 어제 일에 대 해 물었다. 어제는 슈타이너 중사가 비번이었기 때문에 상황 이 종료된 후 소장실에 가서 보고만 하고 숙소로 돌아간 것 이었다. 무정은 그 사실에 대해 매우 궁금했었다. 후루야마 중위는 연구실 아래층에서 무슨 일인가를 꾸미다가 발각되었고 또한 생포할 수 있었음에도 죽음으로 끝장나고 말았다. 마치 리뀔 레 소위 경우처럼. 무정은 후루야마 중위가 뭔가 돈 루카의 핵심에 근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에 그렇게 무참하게 죽여버 린 것이리라. 무정은 몸을 떨었다. 아마 자신이 이런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면 같은 꼴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 었다. 설사 무정이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을 지라도 충분 히 그럴 수 있었다. 저 악랄한 소장과 돈 루카 시스템에서라 면. 어쩌면 임무를 부여해서 우주공간으로 내보낸 뒤에 스파이 누명을 씌워 죽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앞으로는 만약 소장 이 은밀히 불러서 어떤 임무를 부여하고 외부로 내보낸다면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 미란다에 갈 때만 해 도 소장은 모니터를 통해 지시를 했었다. 그런데 만약 소장 실로 불러들여 아무도 모르게 지시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것은 단두대로 걸어 올라가라는 말이나 마찬 가지인 것이다. 그러기에 무정은 앞으로 더욱 주의해야 한다 는 생각이 들었다. 무정이 물었다. "그래, 중사는 후루야마가 스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 렸나?" "제 육감입니다." 슈타이너 중사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육감? 어떤...?" 무정의 눈이 잠깐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가끔 모니터를 통해 보이는 후루야마 중위의 행동이 이상 한 것 같았습니다. 또한 식당에서 직접 마주쳤을 때 눈빛을 보니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무정이 고개를 저었다. "슈타이너 중사의 육감은 대단합니다." 마이어 중위가 끼여들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미 두 번이나 스파이를 잡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까지 합치면 세 번째죠." "음, 처음부터 예상은 했었나?" 무정은 마이어 중위의 말을 흘려버리다시피 하며 계속 질 문을 던졌다. "그런 셈이죠." 슈타이너 중사가 끄덕거렸다. "아까쓰끼 테러단이 있을 때부터 예측했던 일입니다. 흔히 들 큰 일을 치르고 난 후에는 주의가 해이해지기 마련이죠. 더욱이 이번에는 복구작업이라는 절호의 찬스를 통해서 훨씬 침투가 용이했죠. 복구반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을 쓰는 사람 들은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 많은 외부인들이 출입하는 혼란 스러운 상황에서는 특히 더 그렇겠죠." "음, 그렇겠군." 무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번 침공이 의도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의도적이라...?" "놈들은 연구소를 파괴하려고 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는 적의 공격기가 연구소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고 빔으로 공격한 점부터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것은 놈들이 이곳을 없애버리려 한 것이 아니라 연구자료를 빼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죠." "그렇다면 후루야마 중위가 아까쓰끼의 일원이란 말인가?" 무정은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죠. 우선 그는 일본인입니다. 어 쩌면 어렸을 적부터 놈들의 교리를 전수 받으며 자랐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계획적으로 군에 입대한 후 첩자로 활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슈타이너 중사는 무정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영혼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정의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무서운 친구. 자칫하면 무정 자신이 부하 에게 잡혀버릴 상황이었다. 이제 무정에게는 슈타이너 중사가 또 다른 존재가 되어 부 각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음에 안 드는 고집불통, 다음은 그의 진솔함 속에서 캐어낼 수 있는 각종 정보, 이제는 그것 이 아니었다. 슈타이너 중사는 복병이었다. 언제 어떤 방법 으로 무정의 계획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교수대를 들고 나타 날 지 모르는 상대였다. "음." 무정의 폐부에서 무거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긴 나도 일본인은 좋아하지 않네만 전혀 예측할 수 없 었네. 정말 자네는 대단한 사람일세." 무정은 자신도 모르게 불필요한 사실을 들먹거리며 횡설수 설하고 있었다. 어느새 슈타이너 중사의 의혹에 덜미를 잡힐 까 두려워진 것이다. "물론 그렇시겠죠." 슈타이너 중사가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대한 연방공화국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몹 시도 싫어하더군요. 과거의 빚 때문에. 우리 독일인들도 마 찬가지죠. 150년 전에 있었던 전쟁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유 럽에서 눈총을 받고 있습니다." 중사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낮게 가라앉아 있었 다. 무정은 당황했다.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한 것이다. "아, 그건 미안하군. 그런 뜻으로 꺼낸 말이 아닌데." 무정은 다시 허둥지둥 둘러대야 했다. "너무염두에 두지 마십시오. 저도 대위님의 말에 감정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니니까요." "고맙네." 무정은 슈타이너 중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천천히 한숨을 내쉬면서 뒤를 이었다. "아무튼 수고했어. 자네 덕분에 우리 연구소의 안보가 다 시 한 번 지켜졌군." "감사합니다." 슈타이너 중사는 짧게 대답하고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무 정은 돌아앉아 모니터를 보면서 시름에 잠겼다. 골치 아픈 친구. 정말 주의해야 되겠어. 절대 행동에 티를 내지 말고. 무정은 본래 의도했던 질문을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그는 슈타이너 중사에게 보고를 받으면서 유도심문을 하려고 했었 다. 후루야마 중위가 침투한 사항이 무엇이었나? 그 질문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고자 했었다. 또는 슈타이너 중사가 그 와중에서 연구소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는지 슬쩍 떠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럴 수가 없었다. 65. 9월 하순. 돈 루카 연구소. 벌써 9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어 있었다. 그 동안 무정은 더 이상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나미나 레널즈를 만날 때마다 슬쩍 인사말처럼 컴퓨터의 정상가동에 대해 물어볼 뿐이었다. 이제 연구실 컴퓨터에 매달릴 일도 없는 무정은 다시 퇴근 후의 시간이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답답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마음 속에서는 빨리 그 기밀을 캐내라고 독촉하고 있는데 할 일이 없어서 무료하다니. 무정은 그 무료한 기간들을 주로 체육관에 가서 소일하고 있었다. 휴게실을 이용하려면 아직도 열흘 이상을 더 기다려 야 했다. 지겨운 8주. 어떤 때는 연구실 컴퓨터에 침투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느껴졌다. 소장실 회선은 멀쩡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 이었다. 그럴 때마다 무정은 겨우겨우 자제하고 있었다. 네 트웍 테스트 기간에 함부로 침투했다가는 금세 발각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슈타이너 중사에 대한 경계심이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슈타이너 중사가 두 번이나 첩자를 잡아냈다는 말은 처음 부임해 올 때부터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에 대해 신경 쓴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의 능력을 확인하고 보니 슈타이너 중사에 대한 관점이 바뀌 어있었다. 만약에 나미라는 여자와 개인적으로 친해지지 않았다면,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빠른 시일 내에 연구소의 정 체를 알아내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2년이라는 근무기간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 긴 세월을 여유 있게 기다리면서 서서히 흑막을 들춰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한 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선유에 대한 사명감 이외에 도 나미라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지루한 기다림과 불안감, 그런 생활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 미궁을 빠져나가는 듯이 지겨운 하루하루가 흘러 갔다. 66. 10월 2일. 소장실 앞 통로. 무정은 소장실에서 나와 바로 상황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꽤나 오랜만에 소장을 직접 만났다. 지난 번 리뀔레 소위 사건 때 연구실 컴퓨터 네트웍을 연결하기 위해 소장실 에 들어간 이후 한 달이 넘어 있었다. 이제 아까쓰끼 침공 때 피해를 입었던 곳들은 모두 복구가 완료되어 더 이상 외부인들이 들끓지 않았기 때문에 통로에 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었다. 상황실에 다 갈 때까지 무 정과 마주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무정은 지금 소장에게 한 가지 제의를 하고 오는 길이었 다. 앞일을 위하여, 그의 계획을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끝내 기 위하여 그는 새로운 카드를 제시하고 있었다. 소장 혹은 슈타이너 중사를 상대로 그는 새로운 거래를 시작한 것이다. 67. 상황실. 무정이 안으로 들어서니 마이어 중위와 슈타이너 중사는 모니터를 통해 관할구역들을 살피고 있었다. 무정은 슈타이 너 중사를 불렀다. 슈타이너 중사는 무슨 일인가 의아해 하 면서도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한 마음을 내면에 두고 의연하 게 행동하고 있었다. 무정은 입을 열었다. "기쁜 소식을 알려주겠네." 무정은 슈타이너 중사의 표정을 살폈다. 중사는 전혀 반응 을 보이지 않은 채 묵묵히 듣고 있었다. 무정은 뒤를 이었 다. "음, 이건 내가 소장님과 의논해 본 사항인데, 우리는 자 네를 상사로 승진시키기로 동의했네. 그것은 지금 당장 시행 하네." 슈타이너 중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담담한 피곤한 눈빛으로 무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생 각하는 듯 눈을 한 번 깜빡거린 것 이외에는 전혀 반응이 없 었다. 무정은 위아래로 눈을 움직여 슈타이너 중사의 반응을 살피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보 였다. 무정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진급이 별로 달갑지 않은가 보지?" "그렇습니다." 슈타이너 중사가 대뜸 대답했다. 무정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마이어 중위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분위기의 변화를 살피고 있었다. 무정은 잠 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알았네. 그럼 가서 자네 일을 보게." 슈타이너 중사는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자 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자네의 진급을 축하하네." 무정은 중사의 등을 향해 한 마디를 던졌다. 슈타이너 중 사는 힐끗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중사는 간단하게 대꾸하고 그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무정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슈타이너 중 사의 성격이 항상 차분하고 거의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군인으로서는 큰 경사라 할 수 있 는 진급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은 군인에게 있어 지위의 상승과 보다 나은 수입을 의미 하는 것임에도. 거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슈타이너 중사는 경제생활을 위해 군대를 선택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무정은 다시 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68. 10월 3일. 체육관. 코트 사이의 벽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저 멀리 있는 한 코트에서 경기를 하고 있는 사람 둘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코트가 비어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쪽 끝에 있는 코트의 의자에는 무정과 마이어 중위가 테니스 복 장을 한 채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빈 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럼 그가 군대에 몸을 담고 있는 이유는 뭔가?" 무정이 물었다. "제가 알기론," 마이어 중위가 고개를 한 번 저으며 대답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모험을 좋아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가 친구 몇 명과 함께 군에 지원을 하게 되었죠." 무정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런데 군의 체제는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것 같습니 다. 중사, 아니 상사가 원한 것은 관료주의나 계급제도가 아 닌 먼 우주를 향한 모험이었습니다." 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위는 계속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목성 궤도상에서 있었던 유니크라이스 트 테러단과의 전투에서 그의 친구들이 승선했던 전함 힌덴 부르크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힌덴부르크는 대폭발을 일으 켜 한 사람도 살아나지 못했죠. 또한 확실하지는 않지만 힌 덴부르크에는 슈타이너 상사의 연인이 타고 있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음." 무정은 긴 신음소리를 흘렸다. 마이어 중위가 계속해서 말했다. "상사 본인은 그 일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경력에 나타나 있죠. 그후 슈타이너 상사는 장기복무를 지원 했고 또한 새로 설립되는 이 연구소 근무를 자원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도 그는 직업 자체로서 군대에 남아있다기보다는 마음 속에 쌓여있는 앙금을 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에게는 계급, 명예 따위가 한낱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나뭇 잎 조각에 불과할 겁니다. 그는 일등 군인입니다. 그러나 그 의 투철한 군인정신은 전쟁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생존 을 위한 투쟁이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인 것입 니다." "그렇게 됐군." 무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자, 좀 쉬었으니 또 시작할까요?" 마이어 중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지." 무정은 라켓을 집으며 일어섰다. 69. 10월 4일. 휴게실. 조용한 음악이 실내를 감싸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여자였고 남녀가 함 께 어울려있는 모습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곳은 사람이 사는 곳 같다는 느낌이 피부로 느껴 지고 있었다. 몇몇 여자들이 무정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감회가 새 로운 듯 살피고 있었다. 그 중에는 여객선 아르테미스 호를 타고 올 때부터 낯이 익은 여자들도 있었다. 그 여자들도 오 늘 부로 전입 8주가 되어서 남녀 혼성 휴게실 출입이 허용되 고 있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박 대위님?" 누군가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한 여자가 그를 향해 웃고 있 었다. 그 여자는 금발에 녹색 눈을 한 미인이었다. 그러나 무정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네, 안녕하세요?" 무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아마 연구실 화재 때 무정을 알아본 연구원이리라. "어떻게 여길 다 오셨네요? 한 번도 안 보이시더니." 그녀가 생글생글 웃었다. "예, 오늘이 전입 온지 8주가 되는 날이거든요." 무정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이곳 생활이 얼마 안 되셨군요?" 그녀는 가볍게 놀라는 빛을 띄우며 손을 내밀었다. "저는 쏘냐 마랸스까에요. 폴란드 출신이죠." "아, 그렇습니까? 난 박무정입니다." 무정은 그녀와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다가 다시 거두었 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정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눈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마랸스까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CCTV 카메라가 실내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랸스까는 애교 있 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 우리...." 마랸스까는 말을 꺼내다가 멈추고 무정의 뒤쪽을 응시했 다. 무정은 무슨 일인가 싶어 뒤돌아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불필요한 몸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 여자 친구가 오는군요." 마랸스까가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무정은 눈만 슬쩍 돌렸 을 뿐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대화 즐거웠어요. 나중에 다시 봐요." 마랸스까는 조금 새침한 미소를 띄워 보이며 다른 사람들 이 모여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무정은 갑자기 멍해지는 기분 이 들었다. "박무정 대위님?"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와 무정은 돌아보았다. 나미가 의미 있는 웃음을 지으며 무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나미 씨. 드디어...!" "인기가 좋으시군요. 휴게실 출입 첫날부터 푸른 눈의 미 녀가 접근하고." "잠시 대화를 나눴죠. 어디 가서 앉을까요?" 무정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러죠." 나미는 입술을 삐뚤게 웃으면서 빈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 다. 무정은 그녀 뒤를 따라갔다. "이제 좀 사람 사는 곳에 온 것 같군요?" 자리에 앉자 무정이 대뜸 말했다. "그런가요? 여자들이 꽤 많죠?" 나미가 다른 테이블을 힐끗 둘러보며 대꾸했다. "벌써 두 달이 돼가고 있어요. 세월 참 빠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 엇갈리고 있었다. 나미는 은연중에 무정의 심리를 테스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돈 루카에는 여 자들은 많지만 남자들은 매우 적었다. 따라서 여자들은 본능 적으로 서로간에 경쟁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러 한 환경이 되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설사 자기와 관계가 없 는 이성일지라도 다른 사람과 친근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질투를 일으키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요, 벌써 두 달이에요." 나미가 무정의 말을 따라왔다. "이제 나미 씨도 일에 익숙해졌겠군요? 어때요? 요즘은 시 설들이 다 복구됐나요?" "음, 이제 다 됐어요. 아마 내일이나 모레부터는 컴퓨터 라인을 정상적으로 쓸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좀 나아지겠군요?" 무정은 나미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지겨울 정도로 기다려 온 한 달이라는 세월. 기껏 침투 경로를 개척하자마자 전산 망이 마비되어 지금까지 헛물만 켜고 있었다. 만약 아까쓰끼 사건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이미 돈 루카의 비밀을 다 밝혀냈 을 지도 모른다. 물론 밝혀냈다고 해서 특별히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일. 바로 내일이다. 그러나 내일부터 바로 일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또 일주일 정도를 허무하게 보내야 한다. 처음 라인 이 정상화된 이후에는 이용 상태에 대한 테스트와 보안점검 을 위해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집중적인 감시를 할 것이다. 그 기간에 연구실 전산망에 들어가는 것은 자멸을 초래하는 것이다. "왜 아무 말도 없죠?" 나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예? 아, 미안해요."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무정은 눈을 크게 떴다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까 그 녹색 눈 생각하나요?" 나미가 무정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농담, 그녀의 미소 뒤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 는 본능적인 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현재 이 연 구소 내에 근무하는 여자들 중에 친한 남자를 이곳에 두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나미는 아르테미스 호에서부터 친 했기 때문에 거의 유일하게 연구소 내에 남자 친구를 가진 여자라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사나운 암펌처럼 자신의 짝 에게 다른 암컷이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 동안 무정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그녀에게 계속 그런 감정을 주입시켰으니까 더욱 그럴 것이다. "천만에요! 왜 그런 생각을?" 무정은 피식 웃어 보였다. "미안해요. 갑자기 새로운 환경 때문에...." 나미는 살짝 웃어 보였지만 그녀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의혹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에 그것이 역력하 게 드러나 있었다. "나미 씨?" 무정이 은근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왜요?" 나미는 눈을 들어 무정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녀가 쑥스 러운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징그러워요.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요." "하하, 징그럽긴요. 누가 뭐래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나미 씨 뿐이죠." 무정은 반은 능청스럽게, 그리고 반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장난기를 섞어 말하는 자신이 쑥스럽기도 했 지만 어느 정도 그런 감정이 살아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 미는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뭐라도 마시면서 얘기하죠?" 무정이 물었다. "좋아요, 전 포도 주스요." "그러죠." 무정은 간단하게 대답을 하고는 서비스 바로 걸어갔다. 바 에는 기가 콱 막힐 정도로 엉성하게 생긴 로봇이 그를 기다 리고 있었다. "뭘 드릴까요, 대위님?" 로봇이 바보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포도 주스 하나, 코크 하나." 무정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멍청한 로봇을 바라보았다. "코크는 없습니다." 로봇이 대답했다. "뭐? 왜 없어? 다 떨어졌나?" "아닙니다. 콜라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뭐가 어째?" 무정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난 뒤에 따져 물었다. "체육관에는 콜라가 있는데?" "여기는 체육관이 아닙니다." 멍청한 기계! "그럼 아이스 티로 줘!" 무정이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스 티도 없습니다." "뭐야? 그럼 뭐가 있어?" 무정은 인상을 찌푸렸다. "각종 과일 주스와 야채 주스, 그리고 셰이크 종류가 있습 니다." "뭐야? 내가 염소냐? 그런 풀들이나 먹게." 무정이 빈정거렸다. "셰이크는 풀이 아니라 지구궤도 상의 우주도시 홀스타인 에서 생산된 천연 우유를 원료로 한 것입니다." 로봇은 계속 억양 없는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이런, 한심스럽긴! 그런 건 애들이나 먹는 거야!" "아닙니다. 셰이크는 풍부한 동물성 단백질과 칼슘, 그리 고...." "그만 떠들고 포도 주스나 두 개 내놔." "알았습니다. 포도 주스 두 개를 드리겠습니다." 바보 같은 로봇이 주스를 꺼내는 동안 무정은 바에 기대어 서서 생각해 보았다. 콜라나 아이스 티는 무정이 체육관에서 자주 마시던 음료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음료들을 취 급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커피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뻔했다. 이곳에는 여자들이 오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곳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이용하는 구역은 모두 그럴 것이다. 카페인 이 들어있는 음료는 여자들에게 제공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남자와 여자의 차이? 분명히 그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외면적인 이 유만은 아니었다. 보다 원론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남자와 여 자의 차이란임신 가능여부의 차이였다. 또한 설사 여자라 할지라도 평소에는 카페인을 규제하지 않는다. 카페인 규제 대상은 몸이 허약한 여자나 임산부 뿐이다. 그리고 이 연구 소에 근무하는 여자들은 모두 건강한 여자들 뿐이었다. 따라 서 결론은.... "포도 주스 두 개, 여기 있습니다." 로봇이 바 위에 두 개의 컵을 내밀었다. 무정은 계속 생각 에 잠긴 채 그 컵을 들고 나미에게 돌아갔다. 70. 숙소. 모처럼 나미와 오붓한 저녁시간을 즐기고 난 무정은 숙소 에 돌아와서도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 생각에 잠겨있었 다. 이제는 나미가 확연하게 질투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것은 두 사람의 사이에 평범한 친구로서의 감정 이상의 것이 형성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아직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사이지만. 그러기에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빨리 이 돈 루카의 정 체를 밝혀내야 했다. 점점 불안은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 연 구소의 정체가 여성의 몸에 대해, 특히 출산 기관에 대해 어 떤 종류의 개입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점점 깊어져 가는데, 벌써 한 달이 지나도록 전혀 더 이상의 진척이 없다 는 것이 그의 마음을 더욱 괴롭히고 있었다. 얼마 후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단말기 앞에 걸터앉아 아무런 생각없이 입력장치를 다독거리기 시작 했다. 연구소 로고가 나타나고 비밀번호를 입력시키자 주 메뉴가 떠올랐다. 무정은 시스템 구성을 선택해서 소장실로 들어갔 다. 20개의 빨간 회선. 그 중 1번 회선을 선택하면 지금이라도 연구실 전산망에 침투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실 컴퓨터에서 소장실로 연결된 선로는 아까쓰끼 사건과 관계없이 계속 살아있었다. 다만 무 정이 자제를 해온것 뿐이었다. 언제든지 연구소 컴퓨터로의 침투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다려왔다. 그쪽의 감시 가 뜸해질 때까지. 보다 엄밀히 따지고 든다면 전에 연구실 호스트에 침투했 던 것 자체도 들통날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전산실 직원들 이 각 회선들을 사용한 기록들을 하나하나 점검한다면 8월 30일과 31일 이틀간 소장실로 통하는 비상회선 하나가 사용 된 기록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러나 워낙 회선의 수가 많기 때문에 특별히 그것을 찾아 내긴 힘들 것이다. 수천 개나 되는 회선이 하루에도 몇 번씩 접속과 해제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의 경우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정은 소장실 1번 비상회선을 활성화시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침을 흘리면서 울타리 너머에 있는 고기조각을 바 라보고 있는 한 마리의 개처럼 멍하니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 을 뿐이었다. 갑자기 작은 신호음이 들리면서 화면 아래쪽에 메시지가 깜빡거렸다. 긴급연결 요망 발신자 : 슈타이너 상사 연결할까요? 무정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혔다. 슈타이너 상사가 웬 일이지? 갑자기 이 시간에. 무정은 연결을 지시했다. 곧 화면에 슈타이너 상사의 얼굴 이 나타났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대위님." 슈타이너 상사가 밋밋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가?" "아, 사용자 확인 중입니다." "사용자 확인? 그게 무슨 소리지?" "지난 번에 있었던 연구소 구역의 아까쓰끼 첩자 사건 이 후로 부정기적으로 단말기 사용자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대위님 방의 회선을 연결해서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슈타이너 상사의 말은 무정의 가슴에 섬뜩한 비수가 되어 와 닿았다. 그러나 무정은 내색하지 않고 대꾸했다. "음, 무슨 소리인지 알겠네." 무정은 벽시계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계속했다. "하지만 지금은 퇴근 후이고 벌써 22시가 되어 가는데 왜 내가 방에 있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것은 오늘이 대위님의 휴게실 출입허용 첫날이기 때문 에 혹시 아직까지 숙소에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입 니다." 무정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눌러 참았다. 슈타이너 상사 는 무정의 신변에 대한 것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무 정은 모니터에 나타난 상사의 얼굴에서 독일산 셰퍼드 군용 견을 연상해냈다. 그건 모니터로 확인할 수도 있잖나? 무정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슈타이너 상사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상 사는 임무에 충실할 뿐이므로. "알았네. 자네는 언제나 수고가 많군." 무정은 억지미소를 띄워 보였다.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시기 바랍니다, 대위님." "수고하게, 상사." 슈타이너 상사의 얼굴이사라지고 다시 본래의 화면이 나 타났다. 무정의 눈에는 아직까지 상사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정말 상사가 그의 말대로 외부로부터의 침입자를 감시하고 자 한 것일까? 혹시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 만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나를 호출할 리가 없는 데? 어쩌면 혹시 나에게 넌지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 까? 무정은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의혹들을 억누르며 요즘 들어 슈타이너 상사와의 관계를 생각해보았다. 근래에는 전혀 상 사와 마찰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한 달쯤 전에는 그 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지금 일은 어 떻게 된 거지? 상사가 후루야마 중위 사건 이후로 신경이 날 카로워진 것은 아닐까?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무정은 깨달았다. 후루야마 간첩사건 이후 신경이 날카로 워진 것은 슈타이너 상사가 아니었다. 상사는 언제나 담담했 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은.... 오히려 무정 자신이었다. 71. 10월 5일. 상황실. 무정은 안보국 컴퓨터의 자료들을 뒤지고 있었다. 지난 밤에 있었던 슈타이너 상사의 행동, 그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상사가 어떤 사실을 냄새 맡은 것인 지, 아니면 단지 일상적인 점검일 뿐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자칫하면 후루야마나 뤼뀔레 꼴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정 자신이. 지금 무정이 찾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일과 관련이 있었다. 슈타이너 상사의 개인 영역에 들어가 자신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지 알아보려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요원들은 타인의 개인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의례적인 일로 되어있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는데, 우선 이 단순반복되는 지루 한 환경에서 자신의 일과를 하는 것만도 지겨웠기 때문에 남 의 일까지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 람의 개인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일종의 사생활 침해처럼 간 주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무정은 그런 것들에 얽매여 있을 때가 아니었 다. 자신이 까마득한 계곡 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심정 인데 그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슈타이너 상사의 영역은 구성 자체에서는 비교적 단순한 것 같았지만 워낙 많은 자료들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무정이 원하는 것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한참을 찾아 헤매던 무정 은 많은 자료 아이콘들 틈에 <업무 관련>이라는 것을 발견하 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역시 많은 자료들이 있었 지만 그다지 눈에 뜨일 만한 것은 없었다. 다만 <보안 관련> 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어 그것을 선택했다. 보안 점검기록 화면이 나타나자 무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파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회선 관련 특기 사항> 무정은 지금까지 크게 눈에 띄는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위험한 짓을 했다면 의무실에서 마취제를 훔친 것과 소장실 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그것들은 감시 카메라에 걸리지 않게 잘 해치웠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단지 치명적으로 눈에 뜨일 수 있었던 일은 바로 소장실 비상회선을 통해 연구실 컴퓨터 와 접속했던 일이었다. 만약 그때 연구실 직원이 소장실 비 상회선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역추적했다면 무정은 꼼짝없이 그물에 걸린 야수 꼴이 될 뻔한 것이다. 따라서 지 금도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회선사용과 관계되는 일들이 었다. 무정은 마른 침을 삼키면서 그 파일을 선택했다. 곧 화면 에 기록자료들이 나타났다. ===================================================== 날 짜 회선번호 특 기 사 항 비 고 ----------------------------------------------------- 96.09.09 TT-Z39 파손 센서 수리 09.01자 복구 96.09.09 TT-Z40 파손 센서 수리 09.01자 복구 96.09.23 TT-Q22 단말기 이상 수리 후 정상 . . 96.09.29 TT-K19 CCTV 일시불통 카메라 교환작업 ----------------------------------------------------- 도움말 앞쪽 뒤쪽 ===================================================== 별로 눈에 띄는 내용은 없었다. 이것은 최근의 기록이었 다. 무정은 그 전의 기록을 찾기 위해 <앞쪽> 아이콘을 선택 했다. 혹시나 하는 우려를 가지고. 곧 화면에는 앞 페이지의 내용들이 나타났다. 그것을 훑어보던 무정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 날 짜 회선번호 특 기 사 항 비 고 ----------------------------------------------------- 96.09.01 TT-B01 심한 노이즈 교환 후 정상 96.09.01 TT-Z36 전투중 센서 파손 교환 예정 96.09.01 TT-Z37 전투중 센서 파손 교환 예정 96.09.01 TT-Z38 전투중 센서 파손 교환 예정 . . 96.09.08 TT-X01 A-81 연결 활성화/사령숙소 96.09.08 TT-A81 X-01 연결 소장실 비상회선 96.09.09 TT-Z36 파손 센서 수리 09.01자 복구 맙소사! 무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정이 소장실 회선을 연결해서 사용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TT-A81은 무정의 숙소에 있는 입 출력 단말기의 회선번호였다. 또한 TT-X01은 무정이 사용한 소장실 비상회선의 회선번호였다. 9월 8일이라면 아까쓰끼 침공 이후였다. 그렇다면 아마 무 정이 연구실 회선에 접근하다가 시스템이 수리중이라는 메시 지 때문에 곧 포기하고 그만 둔 시간대였다. 그런데 슈타이 너 상사는 그것까지 찾아내어 기록해 두었다. 그 짧은 시간 에. 그렇다면 슈타이너 상사는 저녁 시간대에 회선 점검을 자주 한다는 의미였다. 특히 입출력 단말기용 회선을. 안보국에서는 통신상태에 이상이 생긴 회선만 기록되고 일 상적인 회선사용 기록을 남기는 로그 파일이 없기 때문에 그 것은 슈타이너 상사가 일일이 점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었다. 빌어먹을! 정말 개코를 가졌군! 무정은 혀를 찼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사용한 것을 잡아냈 다니. 어쩌면 그것은 슈타이너 상사가 무정을 집중감시 했다 는 뜻이 아닐까? 혹은 다른 이유일 수도 있었다. 감시 카메 라나 센서 스피커 등 입력 또는 출력 전용의 단방향 회선을 통해 누군가 컴퓨터에 침투할 일은 없으므로, 슈타이너 상사 는 그리 많지 않은 입출력 단말기용의 양방향 회선만을 집중 적으로 점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정은 그 앞 페이지의 화면을 불렀다. 그러나 무정이 소 장실 회선을 사용한 기록은 더 이상 없었다. 실질적으로는 8 월 30일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오랜 시간을 사용했었지만 그 때는 슈타이너 상사가 비번인 시간대였다. 그나마 그것까지 들키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미 슈타이너 상사에게 꼬리를 잡힌 셈이었다. 상 사가 양방향 회선만을 집중 점검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짐작 은 단지 하나의 바램에 불과했다. 어쩌면 정말로 상사는 무 정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후루야마를 잡아내던 그 육감으로 냄새를 맡고서. 이럴 수가. 극도로 긴장한 무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역시 슈타이 너 상사는 예민한 코를 가진 사냥개, 또는 경비견이었다. 그 는 어떤 낌새가 있을 경우 사소한 것 하나도 그대로 넘기지 않는 파수꾼이었다. 그는 이미 무정이 소장실의 회선을 연결 해서 사용한 것을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그는 무정에게 절 대 그런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사냥감에게 다가가는 사냥개 가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소리 죽여 조용히 다가가듯 그렇게. 그리고 기회를 포착하면 언제든지 그 먹이에 달려들 어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무정은 온몸을 짓누르는 무거운 긴장 속에 생각에 잠겨있 었다. 분명히 슈타이너 상사는 그 회선을 연결해 보았을 것 이다. 그리고 화면에 연구실 컴퓨터의 로고가 나타나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다만 비밀번호 때문에 연구실 프로그램 내부 에 들어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어쩌면 이미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렇게 되면 슈타이너 상사도 이 연구소의 모든 내막을 알게 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슈타이너 상사가 비밀번호를 알아냈는지를 무정이 모르듯, 무정이 이 미 연구실 컴퓨터에 잠입했는지에 대해 슈타이너 상사도 모 를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앞으로는 도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또는 숨바꼭질이 될 것이다. 슈타이너 상사가 단말기 앞에 앉아있지 않은 시간만을 골라 소장실 회선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슈타이너 상사의 근무시간대에는 절대 그 것을 사용해선 안 될 것이다. 또는 슈타이너 상사가 비번일 지라도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면.... 무정은 문득 생각이 나서 그 화면에서 빠져 나와 슈타이너 상사 숙소의 회선이 현재 사용중인지를 확인해 보았다. "음." 무정은 긴장의 한숨을 흘렸다. 지금 슈타이너 상사는 컴퓨 터를 사용하고 있었다. 역시 생각대로였어. 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불길한 생각이 떠올 랐다. 도대체 잠을 안 자고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무서운 경 비견.... 슈타이너 상사. "대위님, 식사하러 안 가십니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정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 다. 록포드 중위가 뒤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 무정은 시계를 보았다. 벌써 12시 10분이 되어가고 있었 다. "배가 고픈 것도 모르고 있었군." 무정은 록포드 중위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일어섰 다. 72. 숙소. 모니터에 현재의 회선 사용상태가 나타났다. 무정은 슈타이너 상사 숙소의 입출력 단말기용 회선인 TT-A86과 TT-A87 두 회선을 확인했다. 지금은 회선을 사용하 고있지 않은 상태였다. 무정은 남의 집에 무사히 숨어들어 간 도둑과 같은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사는 이제야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퇴근 직후에는 안 자고 뭘 하고 있었던 것인지. 아마 그것은 무정을 추적하는 것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다른 일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무정이 과민반응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 상 태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슈타이너 상사가 소장 실 회선의 정체를 알아차렸으므로. 혹은 다른 사람들도 이미 그 기록을 읽어보지 않았을까?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의례 상. 일이 이렇게 되면 이제는 변명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만 약 그것에 대한 말이 나온다면. 소장실 비상회선이 어떤 용 도로 쓰이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연결해 보았다고 할까? 아니 면 누군가가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고 우연히 써봤다고 할까? 그리고 그것이 연구실 컴퓨터로 연결되어 있고 비밀번호도 모르기 때문에 그 이상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인 가? 그 변명이 얼마나 먹혀 들어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장 시간을 사용했던 8월 30일의 기록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또한 상사가 기록을 남긴 그날 이후 한 달 가까이 자제를 하 고 그 회선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 다. 만약 그날 이후 계속 연구실 시스템에 접근했다면 슈타이 너 상사는 그것을 꾸준히 기록한 뒤에 소장에게 은밀히 보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정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계속 사용하다가 언젠가는 소장의 지시에 의해 연구실 측으로부터 역추적을 당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서늘한 기운이 뒷머리를 타고 내렸다. 최악의 경우에는 슈타이너 상사에게 뒤집어씌워야 하는 사 태가 벌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애꿎은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는 것은 안 된 일이지만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과연 슈타이너 상사가 호락호락 당하고 말 것인가? 그 예리한 독일산 셰퍼드가? 그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73. 10월 8일. 휴게실. "요즘은 조금 편해졌어요." 나미가 주스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왜요?" 무정이 넌지시 물었다. "이제 메인 시스템하고 연결이 되니까 말에요. 수작업이 많이 줄어들었죠." "아하, 그렇군요." 무정은 무관심을 가장하며 맞장구쳤다. 하지만 그의 마음 은 수렁 속을 헤매고 있었다. 벌써 한 달 이상을 기다려온 연구실 컴퓨터가 정상가동되고 있는데 그는 사용할 수가 없 었다. 며칠만 더 기다리면 연구실 쪽에서 감시가 뜸해질 무 렵 침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변수가 나타 나 버린 것이다. 슈타이너 상사. 그 무감정하고 애매모호한 인물은 때로는 무정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가장 큰 골치거리로 부각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세요?" 나미가 물었다. "예? 아네요." 무정은 잠깐 당황해서 둘러댔다. "요즘은 이상하게 생각이 많아진 거 같아요?" 나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요?" 무정은 일부러 조금은 허풍이 섞인 말투로 물었다. "예. 아까쓰끼 사건 이후 신경 쓰이는 일이 많은가 봐요?" 아까쓰끼. 그것은 사실이었다. 빌어먹을 것들 때문에 무정의 계획이 한 달 이상 늦춰지고 있었으니까. "아네요. 나미 씨와 있는 자리에서 내가 왜 일거리를 생각 하겠어요?" "그래요?" 나미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 뒤를 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나미의 질문은 집요했다. 상대를 생각해서, 또는 자신의 이미지를 좋은 쪽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환경 이 중요한 것 같았다. 가장 원초적인 동물적 본능을 드러나 게 만드는 이러한 환경. "그건 이 음료수 때문입니다." 무정은 잠깐 사이에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둘러댔다. "음료수요? 왜요?" 나미가 눈을 크게 떴다. "영 맘에 안 들어요." 무정을 이를 드러내 보이며 머리를 저었다. "나는 항상 코크나 아이스 티를 마시는데 여긴 그런 게 없 어요." "그래요? 하지만 카페인 음료는 몸에 나쁘다고...." "난 괜찮습니다. 언제나 강체질, 안보국 요원을 우습게 보 지 말아주세요." 무정은 두 주먹을 힘껏 쥐어 보이며 허풍을 떨었다. 그 모 습을 보고 나미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겨우 화제를 돌렸다 는 생각에 무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74. 10월 9일. 상황실. 모니터에 나타난 양방향 회선 연결상태를 살피던 무정은 미간을 좁혔다. 슈타이너 상사의 TT-A87이 소장실의 TT-X01 과 연결되어 있었다. 무정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록포드 중위는 책을 읽고 있었고 켈리 중사는 나른한 표정으로 그저 자신의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정은 화면 위쪽의 타이머 아이콘을 불러 그 중 1번 타이 머를 작동시켰다. 작은 타이머 박스에는 현재시각과 경과시 간이 기록되고 있었다. 무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벌써 며칠째, 무정은 슈타이너 상사와 보이지 않는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숨바꼭질 같은 것이었 다. 불과 며칠 사이지만 무정은 버릇처럼 슈타이너 상사가 비 번인 시간대에 컴퓨터를 사용하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상 황실에 출근해서도 주로 슈타이너 상사만을 추적했고 퇴근해 서도 그를 추적했다. 아마 슈타이너 상사도 종종 무정을 추 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정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자신이 상사를 추적한다는 눈치를 주지 않도록 노력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상사를 대해왔던 방식 그대로 대하고 있었다. 아주 태연하게. 무정이 슈타이너 상사의 컴퓨터 사용상태를 추적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그 하나는 상사가 주로 컴퓨터를 사 용하는 시간대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상사가 소장실 회선에 접근하는가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상황실에 가서 몇 시간을 보 내고 있는 중이었다. 벌써 며칠째 그는 슈타이너 상사가 비 번인 날만 골라서 야간근무를 자청했다. 그리고 록포드 중위 와 켈리 중사에게는 절대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도록 지시 했다. 처음에는 무정이 근무시간 후까지 남아있는 점에 대해 거북스럽게 여기던 두 당직자도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나름대 로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무정은 며칠을 매복해온 보람을 느끼고 있었 다. 슈타이너 상사는 지금쯤 무정이 휴게실에 가서 여자와 어울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정 숙소의 단말기 는 잠들어 있으니까. 그것이 바로 매일 출근하는 무정이 교 대근무를 하는 슈타이너 상사보다 유리한 경우였다. 과연 상사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무정은 타이머가 40분을 경과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생각 했다. 벌써 상사는 40분 동안을 소장실 회선에 접속하고 있 었다. 아직까지 비밀번호를 풀고 있는 중일까? 아니면 이미 연구실 시스템에 침투해서이것저것 살피고 있는 걸까? 그러 나 무정의 짐작으로는 아직 상사가 침투하지 못했을 것이라 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슈타이너 상사는 육감이 뛰어나긴 하지만 컴퓨터에 관한 한은 그 분야를 전공했던 무정보다 뒤 지고 있었다.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무정은 상사가 접속중인 TT-X01 회선을 엿보고 싶은 충동 을 눌러 참았다. 다른 사람의 화면을 훔쳐볼 수는 있지만 그 럴 경우 그 회선의 방어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때문에 금세 들통이 나게 되어있었다. 그것은 보안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지만 오히려 이렇게 불법적인 일을 할 때는 역이용이 될 수 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개인 시스템이라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다. 가장 간단 한 것은 그 방어 프로그램을 작동 않게 바꿔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프로그램 상태변경에 대한 기록이 남 게 되어있다. 그 기록은 별도로 생성되는 것이라면 그냥 지 워버리면 되지만 로그 파일에 남는 것이므로, 파일 안에 들 어가서 기록을 지울 경우에는 수정된 날짜가 파일 상태에 남 게 된다. 그 날짜를 바꾸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은 바로 그 시스템 클락의 시간을 바꿔버 리는 것이었다. 시간을 그 파일이 최종수정된 날짜로 바꾸고 얼른 파일에 들어가 필요한 내용을 지운 뒤에 빠져 나와 다 시 시간을 제대로 맞추면 된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에서 그 런 짓을 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타이머는 벌써 한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슬쩍 둘러보니 록포드 중위는 졸면서 책을 읽고 있었고 켈리 중사는 아예 잠에 빠져 있었다. 저녁식사 후의 식곤증이 무정을 돕고 있 었다. 무정은 그 변화 없는 화면을 들여다보면서도 전혀 지루함 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슈타이너 상사가 계속 연구실 회 선에 접속중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끝없는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잘 빠진 미인의 침실을 훔쳐보는 것처 럼. 슈타이너 상사가 소장실 회선과의 연결을 끊은 것은 타이 머의 시간이 1시간 40분을 나타내고 있을 때였다. 현재시각 은 벌써 열 시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이제 돈 루카 연구소 최고의 사냥개인 슈타이너 상사가 새 로운 먹이의 유혹에 눈이 멀어서 서서히 덫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무정은 쾌재를 불렀다. 무정은 회선 연결상태 화면에서 빠져 나온 뒤 회심의 미소 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75. 10월 10일. 상황실. "이제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군." 무정이 그의 화면을 바라보면서 건성으로 내뱉은 것처럼 가장하며 중얼거렸다. 무정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슬쩍 근 무자들을 바라보았다. 바로 돌아보면 그들을 의식하고 한 말 이라는 것을 눈치챌 것이므로. 마이어 중위가 무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이어 중위는 눈 이 마주치자 멋쩍은 웃음을 던졌다. 무정도 가볍게 웃어 보 이고는 한 마디 했다. "그래, 요즘은 뭐 특기할 만한 사항이 없나? 뭐, 업무상 중요한 일이 아니라도 말야." 말을 하면서 무정은 슬쩍 슈타이너 상사의 눈치를 살폈다. 상사의 눈길이 무정을 향할 무렵 그의 눈은 이미 마이어 중 위에게 돌아가 있었다. 사실 무정은 슈타이너 상사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 었다. 그것은 며칠 전만 해도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무정 이 TT-X01을 연결했던 것을 슈타이너 상사가 기록해 두었다 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 해도 무정은 상사에 대한 공포에 휩 싸여 있었다. 따라서 상사가 그 말을 꺼낼까 두려워 했고 그 러기에 가능하면 상사와의 대화를 피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어제는 상사가 그 회선을 장시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니까. 그리고 무정은 슬쩍 운을 띄워 상사가 그것에 대해 어떤 말을 꺼낼지, 혹은 입 다물고 있을지를 확 인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반응은 엉뚱한 쪽에서 튀 어나왔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새로운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이어 중위가 입을 열었다. "뭐 그다지 눈에 띄는 일은 없습니다. 여성 연구원이 거주 구역 복도에서 조금 선정적인 복장을 하고 다니다 경고를 당 한 것을 뺀다면 말이죠." "그래? 그거 참 즐거운 일인데...." 무정은 얼버무리고 나서 물었다. "언제 그랬나?" "그제 밤이었습니다." 마이어 중위는 대답을 하고 나서 입력장치를 조작했다. 중 앙 스크린의 장면이 바뀌어 여성 거주구역 복도가 나타났다. 화면의 왼쪽 상단에는 이라는 CCTV 카메라 번호가 나타나 있었다. 오른쪽 상단에는 나타난 시각은 22시 1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화면에서 한 숙소의 문이 열리면서 금발의 여자가 걸어 있었다. 여자는 카메라 쪽을 향해 걸어왔다. 눈부신 미모의 얼굴에 녹색 눈이 빛나고 있었다. 스크린 아래쪽에 그녀의 이름이 나타났다. <쏘냐 마랸스까> "맙소사!" 무정은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저 여자가? 쏘냐 마랸스까. 왜 저런 행동을.... <규정위반> 곧 화면 중앙에 붉은 자막이 깜빡거렸다. 마랸스까는 카메 라 쪽으로 태연하게 걸어왔다. 그녀의 하얀 두 다리가 눈부 시게 빛났다. 꿀꺽. 무정은 침을 삼켰다. 저 여자가 왜 저러는 거지? 규정을 모르고 있나? 짧은 반바지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다리는 카 메라에 가까워짐에 따라 서서히 가려지고 있었다. 곧 다른 카메라에서 잡은장면이 나타났다. 카메라의 기록에는 마랸스까가 걸어가는 뒷모습 이 나타나고 있었다. 역시 중앙에는 경고 자막이 깜빡거렸 다. 몸에 꽉 끼는 반바지를 입고 있는 마랸스까의 힙이 매우 충동적으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한 걸음 걸을 때 마다 좌우로 움직이는 그 율동에 무정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돌연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경고합니다. 쏘냐 마랸스까 양, 지금 즉시 숙소로 돌아가 십시오. 마랸스까 양은 복장에 관한 규정을 위반하고 있습니 다. 반복합니다. 쏘냐 마랸스까 양...." 방송이 나가기 무섭게 마랸스까가 카메라를 향해 돌아섰 다.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카메라를 슬쩍 흘겨보는 순간적인 눈빛을 무정은 놓치지 않 았다. 그 녹색의 눈빛을. 마랸스까는 곧 숙소 안으로 사라졌다. 다시 중앙 스크린은 현재의 감시화면으로 돌아왔다. 화면에는 도킹 포트가 나타 나 있었다. "이상입니다." 마이어 중위가 말했다. 무정이 지켜보고 있는 동안 화면은 다시 초계정 격납고로 변했고 이어 정비선 격납고로 바뀌었다. "저 여자가 저런 실수를 한 것은 처음인가?"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무정이 껄끄러운 목구멍을 겨우 가 다듬으면서 물었다. "예, 처음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5년이 지나도록 여성연구 원이 저렇게 과다노출을 하고서 숙소 밖으로 나온 예는 몇 번 되지 않습니다. 지난번 맥과이어 연구원의 경우를 포함한 다 해도 말입니다." "음." 무정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물었다. "왜 저런 중요한 것을 보고하지 않았나?" "네, 대위님?" 마이어 중위가 눈을 크게 떴다. "저런 좋은 장면을 자네들끼리만 보고 끝내려 했단 말인 가? 나도 가끔씩 저런 장면을 즐겨야지." 무정은 일부러 엄한 표정에 약간의 짓궂은 빛을 띄우고 말 했다. 마이어 중위는 그제야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었다. "그럼 앞으로도 저런 장면이 있을 땐 꼭 보고 드리도록 하 죠." "꼭 그렇게 해 주게." 무정은 여전히 진지한 척하는 가운데 장난기 있는 미소를 띄웠지만 실제 그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쏘냐 마랸스까.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왜 하필 그 많은 여자들 중에 마랸스까가 저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무정은 며칠 전 처음 휴게실에 갔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몇몇 여자들이 무정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감회가 새로운 듯 살피고 있었다. 그 중에는 여객선 아르테미스 호를 타고 올 때부터 낯이 익은 여자들도 있었다. 그 여 자들도 오늘 부로 전입 8주가 되어서 남녀 혼성 휴게실 출입이 허용되고 있는 것이었다. 마랸스까는 그때 나타났다. 뭔가 의미 있는 눈빛을 하고서 개인적으로 친해지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었다. 다른 연구원 들과 다르게 매우 적극적으로. "안녕하세요, 박 대위님?" 누군가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한 여자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 여자는 금발에 녹색 눈을 한 미인이었다. 그 러나 무정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네, 안녕하세요?" 무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아마 연구실 화재 때 무정 을 알아본 연구원이리라. "어떻게 여길 다 오셨네요? 한 번도 안 보이시더니." 그녀가 생글생글 웃었다. "예, 오늘이 전입 온지 8주가 되는 날이거든요." 무정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이곳 생활이 얼마 안 되셨군요?" 그녀는 가볍게 놀라는 빛을 띄우며 손을 내밀었다. "저는 쏘냐 마랸스까에요. 폴란드 출신이죠." "아, 그렇습니까? 난 박무정입니다." 무정은 그녀와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다가 다시 거두 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정에게 이성적 관점에서 접근하려 했다는 것은 나미가 나타났을 때의 반응으로도 알 수 있었다. 마랸 스까는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일에 과민반응을 보이고 무 정의 앞을 떠났다. 물론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나미의 경 우도 마찬가지였지만. "저, 우리...." 마랸스까는 말을 꺼내다가 멈추고 무정의 뒤쪽을 응시 했다. 무정은 무슨 일인가 싶어 뒤돌아 보려다가 그만두 었다. 불필요한 몸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 여자 친구가 오는군요." 마랸스까가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무정은 눈만 슬쩍 돌렸을 뿐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대화 즐거웠어요. 나중에 다시 봐요." 마랸스까는 조금 새침한 미소를 띄워 보이며 다른 사람 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무정은 갑자기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 행위와 불과 며칠이 지난 후 저런 동작을 76. 10월 11일. 숙소. 슈타이너 상사 방의 단말기는 쉬고 있었다. 무정은 도둑이 남의 집 담을 넘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소 장실로 연결된 TT-X01 회선을 연결했다. 무정은 며칠간 슈타 이너 상사가 비번인 날이면 밤 늦게까지 상황실에 남아 상사 의 단말기 사용상태를 감시해 왔지만, 이틀 전에 그 꼬리를 잡고 나서 한 달 만에 오늘 처음으로 연구소 회선과의 접촉 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곧 화면에는 이전에 그랬듯이 연구실 컴퓨터의 로고나 비 밀번호 입력요구 메시지 따위는 나타나지 않고 바로 연구소 관리 시스템의 메인 메뉴 윈도우가 나타났다. 무정은 실로 한 달 이상이 지나 보게 된 그 메뉴 앞에서 환희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요즘 들어 끊임없이 그를 괴롭 히고 있는, 무의식에 숨어 있던 복병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것은 슈타이너 상사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무정은 떨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다시 옆의 단말기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슈타이너 상사의 단말기 회선 은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 그는 지나치게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어차피 슈타이너 상사의 단말기가 켜지면 경보 음이 울리도록 해놓고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재삼 회선사용 감시화면을 확인하고 난 무정은 연구소 메 뉴를 다시 차근차근 훑어나갔다. 시스템 구성 시스템 감시/제어 연구원 상태 CCTV 화면 연구자료 입력 핵심 연구 돈 루카 메뉴의 구성은 바뀐 것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의 시스템을 만든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가 동중인 시스템을 중간에 뜯어고친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 는 일이다. 그 덕분에 그 동안 많은 사건들이 발생했어도 크 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정은 부 메뉴 항목 중에서 연구원 상태 아이콘을 선택했 다. 혹시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라도 튀어나오지 않 을까 초조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금세 연구원 상태 화면이 나타나 무정의 불안감을 씻어주었다. 그가 나미의 연구원 번 호인 F-096C-003을 입력하자 나미에 대한 자료가 나타났다. ==================================================== 연구원 상태 화면 ---------------- 연구원 번호 : F-096C-003 이 름 : Jeong,Nahmii 전 입 일 자 : 096.02.09 국 적 : 대한연방공화국 (U.R.K) [ 현재상태 ] 현등급 : A (상급) 돈루카 : 없음 건강 최근검사일자 : 096.10.09 신 장 : 175 체 중 : 56 지방지수 : 1.0 혈 액 : 정상 호 르 몬 : 정상 두 뇌 : 정상 심 장 : 정상 혈압 : 정상 폐 부 : 정상 위 장: 정상 간 장 : 정상 대 장 : 정상 신 장 : 정상 자 궁 : 정상 규격 : 4.0 정신 : 정상 사상 : 정상 주의사항 : 없음 조치 : 없음 . . ==================================================== 무정은 화면에 나타난 자료들을 전자수첩에 기록해 두었던 자료와 비교해 보았다. 나미의 자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 다. 심지어 나미는 체중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최근 검사일자 만이 바뀌어 있을 뿐이었다. 대단하군. 무정은 미소를 지었다. 나미가 대견스러웠다. 이런 단조로 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체중이 늘거나, 혹은 그 동안 터졌던 사건 등으로 신경이 쇠약해져서 체중이 줄어버리는 변화 따 위가 없었다. 무정은 다시 한 번 나미에 대한 기록을 훑어보고는 다른 번호를 입력시켰다. 그것은 전에 자궁에 이상이 발생되었음에도 식중독이라는 엉터리 진단결과가 보고되었던 재클린 맥과이어의 번호였다. 맥과이어 연구원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 직도 그녀는 완전하지는 못했다. 연구소 기준으로 볼 때. 현 등급도 그대로 중급인 B였고 돈루카 상태는 0.01의 감소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전의 0.03에 비하면 많이 호전된 것 이지만 그 약간의 감소율 때문에 여전히 B급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정은 다른 여자들의 자료들을 여자들이 전입 온 시기에 따른 기수별로 몇 개씩만 샘플로 집어내어 살펴보았다. 나미 와 함께 들어온 여자들, 혹은 그보다 두 분기 먼저 들어온 연구원들에게서는 그다지 큰 변화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러나 무정은 2분기차와 4분기차에 해당하는 연구원들의 자료 들을 과거의 기록과 비교해 보았을 때 큰 변화를 알 수 있었 다. 체중의 변화. 대부분의 연구원들 체중이 1킬로그램 이상씩 늘어나 있었 다. 무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았 다. 그러나 지방지수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오직 체중의 변화만 있었다. 왜지? 왜 모두 체중이 늘어난 거지? 그리고 왜 체중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지방지수의 변화는 없는 거지? 무정은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체중이 늘어난 연구원들은 모두 돈루카 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돈루카 항목이 <없음>으로 나 타나 있는, 즉 나미의 동기들이나 두 분기 선배들에게는 체 중의 증가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무정은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어 서 그 이름을 입력시켰다. 쏘냐 마랸스까, 전에 남녀혼성 휴게실에 처음 가던 날 만 난 여자, 그리고 며칠 전 숙소 밖에서의 과다노출로 경고를 받은 여자.... ==================================================== 연구원 상태 화면 ---------------- 연구원 번호 : F-096B-017 이 름 : Maryanska,Sonya 전 입 일 자 : 096.05.09 국 적 : 폴란드 [ 현재상태 ] 현등급 : A (상급) 돈루카 : 정상 건강 최근검진일자 : 096.10.09 신 장 : 177 체 중 : 59 지방지수 : 1.0 두 뇌 : 정상 심 장 : 정상 혈압 : 정상 . . 무정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돈루카가 존재하는 부류에 속해있었다. 돈루카. 도 대체 돈루카가 뭐지? 무정은 화면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고개 를 저었다. 무정은 지금껏 잊고 있었던 옆 단말기의 회선사용 감시화 면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슈타이너 상사의 단말기는 잠들어 있었다. 물론 그 단말기가 깨었을 때는 경보음이 울리겠지 만. 무정은 다시 처음의 화면으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사건의 핵심에 도달해 보기로 했다. <핵심 연구> 무정은 그 메뉴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마디로 실 망이었다. 핵심 연구라는 것은 연구의 핵심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그냥 단지 진행 상태 등에 관한 것 뿐이었고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연구자료에 나타난 명칭들이 모두 생소한 것들 뿐이었다. 아마 돈 루카 연구소 내에서만 사용하는 암 호화된 명칭들 같았다.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주 메뉴로 돌 아온 무정은 마지막 관심사에 집중했다. 아직까지 수수께끼는 겨우 10퍼센트 정도가 풀려있을 뿐이 었다. 그 나머지는 아직도 안개 속에 은밀히 숨겨져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자료들을 뒤졌지만 그 안개 속을 헤치고 나갈 수 있을 만한 길잡이가 될 만한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가능성을 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 안개들을 모두 걷히게 할 뜨거운 한낮의 태양과 같은 것, 그 하나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만약 그것마저 안개를 걷어 내지 못한다면.... <돈 루카> 무정은 모든 기대를 그 하나에 걸고 절벽에 매달려 한 가 닥 나무뿌리를 잡는 심정으로 아이콘을 선택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시오> 대뜸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분명 중요한 정보가 들 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정의 마음에 동시에 쾌재와 불안감이 떠올랐다.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비밀번호가 다르다면.... 무정은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비밀번호를 입력시켰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경고 메시지도 다음 화면도 떠오르지 않은 채 매우 기나긴 시간이.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 다. 불과 몇 초 이내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것이 무 정에게는 지루하도록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분위기의 화면이 나타났다. 그것은 그 래픽으로 그려진 연구소 외곽의 입체도 위에 연구소의 로고 가 겹쳐진 그림이었다. 그 그림 아래에는 <돈 루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나타나 있었다. 무정이 다음 화면을 나타내도록 지시하자 곧 화면이 바뀌 었다. +-------------------------+ | 본 자료 열람시 유의사항 | +-------------------------+ 보안등급 : 극비 보안시효 : 영구 열람 대상 1. 지구연방 의장 및 상임위원 2. 지구연방군 사령관 3. 지구연방 안보국 국장 4. 돈 루카 계획 최고 관계자들 5. 돈 루카 연구소 소장 및 전산실장 * 위의 해당자는 퇴임 후 영원히 기밀을 유지할 것 외적에 의한 연구소 점령 위험시 행동사항 3급 위기 : 모든 파일을 지울 것 2급 위기 : 모든 캡슐을 없앨 것 1급 위기 : 모든 연구원들을 소멸시킬 것 0급 위기 : 연구소를 폭파시킬 것 이런 무서운 음모가...! 무정은 입을 딱 벌렸다. 이 정도로 심한 제한을 하고 있다 는 것은 이것이 보통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 다. 그렇다면 현재 태양계 내에서 이 일에 관련되어 있는 사 람은 백 명이 채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연구소가 생긴 것은 5년에 불과하므로 과거에 각종 요직을 역임한 사람들을 합친 다 해도 백 명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어떠한 비밀계획보다도 더욱 심한 것이었다. 그 어떤 신무기 개발계획도 보안시효가 <영구>로 되어있던 적은 없었다. 언 젠가는 그 무기가 다른 나라 혹은 다른 집단에서도 만들어지 게 되므로. 하지만 이것은 달랐다. 무엇보다 어이가 없는 것은 외적의 연구소 점령시 취해야 할 행동이었다. 다른 것은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1급 위기 : 모든 연구원들을 소멸시킬 것> 바로 그 항목이었다. <소멸>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의심스러웠다. 단지 <제거>나 <살해>라는 말 대신 굳이 소멸이라는 단어를 쓴 의도는 무엇 일까? 그것은 이 연구가 그만큼 떳떳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소멸이라는 말의 의미는 죽이라는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서 아마 그 시체마저도 없애버리라는 뜻일 것이다. 무정은 온몸에 돋는 소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얼음으 로 만들어진 칼날보다 더 예리하게 신경을 찌르면서 전신을 마비시켜 버리는 전율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일을 할 수가 없 었다. 잠시 얼음처럼 차가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삐이, 삐이, 삐이, 삐이.... 무정은 깜짝 놀라 옆의 단말기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슈타 이너 상사의 단말기가 막 깨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무정은 다급하게 회선연결 윈도우를 불러서 소장실 회선과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동시에 단말기 모니터에서 연구실 화면이 사라 지면서 회선연결 화면만 남게 되었다. 화면에 나타난 시계는 23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77. 10월 14일 저녁. 휴게실. "안녕하세요!" 쏘냐 마랸스까가 대뜸 무정에게 다가오면서 인사했다. 무정은 휴게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출입구 맞은편에 앉아 음료를 마시면서 생쥐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움직임 하나 없 이 입구 쪽에 눈을 고정시킨 채 주시하고 있는 마랸스까를 볼 수 있었다. 어색한 기분이 든 무정은 그녀의 눈을 피하려고 했었다. 더욱이 상황실에서 보았던 마랸스까의 과다노출에 대한 기 록, 그것은 분명히 무정을 의식한 고의적인 행위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한 그녀의 행동을 동물 심리학적 측면에 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무정에게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 일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기대감에 찬 상대의 눈빛을 의식하고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요즘 무정의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돈루카의 비밀, 어제 보았던 무서운 기록--전 연구원 소멸, 무정을 감시하는 경비견 슈타이너 상사, 다가오는 11월 9일, 나미……. 확신할 수는 없지만 2분기와 4분기 째에 해당하는 B 그룹과 D 그룹의 연구원들에게 <돈루카>라고 불리는 뭔가 매우 음산하고 정체불명인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는, 아마 나미도 2분기에 접어들면 그 돈루카가 몸 속에 자리잡게 될 것 같았다. 그 돈루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절대로 세상에 알 려지면 안 된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추악한 것임에 틀림없었 다. 아마도 그것이……바로……선유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지나친 상상력 에서 비롯된 억지추측일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확 연한 단서들을 보여주는 것들……, 현재 이곳 연구소의 40명 이나 되는 여인들이 몸에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 다. 또한 만약 그 추측이 확실한 것이라면 앞으로 불과 한 달도 안 남은 날들이 지나가면 다른 40명의 몸에 그것이 심 어질 것이다. 나미를 포함하는 C 그룹, 그리고 A 그룹에 해 당하는 여자들……. 더욱이 이미 지난 5년간 이곳을 거쳐간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계속 오게 될 다른 여자들 은……. 하지만 설사 그 사악한 것의 정체를 알아냈다 하더라도 자 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무정을 괴롭 히고 있었다. 그것을 세상에 폭로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가 능할 수도 있고 불가능할 수도 있다. 어쩌면 폭로를 할 만한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괜스레 연구소의 기밀만 드러내고 무정은 극비사항을 누설한 죄로 십여 년, 아니 군인의 신분이므로 경우에 따라선 첩자 또는 이적행위가 적용되어 사형판결까지 가게 될지도 모른 다. 이적행위……사형판결……. 그렇다면 그러한 사악한 음모를 그냥 눈 감고 넘어가야 하 는가? 비리를 알면서도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가? 단 지 선유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것만으로 만족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나미는? 이미 무정을 자신의 남자라 고 믿고 있는 나미는? 그러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마랸스까가 다가왔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무정은 거의 건성에 가까운 말투로 대꾸했다. 복잡한 머릿속, 나미의 질투, 그리고 노골적인 마랸스까의 접근……. 고의 적으로 그녀를 냉담하게 대하려 한 것은 아 니었지만 머릿속의 착잡한 생각들은 그의 표정을, 그의 목소 리를, 그리고 그의 감정을 한여름의 뙤약볕에 말라버린 식빵 조각처럼 딱딱하게 굳게 하고 있었다. "요즘 보기가 힘드네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마랸스까가 말했다. "예, 바쁜 일이 있어서." 무정은 대충 둘러댔다. 그는 요즘 슈타이너 상사와의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돈 루카의 정체를 추적하는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휴게실 출 입을 자제하고 있는 편이었다. 아니, 자제라기보다는 사실 별로 시간이 없었다. "저쪽에 가서 앉을까요?" 주변을 살피던 마랸스까가 말했다. 무정의 눈은 그녀의 눈길을 따라갔다. 한쪽에 아늑한 느낌 을 풍기고 있는 빈 자리가 있었다. 마치 연인들을 위한 장소 같은 곳이었다. 무정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마랸스까의 뒤 를 따라갔다. "뭐 마실래요?" 무정이 자리에 앉자 마랸스까가 물었다. "제가 가져오죠." 무정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마랸스까는 두 손을 들어 제지 했다. "아네요. 제가 가져올게요. 저는 신세진 일도 있고 하니까 요." 신세? 무정은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무엇을 드실래요?" 무정의 표정에 나타난 변화를 읽었음에도 마랸스까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음, 포도 주스로 하죠." "예, 포도 주스요." 뒤돌아 서비스 바를 향해 걸어가는 마랸스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정은 생각에 빠졌다. 저 여자는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하지? 마랸스까는 무정이 처음 휴게실에 왔었던 그 날부터 계속 특이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연구소 내에서의 행동규정에 위 반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자제하거 나 금기시 하는 행동을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하고 있었다. 무정의 눈길을 끌기 위해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한 도 내에서의 모든 행동을 다 하고 있었다. 무정이 보기에 마 랸스까는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녀가 꺼리는 대상이 있다면 단 하나, 바로 나미뿐이었다. 그나마 오늘은 나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정이 나미와 약속 을 하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리고 나미가 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오늘따라 마랸 스까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아예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의미일까? 마랸스까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무정은 모든 복잡한 생각들을 머릿속에서몰아내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랸스까의 얼굴에 나타난 밝은 웃음을 굳이 깨뜨리고 싶지 는 않았다. "아아, 이렇게 둘이 있으니까 좋군요." 무정에게 주스를 내밀고 자리에 앉은 마랸스까는 감탄사인 지 아니면 안도의 한숨인지 알 수 없는 야릇한 숨소리를 내 뱉으면서 말했다. 무정은 대꾸하지 않고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으흠……, 아닌가요?" 마랸스까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예?" 무정은 들어올리던 주스 컵을 다시 내려놓으며 눈을 크게 떴다.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군요." 마랸스까의 목소리에는 약간 착잡한 느낌이 배어있었다. "아, 아닙니다." 무정은 과장된 몸짓으로 부정했다. "제가 자꾸 귀찮게 하고 있는 것 같군요." 마랸스까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네요. 전혀 안 그래요." 그 말에 마랸스까가 눈을 들었다. "저, 실은 저는 대위님을 존경해요. 그 은혜도 갚아야 하 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은혜요? 무슨 은혜를……." "전에 연구실 화재 때 대위님 덕에 살아났잖아요. 저는 그 걸 잊을 수 없어요. 그 은혜를 꼭 갚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 그건 제가 해야 할 일이었고, 저 혼자 한 일도 아니 고요. 또……음, 마랸스까 양 말고 다른 사람들도 구했는데 굳이 마랸스까 양이 그렇게……." "글쎄요? 그렇게 하면 안 되나요?" 마랸스까의 얼굴에 약간 차가운 빛을 띈 서글픈 미소가 떠 올랐다. 무정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착 잡한 기분이 들어 주스만 빨아댔다. 한편으로는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혹시 나미가 나타나지 않나 우려하면서. "여자친구를 기다리나요?" 마랸스까가 물었다. "아, 아네요. 그냥……." "아마 오늘은 정나미 양이 오지 않을 거에요." 문득 마랸스까는 예의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예? 그건 무슨 소리죠?" "오늘 제가 미용실 이용권을 그녀에게 넘겼죠. 원래 제 차 례인데 그녀에게 선심을 쓴 거에요." 이런! 무정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여자군. 모든 것이 계획적이야. "대위님과 단 둘이 자리를 가지고 싶어서요." "음, 고맙군요." 대꾸하고 난 무정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무의식적으 로 주스를 입에 가져갔다. "뭐,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이렇 게 대화나 나누고 싶어서요." 주스를 마시면서 무정은 생각했다. 나미가 오지 않는다는 말은 무정의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하고 있었다. 적어도 신경 쓰이는 일 하나는 덜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마 랸스까에게 냉담하게 대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미인과 스스 럼 없이 대화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와 대 화할 때처럼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 때문에 불편할 일은 없 을 것 같았다. 또한 잘만 하면……. 무정은 주스 잔을 내려놓으면서 활짝 웃어 보였다. "예, 알았어요. 제가 너무 실례를 했던 것 같습니다." 무정의 갑작스런 변화에 마랸스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오므렸다. "아, 그러니까 제 말은……제가 너무……이곳의 규정에 얽 매여 있었던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흐흠, 처음엔 그럴 수도 있어요." 마랸스까는 만족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무정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준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정의 생각은 다른 쪽으로 흐르 고 있었다. 이 여자를 잘만 이용하면……. 그것이 무정의 생각이었다. 우선 이 여자를 사귀어 두어서 나쁠 것은 없는 것 같았다. 또한 나미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매달리는 이 여자에게서는 뭔가 얻는 것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혹시 연구실과 관련된 어떤 정보들을 ……, 혹은 무정이 시키는 일이라면 규정에 어긋나는 일일지 라도 은밀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 고 마랸스까의 또 하나의 이용가치는……. 소장이나 슈타이너 상사처럼 행동에 장애가 되는 사람들로 부터 감시의 눈길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참, 여기서 얼마나 지냈죠?" 무정은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듯 넌지시 물었다. 이미 그녀에 대한 정보를 다 알고 있음에도 그 부분은 모르 는 척 하면서 질문했다. 그것은 마랸스까를 유도심문하기 위 해서는 매우 중요한 계략이었다. 전에 슈타이너 상사나 소장 과의 대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도심문. 우회전술……. "저는……음, 5월 9일에 왔으니까, 이제 5개월이 좀 넘었 네요." "이런 곳에서 계속 지내다 보면 답답하지 않아요?" 무정은 마랸스까를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몰고 갔다.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참아야죠." "건강은 괜찮고요?" 무정은 두 주먹을 쥐고 어깨에 힘을 주어 과장된 몸짓을 해 보이면서 물었다. 그것은 이 휴게실에도 설치되어 있는 감시장비들을 의식한 것이었다. 자신의 질문이 단지 의례적 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하나의 눈가림이었다. "괜찮아요. 필요하면 운동도 할 수 있고, 항상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까요." 마랸스까는 십대 소녀처럼 순진하게 웃었다. 어느새 그녀 의 표정에는 언제나 나타나 있던 요염한 분위기가 사라져 있 었다. "오히려 요즘은 체중이 더 늘었더라고요. 그렇다고 뚱뚱해 진 건 아니에요." 마랸스까는 즐거운 듯이 재잘거렸다. 그녀는 무정의 눈이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하, 실은 허리둘레가 조금 는 것 같기도 해요." 쿵! 무정의 머리에 충격이 전해져 왔다. 마랸스까 자신으로서 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이 무정에게는 어떤 의미를 부 여하고 있었다. 허리둘레. 무정은 며칠 전에 보았던 여자들의 건강기록을 떠올렸다. 마랸스까까지 포함된 B 그룹, 그리고 D 그룹의 여자들은 지 난 한 달 사이에 대부분 체중이 늘어나 있었다. 아마 무정이 처음 관찰하기 전의 기록과 비교하면 더욱 많이 늘어나 있을 것이다. 한 달 사이에 1킬로그램이 늘었으니 그보다 더 전과 비교한다면, 한 2킬로그램? 그 늘어난 부분은 바로……. "살을 좀 뺄까?" 마랸스까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늘어난 부분은 바로……허리! 즉, 배 부분에 체중의 증가 를 가져온 어떤 요인이 있었던 것이다. "대위님이 보기엔 어때요?" 다시 세련된 눈빛으로 돌아간 마랸스까가 웃음 지은 얼굴 로 물었다. "보기에 좋은데요, 뭐. 그냥 놔두세요." "하지만 두 달 사이에 2킬로그램이 늘었으니, 요즘 비만이 시작되는 것 같기도 하고……." 2킬로그램! "그럴 필요 없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 무정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마랸스까와의 대화에 빨려들 다 보니 큰 실수를 할 뻔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래요. 무의식 중에 그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런 발언은 큰 문제 를 일으킬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랸스까는 그냥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적어도 상황실에서는……아니, 슈타이너 상사의 귀에 들어간다면……. "다른 사람들, 뭐요?" "아,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해서요." 무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둘러댔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만 살찌는 것 같아서요." 살을 빼면 안 되지. 마랸스까의 말을 들으면서 무정은 입술을 적셨다. 지금은 그녀뿐 아니라 같은 그룹의 모든 여자들의 체중이 증가해 있 다. 알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돈루카 때문에. 그렇다면 그것이 정상인 셈이었다, 그 체중이. 거기서 더 체중을 줄이 려 하면 오히려 그것이 부작용이 되는 것이다. "지구에 있을 때는 수영복 입고 해변에 나가면 많은 남자 들이 감탄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죠. 그럼 저는……." 무정의 마음이야 어찌 됐든 기분이 즐거워진 마랸스까는 계속 종알거리고 있었다. 78. 10월 15일 저녁. 상황실. 무정은 먹이를 노리는 표범과 같은 눈빛으로 모니터를 노 려보고 있었다. 슈타이너 상사는 또 연구실 컴퓨터에 접속하고 있었다. 요 즘 들어 연구실 시스템에 대한 슈타이너 상사의 접속회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오늘뿐 아니라 이틀 전에도 그랬었 다. 덕분에 무정은 지난 11일 이후 더 이상 돈루카의 비밀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상사가 당직근무를 하는 날은 아예 포 기해야 했기 때문에 그가 비번인 날만을 골라 이틀에 한 번 씩 침투하려던 무정의 계획에, 그것은 골치 아픈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도대체 슈타이너 상사의 속셈은 무엇일까? 무정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쓴 입맛을 다셨다. 절대로 슈 타이너 상사가 무정과 같은 목적으로 연구실 시스템에 매달 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슈타이너 상사는 뛰어난 경비 견일 따름이지, 도둑고양이는 아닐 테니까. 5년. 어쩌면 누구보다도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근무해왔고 또한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면서도, 그 자신은 전혀 연구소의 내 막을 알 수 없었다는 현실에 의해서 쌓이고 쌓인 호기심의 표출일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슈타이너 상사 정도의 충견이라면 연구소의 내막을 다 알고 있어도 문제가 없을 것 이다. 다만 이렇게 계급이 지배하는 조직의 획일성에 의하여 정말 필요한 슈타이너 상사 같은 인물이 문 밖으로 밀려나 있는 셈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무정도 슈타이너 상사를 신뢰했고 또한 어떤 면에서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슈타이너 상사야말로 무정의 가장 무서운 적이 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무정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는 어쩔 수 없이 상사의 약점을 잡아야 했으며 따라서 이렇 게 계속 덫을 놓고 있는 것이었다. 무정의 눈썹이 움직였다. TT-X01 회선과 슈타이너 상사 숙소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 었다. 무정은 타이머를 살펴보았다. 벌써 세 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시간은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슈타이너 상사의 단말기가 꺼졌다. "자, 좋은 밤 되게." 무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록포드 중위에게 말했다. "좋은 밤 되십시오, 대위님." 록포드 중위가 대꾸했다. 졸고 있던 켈리 중사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 다. 79. 10월 16일. 식당. "쏘냐가 무정 씨 얘길 하더군요." 식사를 하던 중 나미가 갑자기 꺼낸 말은 무정을 깜짝 놀 라게 했다. "쏘냐?" 무정은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그 이름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순간적으로 느끼고 있으면서 도 일부러 의문부호를 띄웠다. "쏘냐 마랸스까 말에요." 다행히 나미의 표정에는 불쾌한 구석이 드러나지 않고 있 었다. "아! 마랸스까 연구원이요?" "그렇게 부르는 사인가요?" 나미는 계속 포크질을 하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물었 다.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하죠?" "뭐, 있잖아요. 쏘냐, 그렇게 말에요." "하하, 내가 쏘냐, 아니 마랸스까와 그렇게 친한 사인가 요?" 무정은 콩닥거리는 가슴에 이마와 뒷덜미가 뻣뻣해지는 느 낌을 받았다. "그건 무정 씨가 더 잘 알겠죠." 나미는 살짝 눈을 흘겼다.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나미 양!" 무정은 스스럼없는 여자친구를 대하듯 장난기를 섞어서 말 했다. "후후, 좀 가까우면 어때서요?" 무정은 나미의 말투에서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 다. 좀 가까우면 어떻냐는 건 또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 건 질투를 하는 건지, 아니면 쏘냐와의 만남을 권장하는 건 지. 부정이야, 아니면 긍정이야? "쏘냐는 좋은 친구죠." 나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요?" 무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의 마 음, 그 변덕……. "그건 왜죠?" "후후, 그런 일이 있어요." 나미는 약간 쑥스러운 웃음을 짓고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런 일이라……. 그런 일……. 그런 일이 무엇인지는 무정으로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었다. 쏘냐가 나미에게 뭔가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것도 여 자가 가장 좋아할 만한 그 무엇. 그 무엇이란 바로……. 미용실 이용권. 후후, 단순하긴. 무정은 속으로 웃었다. 정말 여자들은 단순해. 미와 관계 되는 것이라면 그저…….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 전적으로 전해오는, 여자들의 미에 집착하는 정도에 관한 이 야기……. <여자들은 어떤 일로 의식을 잃었다가도 시간이 흘러 깨어 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거울을 보는 것이다.> 미에 대한 본능. 혹은 원초적인 욕구. 쏘냐는 바로 그것을 이용한 것이었다. 쏘냐는 나미에게 미 용실 이용권을 넘김으로써 무정과 만날 시간을 벌었을 뿐만 아니라 나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 면, 쏘냐가 나미를 배척하면서 무정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나미와도 친해진 것이라면, 구태여 무정은 나미 앞에서 쏘냐 를 외면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쏘냐는 정말 좋은 친구 같아요. 무정 씨는 어떻게 생각해 요?" 정말 너무나 단순하구나. 무정은 마음 속에서 흐뭇한 감정을 만끽하고 나서 대꾸했 다. "좋은 여자 같아요. 솔직담백해요." "맞아요. 정말 좋은 친구에요. 여기 와서 처음으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아요." 그 하얀 얼굴에 흥분에 가까운 열의를 띄우면서 종알거리 는 나미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혹시나 그 말이 내 심리를 유도해 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무정은 그 자신이 항상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우선 의구심부터 띄우 고 있었다. 정말 나미는 쏘냐를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것일 까? "나보다 더 좋아요?" 문득 나미의 눈길을 의식한 무정은 얼른 방패를 앞세워 둘 러댔다. 쏘냐에 대한 얘기에서 자신이 지나치게 깊이 생각한 다면 나미가 의심할 것이므로. 또 그것은 무정이 언제나 써 먹던 유도심문이기도 했다. "훗, 무슨 얘길 하자는 거에요?" 나미가 어색한 웃음을 띄웠다. "내 말은, 나미 씨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아니 이 우주에서, 나 밖에 없다는 거죠." 입에 발린 듯이 어색한 그 말을 오랜만에 써먹은 무정은 자기 스스로 쑥스러운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집어치워요." 나미가 다시 눈을 흘겼다. 그러나 싫은 표정 같지는 않았 다. "그 말은 너무 통속적이에요." 통속적이라……, 그래, 통속적이지. 무정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꼭 다물었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어. 남녀관계에 있어서 가장 뻔뻔스러운 거짓말은, 죽을 때까지 너를 사랑한다는 거야. 그리고 아무리 들어도 지겹지 않은 말도 그것이지. 그건 바로……. 널 사랑해. 80. 10월 17일 저녁. 상황실. 무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모니터에 나타난 시간은 19시 5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는 지금까지 몇 시간 동안 슈타이너 상사를 감시하던 중이었 다. 덕분에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었다. 식사시간이 길 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나미를 안 만나려고 다른 때보다 30분이나 일찍 식당에 가서 설쳤다. 슈타이너 상사는 아침에 퇴근한 후 잠도 자지 않고 계속 컴퓨터에 접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6시 42분부터 연구실 시스템에 접속하고 있었다. 이제는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있 었다. 슈타이너 상사가 연구실 비밀번호를 캐내는 중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벌써 꽤나 많은 시간동안을 할애했다면 분명 히 그 암호를 캐냈으리라. 다른 사람도 아닌 슈타이너 상사 라면. 그렇다면 이미 슈타이너 상사도 연구원 자료와 돈루카 의 비밀에 어느 정도 접근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무정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사는 이 미 이곳에 5년간을 근무했으므로 보다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것이고 또한 그의 육감은 매우 뛰어나니까. 과연 상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그러한 궁금증이 떠오르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 갑자기 상사가 그토록 연구실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호기심? 권태로부터의 도 피? 혹은, 혹은……만일의 경우이지만 혹은 상사도 어떤 목 적을 가지고 이곳에 침투한 것은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완전히 신뢰하고 있던 경비견 혹은 사냥개인 슈타이너 상사. 그가 이곳에 오 랜 세월 근무를 해온 것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닐까? 일 부러 많은 첩자들을 잡아냄으로써 자신만의 위치를 확립해가 며 꾸준히 연구소의 기밀을 캐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이 번에 우연히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TT-X01 회선의 존 재를 알고 나서 접근을 시도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만약 슈타이너 상사도 무정 자신처럼 어떤 목적 을 가지고 침투를 한 것이라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 그와 손 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일까? 만약 슈타이너 상사와 함께 연구 소의 기밀을 캐고 든다면 아마 훨씬 쉽게 그 진상에 접근할 것이다. 아니, 적어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그 동안 상사 때문에 늦춰진 시간이 실제 접속시간의 수십 배는 될 테니까. 물론 상사에게 제안을 할 때는 슬쩍 운을 띄워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제의는 서로 간에 꺼리게 될 테니까. 하지만 무작정 상사와 타협을 할 수는 없었다. 상사의 심 중을 모르고 함부로 접근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일이었다. 반대로 무정을 끌어들이기 위한 덫일 수도 있으니 까. 하지만 정말로 상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침투한 것이라 면?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슈타이너 상사는 무정의 경 우처럼 돈 루카에 어떤 의혹을 품고 들어온 것은 절대 아니 다. 이미 그는 연구소 설립 당시부터 있었으니까. 따라서 개 인적인 목적을 가지고 침투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상사는 이미 연구소 설립 전부터 어느 정도의 정보를 입수한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서 처음부터 이곳에 잠입해서 때를 기 다리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는 과연 누구일 까? 혹시……. 만약에 슈타이너 상사가 <아까쓰끼> 집단이나 <유니크라이 스트>의 일원이라면? 믿어지지는 않는 일이지만 그런 가능성 은 충분했다. 어쩌면 아까쓰끼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상사 는 설립 초기부터 침투해서 신뢰감을 높이기 위해서 첩자들 을 잡아내는 것일 수도 있다. 상사의 육감이 남달리 뛰어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까쓰끼 첩자가 올 것을 미리 알고 기 다리고 있던 것일 수도 있다. 그 첩자들은 슈타이너 상사가 뒤를 봐줄 것이라는 말에 속아서 들어왔을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들어왔을 수도 있다. 그들은 죽음 을 두려워하지 않는 종교집단이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 첩 자들은 그들의 동료, 즉 슈타이너 상사가 이미 침투해 있다 는 것조차 전혀 모르고 침투했을 수 있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일까?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단지 그 모든 것 들이 추측에 불과했다. 그러나 슈타이너 상사의 육감이 너무 뛰어나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웠다. 어떻게 아무도 모르는 첩 자들을 그 하나만이 그렇게 족집게처럼 끄집어낼 수 있단 말 인가? 그러한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적어도 무정으로서는. "이제 그만 가보겠네." 무정은 슈타이너 상사의 접속이 끊어진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당직자들에게 한 마디 하고 출구를 향 했다. "잘 가십시오." 록포드 중위와 켈리 중사가 동시에 인사를 했다. 무정은 그들에게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문을 나섰 다. 81. 숙소. <열람시 주의사항> 모처럼 보는 화면이 나타났다. 벌써 며칠 동안 슈타이너 상사 때문에 이 상태에서 더 이 상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상사가 낮 동안 잠을 안 잤으므로 이제는 분명 잠자리에 들었으리라 생각하고 마음 놓고 연구실 시스템에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제복을 벗지 도 않은 채, 매우 다급한 마음으로. 이제는 본격적으로 돈 루카의 비밀에 접근할 단계였다. 무 정은 그 화면을 넘겼다. 다음 화면이 나타났다. ┌─────┐ │ 돈 루카 │ └─────┘ 개요 진행방식 문제발생 현재 상황 무정은 약간 실망하는 마음을 금치 못했다. 모든 아이콘의 명칭은 애매한 표현으로만 나타나 있었다. 직접 들어가서 내용을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무정은 성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하나씩 차근차근 살피기로 했다. 자꾸만 가슴 한 구석에서 독촉해대는 그 충동을 억누 르고서. 그는 <개요>를 선택하자 화면 아래쪽에 질문 메시지가 나 타났다. <전체 / 간략> 무정은 전체를 선택했다. 대충 훑어서는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화면이 바뀌면서 본문내용이 나타났다. ┌─────┐ │ 돈 루카 │ └─────┘ 닥음 객른 전읾욕 염엑윽 해랍 식:몬학믹옥 듬긱릭. 열１직입돋국９국윅 속２열월룩늘년방획칵 엑 ３ 샅 곡 듬쵠윅윽쵠익할갇죽곡 북알직곶젝듬복휙돛 곽군관객 ４알의척엉８복선읍닥착댁샅 . 챈엑얻 직 석긋 국획 되 . . . 왜 해설자가 설명하지 않고 글로 했지? 무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실망스러운 것은 그뿐이 아 니었다. 그 글들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한글로 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전혀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무정은 번역 프로그램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서 영 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일어나 러시아어 등을 선택해도 같았다. 문자는 분명히 해당 나라의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 배열이 엉망이었다. 혹시? 무정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글의 내용을 암호화시켜 버린 것이다. 그 암호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어처럼 특정기호로 바꾼 것 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 글들은 각 나라의 말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것들이니까. 따라서 이것은 문자의 코드 자체를 일련 된 규칙에 따라 바꾸었거나 순서를 바꾸었을 수도 있었다. 또한 순서배열을 바꾸었다면 글 전체에 대해 그렇게 했을 수 도 있고 아니면 한 줄 내에서 순서를 바꾸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두 가지 방법이 다 사용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문자 사이의 공백이 일정하지 않거나 한 단어가 너무 긴 것은 순서를 바꾸었다는 뜻이고, 사용하지 않는 이 상한 문자들이 많다는 것은 문자 자체까지도 코드 값을 변경 시켰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글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자식들, 철저하군!" 무정은 입 속에서 욕설을 내뱉으면서 그 화면에서 빠져 나 왔다. 다시 메뉴가 나타나자 그는 <진행방식>이라는 아이콘 을 선택했다.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 항목은 열람불가입니다.> 이런! 무정은 중얼거리면서 <문제발생> 아이콘을 선택했다. <이 항목은 열람불가입니다.> 제기랄! 모든 아이콘들을 하나하나 짚어갔지만 아무것도 개방할 수 가 없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히 열람을 위해 만들어둔 화면이라면 들어가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 다고 비밀번호를 묻는 것도 아니었다. 뭔가 다른 것이 있었 다. 분명히 다른 것이 있었다. 뭔가. 그리고 그 비밀은 암호 화되어 있는 <개요>의 내용에 들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무정은 다시 개요 화면을 올린 후 그것을 안보국 컴퓨터에 있는 그의 영역에 저장시켰다. 혹시 누군가가 볼 일도 없겠 지만 설사 본다 해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그 내용은 암호 화되어 있으니까. 그렇다면? 문득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슈타이너 상사. 슈타이너 상사도 그 문제로 더 이상의 접근을 할 수 없었 을 것이다. 그러기에 퇴근 후에 오랜 시간 동안 컴퓨터를 사 용하면서도 연구실에 접속하는 시간이 비교적 적은 것인지도 모른다. 잘만 하면 무정이 더 빠를 수도 있었다. 슈타이너 상사보다 빨리 암호화된 문서를 풀어낸다면 먼저 진실에 접 근할 수 있으리라. 무정은 연구실 시스템과의 접속을 끊고 그의 영역에 저장 된 파일 내용을 풀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현재 안보국 시스템에는 그러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암호해독 프로그램이 없다. 하 지만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는 이곳에서는 오히려 그 것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이곳은 직접 침투하기 전에 는 어떠한 시스템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곳에는 암호해독 프로그램이 필요 없을 것이고 오히려 침투한 첩자 에게 도움을 주는 경우가 되어버릴 것이다. 단, 그 프로그램 이 설치되어 있는 시스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 은 바로……. 연구실 컴퓨터. 아마도 연구실 시스템에는 암호해독 프로그램이 있을 것이 다. 당연한 일이지만 암호화 프로그램이 있다면 해독 프로그 램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까지 찾기 위해 연구실 시스 템을 뒤집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것은 최후에 할 일이었다. 우선 무정은 안보국 시스템 내에서 간단한 암호해독 프로그 램을 만들어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는 눈 앞에 먹을 것을 본 며칠 굶은 개와 같은 심정으로 허겁지겁 순서 재배열 프로그 램의 논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순서 재배열의 가장 단순한 방식은 각 줄에 있는 문자의 순서를 바꾸어놓는 것으로,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일정한 규 칙을 따르는 것이었다. 우선 일정한 수를 정해서 그 수의 단 위만큼 건너뛰면서 글자의 순서를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즉, 5 단위로 수를 바꾸어서 재배열 할 경우 원본의 1번째가 변경본의 1이 된다면, 원본의 6번째 것이 변경본의 2번째로 들어가고, 11번이 3번으로, 그렇게 계속되다가 그 줄의 끝까 지 가면 다시 원본의 2, 7, 12 순으로 변경본의 뒤에 계속 이어 들어가는 것이다. 혹은 원본과 변경본을 반대로 할 수 도 있다. 원 본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변경본 : 1 6 11 2 7 12 3 8 13 4 9 14 5 10 15 따라서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재배열 프로그램을 만들어 다시 그 수를 대입시켜 역으로 배열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수가 다르면 안 되는 것이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무정은 완성시킨 프로그램이 제 기능 을 발휘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간단한 파일 하나를 만들어 테 스트를 해보기로 했다. 그는 먼저 정상적인 문서를 변경시키 는 일을 시도하기 위해 문자를 입력시켰다. 20개의 문자가 입력되자 재배열 단위를 4로 입력시켜 그 순서를 바꿔보았다. 첫 번째에는 a가, 그리고 다섯 번째에 있던 e가 두 번째 로, 아홉 번째인 i가 세 번째로, 그리고 두 번째에 있던 b는 여섯 번째에 가 있었다. "좋았어!" 나지막하게 외치고 난 무정은 다시 원위치를 시켰다. 간단 하긴 했지만 프로그램은 성공이었다. 무정은 더 이상 살펴볼 필요도 없다는 심정으로 즉시 연구실에서 전송 받은 자료를 그 프로그램에 입력시켰다. 화면에 문서내용 나타났다. ┌─────┐ │ 돈 루카 │ └─────┘ 닥음 객른 전읾욕 염엑윽 해랍 식:몬학믹옥 듬긱릭. 열１직입돋국９국윅 속２열월룩늘년방획칵 엑 ３ 샅 곡 듬쵠윅윽쵠익할갇죽곡 뷰알직곶젝듬복휙돛 곽군관객 ４알의척엉８복선읍닥착댁샅 . 챈엑얻 직 석긋 국획 되 . . 단위를 얼마로 줘야 하지? 무정은 흥분으로 인하여 거칠어진 호흡과 두근거리는 가슴 을 진정시키면서 화면을 노려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일 단 5를 선택하기로 했다. 공백문자를 포함한 한 줄의 글자 수가 대충 30개 정도씩 되니까 그것이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차분한 마음으로 숫자를 입력시켰다. 금세 화 면에 재배열된 문서가 나타났다. ┌─────┐ │ 돈 루카 │ └─────┘ 른염 옥닥 엑식 음전윽:듬 앎 몬긱 욕해학릭객 랍믹. 국２방 열９열획 １국월칵３직윅룩 입 늦엑샅돋속년 곡윽곡곶 쵠 젝곽 익 듬군듬할북복관쵠갇알휙객윅죽직돛 ４복샅얻 알선 국의읍.직획척닥 엉착챈석독８댁엑긋 . . 이건 아냐. 무정은 머리를 저었다. 도무지 이건 아니다. 언뜻 보기에 도 불규칙한 문자들과 무분별한 숫자들의 나열, 또한 이합집 산이매우 심한 단어들과 띄어쓰기 공백문자, 이건 아무리 봐도 답이 아니었다. 무정은 4단위씩 끊도록 선택을 했다. 곧 화면에 글이 나타 났다. ┌─────┐ │ 돈 루카 │ └─────┘ 전해옥닥읾랍 음욕 듬 식긱 염:릭객엑몬.른윽학 믹 국년 열윅방３１속획직２칵샅입열 돋월엑 국룩 ９늘 곡익알 할직곽 갇곶군듬죽젝관쵠곡듬객윅 복 윽 휙 쵠북돛 ４읍챈 알닥엑국의착억획척댁 되엉샅직 ８ 복.석 선 긋 . . "이것도 아니군!" 무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가슴을 쓸어안으며 다음 숫자를 떠올려 보았다. 차근차근 하다 보면 곧 결과가 나올 것이었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흥분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웠다. 지난 두 달 이상을 여기에 모든 정열을 쏟아온 그였다. 그리 고 지금 그의 앞에는 이 연구소의 모든 비밀을 알려줄지도 모르는 자료가 놓여있었다. 그는 6을 입력시켰다. ┌─────┐ │ 돈 루카 │ └─────┘ 객욕 : 닥른 해몬듬음 염랍학긱 전엑 믹릭 읾윽식옥. 돋 룩칵 열국속늘 ３１９２년엑 직국열방 샅입윅월획 곡윅갇북듬곽 욱죽알복군 쵠곡직휙관듬익 곶돛객쵠할 젝 ４８착 직국알복댁챈 획의선샅엑석 척읍 얻긋되엉닥. . . "맞아, 이거야!" 무정은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올렸다. 그리고 남의 집에 들어갔다가 어떤 소리를 들은 도둑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 다. 그는 잠시 긴장했다. 이 방에는 도청장치가 되어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 동안 이곳저곳 뒤져보기는 했지만 혹시 찾 아내지 못한 어느 곳엔가 도청장치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는 다시 확인을 하기 위해서 파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 다. 문자의 배열상태나 숫자가 한 군데로 모여있는 점으로 볼 때 그것은 제대로 정렬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한 가지 남은 일은……. 문자 코드의 변환. 그는 그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업에 몰입했다. 별 문제는 없었다. 파일을 하나하나 읽어서 그것이 기호가 아닌 한글이 나 영문자 또는 숫자일 때만 그 값을 바꾸어주면 될 것이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완성된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 우선 몇 가지 단어를 써서 변환 및 환원시키는 테스트를 해보았다. 그것은 매우 쉽게 끝났다. 한글 코드는 모두 욀 수가 없으므로 그의 성을 영어로 입력시켰다. 그리고 코드 값을 1씩 증가시키자 다른 문자들의 배열이 나타났다. 그는 다시 변환된 단어에 코드 값을 1씩 빼도록 지시했다. 그의 성이 다시 나타났다. "좋았어!" 그는 낮은 목소리로 짧게 외치고는 프로그램에 연구실 파 일을 입력시켰다. 이제 남은 일은 코드 값을 얼마로 변경시 켜야 제대로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파일이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 첫 번째 줄의 첫 단어는 <개요>라고 쓰여 있 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네 자리로 되어있는 숫자부분이었다. 3192. 그것은 연도를 나타낼 확률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3192년 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므로 거기서 1을 빼내면 2081년이 된 다. "바로 그거야!" 무정은 나지막하게 속삭이고 나서 -1을 입력시켰다. 곧 화 면에는 매우 익숙한 글자들의 배열이 나타났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한글인가! 그에게는 이상한 문자들만 바라보 며 지낸 몇 시간이 꽤나 오랜 세월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 것은 어린 시절 컴퓨터를 통해 한글을 처음 익히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면서 문서를 읽기 시 작했다. ┌─────┐ │ 돈 루카 │ └─────┘ 개요 : 다른 항목들을 열람하기 전에 미리 읽으시오. 돈 루카 연구소는 ２０８１년에 지구연방 상임위원회 고위간부들과 우주안보국 최고지휘관들이 공동개최한 제 ３７차 지구안보대책 회의석상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이것은 지구전체가 하나의 연방으로 결성된 이후 지난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신설되는 소수 좌익 테러집단들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날로 고도화되는 그 과학기술수준 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시작된 것이다. 특히 <아까쓰끼> 테러집단은……. 삐리릭……삐리릭. 모니터에서 경보가 울렸다. 무정은 불에 덴 사람처럼 깜짝 놀라면서 옆의 모니터를 바 라보았다. 슈타이너 상사의 단말기가 막 깨어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무정은 연구실에서 전송 받은 파일을 허겁지겁 지우고 나 서 단말기를 꺼버렸다. 후우. 누적되어 있던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난 그는 이를 악 물었다. 빌어먹을 슈타이너 상사. 잠도 안 자고 뭐 하는 거 지? 그는 벽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넘어 있었 다. 슈타이너 상사는 불과 네 시간 정도를 자고 다시 깨어난 것이다. 어쩌면 잠을 잔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전날이 당직 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몇 시간 동안 잠을 자다가 깨 어난 것이 분명했다. 무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철망 너머에 있는 먹이를 본 개처 럼 실내를 왔다갔다 하다가 문득 뭔가를 발견했다. 그의 모 니터 하나가 켜져 있었다. "아차!" 그는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황급하게 달려가 단말기를 껐 다. 너무 깊게 몰입하고 당황했던 나머지 슈타이너 상사를 감시하기 위해 켜놓은 단말기를 끄지 않았던 것이다. "제기랄!" 무정은 허공에 주먹을 휘저었다. 숙소에서 단말기를 사용 한다는 흔적을 가능하면 슈타이너 상사가 눈치채지 않도록 애써 왔는데 하찮은 실수로 들키고 만 것이다. 제기랄. 그는 투덜거리면서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실로 들어섰다. 이제는 자야지. 별 할 일도 없으니까. 슈타이너 상사가 깨어 나면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모든 행동에 커다란 제약이 되는 것이었다. 상사가 시스템을 통해서 무엇을 캐고 다니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정은 샤워 레버를 돌렸다. 82. 10월 18일 저녁. 체육관 샤워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무정의 머리에 우글거리고 있던 거품들이 비명소리도 지르 지 못한 채 씻겨 내려갔다. 검은 머릿결들을 따라 흘러내린 물이 얼굴과 목덜미를 타고 온몸으로 흘러내리면서 비누거품 을 지워나갔다. 얼굴에 쏟아져 내리는 거센 샤워를 이겨내기 위해 입을 벌려가면서 호흡을 조절하던 무정은 갑자기 킥킥 거리며 웃었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 갔다. 왠지 샤워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이 마치 소변을 연 상케 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는 숨가쁘게 얼굴에 쏟아져 내리는 물을 두 손으로 닦아 내면서 생각했다. 전에도 매일 샤워를 하다시피 했지만 한 번도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문득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주 주변을 두 리번거리는 버릇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그는 모든 곳에 출입할 때 도청장치나 CCTV 카 메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심지어는 화장실이나 샤워 실에 출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감시 장치에 대해서 자신이 떳떳한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만 현재 의 그의 상황은 분명히 그렇지 못했다. 사방이 꽉 막힌 타일로 된 샤워실에서도 그는 감시 카메라 를 찾으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만약 그 안에 카메라가 있다 면 그것은…… 샤워기에 장치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 후 그는 무의식 중에 샤워기를 자주 힐 끔거리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은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샤워, 소변, 분수대에 있는 꼬마 조각상의 고추……. "하하하!" 기어코 그는 입을 벌려 웃고야 말았다. 입 안으로 물이 쏟 아져 들어왔다. 캑캑거리며 물을 뱉어내면서도 그는 킥킥거 렸다. 샤워, 분수대, 조각상, 꼬마 아이, 고추……. 그렇다 면, 물줄기가 소변이라면 샤워실은 화장실 변기란 말인가? 그럼 변기 속에 든 나는 뭐지? 변기 속에 사는 생물? 변기 속에서 고추를 지켜보는 벌레? 하하하, 이건 정말 웃기는 일 이었다. 벌레. 소변, 고추, 변기……. 변기……. 변기! 문득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맞아, 변기!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연구원들의 개인 건강기록을 보 면 어딘가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정기 건강진단이 한 달에 한 번인데 비해 연구소 측은 연구원들의 건강상태, 어쩌면 자궁의 상태에 대해 그보다 훨씬 더 잘 알 고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만약 돈루카라는 것이 한 분기, 즉 3개월 동안 존재한다면 그것에 대한 검사는 그 기간동안 불 과 세 번 있을 뿐이라는 것인데, 무정이 생각하기에도 그 점 이 의심스러웠었다. 그토록 돈루카가 중요한 것이라면, 경우 에 따라서는 이 연구소를 소멸시켜야 할 정도로 중대한 가치 를 지닌 것이라면, 절대로 그들이 불과 한 달에 한 번만 연 구원들의 몸을 검진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혹은 그 이상 자주 그들의 건강상태를 검사해야 했을 것이 다. 그렇다면, 정기진단이 한 달에 한 번인 상태에서 연구원 들의 자궁내 상태를 매일 확인하려면? 그 답은 여기에 있었다. 화장실. 많은 천재들이 화장실이 나 목욕탕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어냈다고 했지만 그것 은 무정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곳은 샤워실이었지만 조금 전의 무정에게는 변기 속이었다. 무정은 변기 속의 벌레였 다. 그리고 벌레는 알아냈다. 변기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 고 있는지. 그 변기 속에서, 아니 각 연구원들 숙소의 변기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 아마 그들의 변기는 연구소의 핵심시 설을 거쳐가는 것이 분명했다. 연구원들이 배출하는 소변은 각 방별로 구분된 배관을 따라 연구실로 통할 것이다. 그리 고 취해진 소변 샘플들에 의해서 그들의 건강, 아니 보다 실 질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자궁에 대한 정보를 매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맙소사, 이런! 무정은 샤워의 꼭지를 잠갔다. 이럴 수가. 그는 머리를 흔 들어서 물을 튀겨냈다. 입 안으로 흘러드는 물기를 뱉어내면 서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더러운 것들! 정말 더러운 것 들! 구역질나는 것들……. 무정이 건조실에 들어서자 부드럽고 따뜻한 공기가 쏟아져 나와 기분 좋게 온몸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그는 몸의 물기 가 채 마르기도 전에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섰다. 지금은 더 이상 샤워실 안에 있고 싶지 않았다. 전신에 축축하게 젖 어든 땀을 깨끗이 씻어내고도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무정은 로커를 열고 옷을 꺼냈다. 밑에 있는 운동복 로커 에서는 쉭쉭거리는 증기세탁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83. 체육관 휴게소. 무정이 탈의장 밖으로 나서자 록포드 중위가 테이블에 앉 아 음료수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나왔군?" 무정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물었다. "제가 일찍 나온 게 아니라 대위님이 오래 걸린 겁니다." "그런가?" 무정은 긴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하듯 넘기면서 중위 앞에 마주앉았다. "뭘로 드시겠습니까?" 중위가 음료수 컵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난 코크." "코크 하나." 록포드 중위가 탁자의 가운데쯤 있는 버튼을 누르면서 말 하자 한복판이 열리면서음료수 컵이 나왔다. "대위님은 생각보다 지구력이 좋더군요. 오히려 제가 더 지쳤습니다." "하하, 그런가?" 건성으로 대꾸하는 무정은 아직도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저도 테니스라면 꽤 한다는 편인데 대위님에게는 질렸습 니다." "다 근무환경 때문이지." "예?" 중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격일제 근무 말야. 원래 인간은 24시간 사이클에서 수백 만 년을 진화해왔는데 현대사회에서는 꼭 그렇게 자연에 맞 춰서 생활할 수 없다는 게 현실이지. 그게 바로 현대병 아닌 가?" "그건 그렇죠." 록포드 중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켈리 중사가 가장 건강에 문제가 없을 것 같더군." "그건 왜죠?" "잘 먹고 잘 자니까. 그는 틈만 나면 졸잖나?" 무정은 말하고 나서 크게 웃었다. 록포드 중위도 따라 웃 었다. 무정이 덧붙였다. "하지만 그게 잘 하는 거지. 별 일 없으면 그냥 자는 거 야. 우리 연구소는 우주공간에 격리되어 있어서 별 일은 없 으니까 말야." "가끔 스파이 때문에 말썽 생기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죠." "그렇지. 그…… 스파이들. 하지만 가끔 그런 일조차 없으 면 무슨 재미로 지내겠나? 문제는……."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무정은 오늘 록포드 중위와 처음으로 테니스를 친 것이었다. 참으로 오랜 만에, 슈타이너 상사 감시문제로 등한시했던 테니스를 친 것 이었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데 상황실이나 식당은 적합하지 가 않았다. 무정이 선택한 곳은 이렇게 사람이 적고 감시장 치들도 적은 곳이었다. "문제는 슈타이너 상사가 지나치게 그런 것에 집착한다는 거지. 그는 너무 몸을 혹사하고 있어. 당직인 날은 밤새 한 시도 눈을 붙이지 않지. 그렇다고 비번인 날 쉬는가 하면 그 렇지도 않아. 우연히 알게 된 일이지만 상사는 밤을 새고 퇴 근해서도 단말기 앞에 매달려있지. 도무지 잠을 자지 않아. 뭔가에 너무 집착해있는 것 같아. 항상 첩자가 주변에 맴돌 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고나 할까?" 무정은 말을 끊고 록포드 중위의 표정을 살폈다. 중위는 컵을 들여다보면서 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무정은 몸을 앞으로 바짝 내밀었다. "자네가 당직인 날은 가끔 슈타이너 상사 방의 단말기를 훑어보고 좀 쉴 수 있도록 충고를 해주게. 우연히 발견한 척 하고 말야. 자주 그러다 보면 상사도 간섭을 받는 게 귀찮아 져서 단말기를 멀리 하게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 리고 내가 그랬다는 얘기는 하지 말고." 록포드 중위는 컵을 향해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거렸 다. "자칫하면 상사가 지나친 강박관념으로 몸에 병이 나지 않 으면 정신이 이상해질까봐 내가 두렵더군. 특히 지난번 아까 즈끼의 침공과 후루야마 사건 이후 말야." "하긴……." 록포드 중위는 무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가 보기에도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 들 어 퇴근 후 별로 잠이 없는 것 같더군요." "음, 자네도 이미 알고 있군." 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록포드 중위도 따라서 끄덕거렸 다. 84. 10월 19일 저녁. 체육관 휴게실. 무정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자꾸 말을 해줘야 해. 그는 너무 지쳐있어."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마이어 중위는 끄덕거렸다. 무정은 이곳에서 마이어 중위와 테니스 경기를 끝내고 샤 워를 한 후 그를 구슬리고 있었다. 전날 록포드 중위에게 그 랬듯이. "가능하면 밤에는 상사가 쉴 수 있도록 자꾸 유도해 보게. 켈리 중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졸고 있지. 그런데 슈 타이너 상사는 조는 건 고사하고 항상 단말기에 매달려있어. 물론 그렇게 한 덕분에 스파이들을 잡아낸 것은 인정하지만 너무 자신을 혹사하는 것 같아. 상사가 꼭 그렇게 하지 않아 도 온갖 감시 및 경보장치가 24시간 잘 가동되고 있는데도 말야." "맞습니다. 대위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우리도 가서 쉬자고. 상사만 걱정할 게 아니라 우선 우리 몸부터 신경 써야지." 무정은 뒤따라 일어선 마이어 중위의 어깨를 툭 쳤다. 마 이어 중위가 웃음을 지었다. 85. 10월 21일 낮. 식당. "하하, 머리를 검게 염색해보고 싶다고요?" 무정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손바닥에 약간의 음식찌꺼기가 튀었다. "왜요? 그게 어때서요?" 쏘냐 마랸스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어울릴 것 같은데요? 그 전형적인 서양인 분위기에 검 은 머리를 하면……." "왜요, 천만에!"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나미가 끼여들었다. "서양인 중에서도 검은 머리를 하면 의외로 동양인보다 더 신비스런 사람이 있어요. 불균형할 것 같은 것이 묘한 조화 를 이뤘기 때문이죠. 물론 파란 눈을 가진 오각형의 얼굴은 좀 이상하지만 쏘냐처럼 갸름한 얼굴형이라면 괜찮을 거에 요." "고마워요, 나미." 쏘냐가 그 요염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을 듯 하면서도 잘 조화가 되는 애교 어린 웃음을 지었다. "뭘요, 후후." "하지만 난 상상이 안 가죠. 거꾸로 말해서 만약 나미 씨 얼굴에 금발을 씌워놓았다. 그게 어디 상상이나……." 약간 과장된 목소리와 표정으로 떠들어대던 무정은 말을 끊었다. 나미가 엄격한 선생님 같은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 다. 잠시 주저하던 무정은 변명하는 듯한 투로 말을 이었다. "사실…… 내 말은 그다지 틀리지……." "왜 그래요, 대위님? 나미가 어때서요?" 쏘냐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제 말은 나미 씨가 예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누가 뭐래도 머리 빛깔은……." "정말 구식이군요, 박무정 대위님?" 나미가 포크로 식기를 살짝 내리쳤다. 가벼운 금속음이 들 렸다. "맞아요, 대위님은 생각보다 보수적이네요? 요즘 세상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쏘냐가 덧붙여 반박을 했다. "글쎄요.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걸까요?" 무정은 약간 멍청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그들 쪽 을 향하고 있는 감시 카메라를 힐끗 훑었다. 요즘은 대화에 쏘냐가 참여하면서 더욱 재미 있는 양상으로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무정을 감시하고 있다면 아마도 헛다리를 짚으면서 애쓰는 꼴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되어갈 것 같았다. 무정은쏘냐의 등장으로 그의 속셈을 눈가림할 수 있는 몇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누가 볼 때 무정은 그저 밝고 건강한 생각을 가진 사 람으로만 보일 것이다. 또한 세 사람의 인간관계에만 모든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 관계가 지나치게 친밀하 게 흐를 경우 이성적 접촉이 일어날 것을 우려할 것이다. 결 국 무정이 돈 루카의 내막을 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에 가려지고 무정은 보다 안전하 게 활동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봐요, 박무정 대위님, 자꾸 그렇게 나오면 앞으로 함께 식사하지 않을 거에요." 나미가 으름장을 놓듯이 말했다. 그녀는 무정을 비꼬는 의 미에서 그를 평소처럼 무정 씨라고 부르지 않고 계속 박무정 대위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무정은 능청맞은 표정 으로 맞섰다. "그래요? 그럼 난 마드므와젤 쏘냐와 어울리면 되죠." "후후, 이봐요, 대위님. 과연 쏘냐가 어울려줄까요?" 나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쏘냐에게 고개를 돌렸 다. "왜요? 마드므와젤 쏘냐가 나미 씨와 같은 사람인 줄… …." "같은 사람인데요?" 쏘냐가 웃으면서 무정의 말을 가로막았다. "예?" 무정은 눈을 크게 떴다. "저도 나미랑 같은 생각이에요. 대위님과 안 어울릴 거에 요. 그리고 제발 저를 마드므와젤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저 는 프랑스 사람이 아네요, 대위님." 쏘냐가 장난기 어린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무정은 눈을 크게 뜨고 두 손을 휘저었다. "이런, 낭패를! 아,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전부 취소입니 다. 전부 취소……." 두 여자는 그러한 무정의 행동이 재미있다는 듯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86. 숙소. 밤. 무정은 침대 위에 몸을 던진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쏘냐 마랸스까. 그녀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왜 그래요, 대위님? 나미가 어때서요?" 나미처럼 항상 거리를 두고 정숙하게 행동하는 여자도 매 력적이지만 쏘냐도 나름대로의 짙은 매력이 느껴졌다. "맞아요, 대위님은 생각보다 보수적이네요? 요즘 세상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쏘냐는 항상 뭔가 끈끈한 것이 묻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지금까지 무정이 보아온 다른 여자들 보다도 더욱 그러했다. 만약 여자들과의 사교가 쉬운 지구에 서라면 너무 개방적인 여자보다 나미처럼 정숙한 여자에게서 더 큰 매력을 느끼겠지만 이곳처럼 폐쇄적인 곳에서 오랜 시 간을 지내면서 오히려 쏘냐처럼 깊은 정감을 풍기는 여자가 더 좋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물론 쏘냐는 지구에서 만났 을지라도 푹 빠져들어갈 만큼 관능적이면서도 순진무구한 구 석이 있었지만. "저도 나미랑 같은 생각이에요. 대위님과 안 어울릴 거에 요." 쏘냐. 무정은 마른 침을 꿀떡 삼켰다. 저 순진한 쏘냐는 자신의 몸 속에 들어있는 그 어떤 존재를 알고 있을까?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몰랐던 그 비밀스런 존재 를. 하지만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 걸까? 그것이 자궁 속에 들어있는 게 확실하다면, 만약 그것이 자궁 속에서 자라나 체중을 2킬로그램 이상이나 불려놓고 있는 존재라면……. 그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 이었다. 지금까지 거의 남의 일로만 생각해 오던 것이 점점 자기자신의 것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쏘냐 마랸스까. 이제는 단순히 얼굴을 알고 지내는연구원이 아닌, 보다 친해진 여 자친구의 한 사람으로서, 쏘냐 마랸스까. 그녀의 몸 속에 뭔 가 들어있다. 쏘냐 마랸스까. 그런 쏘냐의 몸 속에, 쏘냐의 자궁 속에, 매우…… 불쾌한…… 어떤 존재가……. 문득 무정은 팔과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더불어 앞으로 나미의 몸 속에도 자리잡게 될 그 존재에 대해……. 무정은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긴 시간을 어둠 속에 깨어 있다가 갑자기 불을 켜자 눈 앞이 부스스하게 느껴졌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안개에 싸인 듯…… 마치 현기증이 이는 것같기도 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난 무정은 바로 단말기 앞으로 걸어 가 스위치를 켰다. 슈타이너 상사고 뭐고 지금은 안중에 없 었다. 쏘냐 마랸스까. 그녀 몸 속에 든 것, 그것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화면에 로고가 나타나고 무정은 터치보드를 조작해서 연구 소 1번 회선이 비활성 상태임을 확인하자 더 주저할 것도 없 이 순식간에 연구소 시스템 안까지 들어갔다. 쏘냐 마랸스 까. 무정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는 몹시 흥분한 상 태였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귓불이 뻣뻣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몸에 열이 나고 있었다. 한선유, 쏘냐 마랸스 까, 그리고 앞으로는…… 정나미. 과거와 현재와 미래. 선 유, 쏘냐, 나미. 그녀들은 그의 눈 앞에 나타난 연구소 로고 가 상징하듯 그들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였다. 돈 루카 메뉴를 선택해서 들어간 무정은 그 돈 루카 윈도 우가 나타나기 무섭게 개요를 선택했다. 며칠 전에 보았던 난잡한 글자로 이루어진 화면이 다시 나타났다. 무정은 그때 만들어두었던 문자순서 재배열 및 문자코드 변환 프로그램을 다시 수행시켰다. 곧 화면에는 잘 정리되고 문자가 해석된 자료가 나타났다. +---------+ | 돈 루카 | +---------+ 개요 : 다른 항목들을 열람하기 전에 미리 읽으시오. 돈 루카 연구소는 ２０８１년에 지구연방 상임위원회 고위간부들과 우주안보국 최고지휘관들이 공동개최한 제 ３７차 지구안보대책 회의석상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이것은 지구전체가 하나의 연방으로 결성된 이후 지난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신설되는 소수 좌익 테러집단들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날로 고도화되는 그 과학기술수준 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시작된 것이다. 특히 <아까즈끼> 테러집단은 세계의 유력한 과학자들을 끌어들여 어떤 면에 있어서는 지구연방 전체의 과학기술 수준을 능가하고 있다. 만약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언젠 가 아까즈끼는 인류에게 있어서 부분적인 위협이 아닌 지 구연방 전체, 그리고 인류전체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따라서 ２０８１년의 회의이후 이른바 <돈 루카> 프로 젝트가 목성궤도상에서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며 ２０８７ 년에는 그 결실을 맺고 토성궤도상에 연구소를 설립했다. 물론 이것은 실제 연구소가 아닌 생산시설이다. <돈 루카> 연구소를 토성궤도상에 설립하게 된 것은 여 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외부 로부터의 보안과 연구원관리 문제였다. 이미 지구상에는 연구원들을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켜서 극비리에 이러한 연구를 진행할 곳이 없으며, 또한 그 책임의식 같은 점에 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돈 루카> 추진 위원회는 지구에서의 거리가 매우 멀다는 것을 비롯한 여 러 가지 불편한 점을 감수하고 돈 루카 연구소를 토성궤 도에 설립하게 된 것이다. 돈 루카 연구소는 ２０８７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２０ ９０년에 완공하고 ２０９１년 ２월 ９일부터 가동에 들 어갔다. 주요기관은 연구실과 안보국 지부가 있으며 기타 각종 설비와 생활환경을 지원하는 부서들이 있지만 이들 모두 는 연구소장의 지휘 하에 두었다. 이들 중, 직접 생산에 관련된 여성연구원들과 여성의무실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 은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구원들은 ３개월마다 선발되며 임기는 １년으로 되어 있다. 또한 연구원들은 근무기간동안 ２개의 <돈루카>를 생산하도록 되어있다. 현재는 매 분기마다 선발되는 연구 원의 수가 ４０명이므로 항상 １６０명의 연구원들이 근 무하고 있다. 그에 따라 돈루카는 년 ３２０개가 생산된 다. 현재로서는 돈 루카를 다른 방법으로 만들 수 없다. 유 전공학이나 생명공학 등 어떠한 방법으로도 돈 루카를 만 들어내지 못했다. 아직 기술이 부족한 상태이다. 인공적 인 시스템 내에서는 돈 루카를 만들 수가 없다. 아직까지 돈 루카는 유기체 내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도 가장 정교하고 가장 뛰어난 유기체에서. 그 유기체는 바로 인 간이다. 돈 루카는 거대한 하나의 인공지능체이다. 이것은 지금 까지 발전시켜온 반도체 부도체 그리고 초전도체의 뒤를 이으면서 앞의 것들을 훨씬 초월하는 새로운 컴퓨터의 핵 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계산속도만을 위한 컴퓨터가 아닌, 말 그대로의 순수 인공지능체이다. 이것 은 프로그래밍이 필요 없는 컴퓨터이다. 필요한 자료를 입력시켜주기만 하면 스스로가 분석하고 결과를 예측하는 시스템이다. 또한 스스로 연구를 해나갈 수도 있는 시스 템이다. 우리는 곧 아인슈타인이나 디랙 또는 박朴을 백 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보다 백 배는 뛰어난 두뇌 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 날이 멀지 않다. 적어도 ２２０ ０년까지는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맙소사. 무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엄청난 일이. 그것은 정말 엄청난 계획이었다. 유기체 로 이루어진 인공지능을 연결시켜 세계의 어느 천재과학자보 다도 뛰어난 두뇌를 탄생시키려는 계획. 어느새 그의 몸은 얼어붙어 있었다. 그의 머리와 함께. 불과 몇 분 전까지 타 오르던 그의 분노와 격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격정, 쏘냐 마랸스까를 위한 그 불길 같던 분노는……. 쏘냐……. 맞아, 쏘냐였어. 쏘냐 때문에 지금 이렇게 급히 들어온 거 였어. 그래, 쏘냐. 그런데 쏘냐는, 쏘냐에게는, 그녀의 몸 속, 그녀…… 그녀…… 자궁 속에는……. 그래, 분명히 자궁 속일 거야. 생산, 생산을 한다고 했지. 그 생산을 어디서 할 까? 유기체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어. 연구원들이, 연구원 들이 직접 생산을 한다고 했는데 왜 연구원들 자신은 모르고 있지? 그것은 바로 연구원들의 몸 속에 있기 때문이야. 연구 원들의 자궁 속에서 생산되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연구원 들이 모를 리가 없지. 그리고 보안시효가 영구라고 했으니 까. 맙소사, 이런! 그럼, 지금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는 여자 들은, 그리고 쏘냐도……. 쏘냐라는 이름 하나로 다시 무정의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 했다. 아니 앞으로는 나미도 그렇게 될 것이다. 두 개의 돈 루카를 생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여자, 다름 아 닌…… 그의 옛 연인, 선유! 이제 모든 그림 맞추기 퍼즐은 점점 그 형태를 드러내면서 최후의 한 조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의심스러 웠던 부분들이 하나 하나 짜 맞춰지는 퍼즐 조각에 의해서 뚜렷한 증거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선유가 던져준 의 문부호로부터 시작되었던 그 일은. 선유. 무정은 이를 악다물었다. 어금니 사이에서 뿌드득거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유, 쏘냐, 그리고 수백의 여 자들……. 그들 모두가 바로 이런 비인간적인 시스템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혹사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가장 추악한 행위를 자행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옛날 마 루따와 같은 일시적인 인간생체실험도 아닌, 끝없이 이어질 인간생체공장인 것이다. 빌어먹을! 인간이 공장이다. 인간이 ……. 그것도 다른 부분도 아닌 성스러운 여자들의 자궁. 더 욱이 순결한 처녀들의 자궁! 돈 루카! 돈 루카는 예수 그리스도인가? 지구역사상 단 한 번, 단 한 번 수태없이 태어난 사람, 위대한 지도자이며 개 혁가. 그런 지도자를 지금 새로이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인 간들이. 그것도 수 천에 달하는 그리스도를. 맙소사! 더러운 자식들……. 너무 흥분한 탓에 놓치고 있던 것이 있었다. 개요 화면 가 장 아래 부분에 몇 줄의 글이 나타나 있었다. 무정은 그 글 들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돈 루카 메뉴 내의 다른 항목에 들어갈 때는 돈 루카 제 목 아이콘을 세 번 연속해서 선택한 후에 해당항목의 아이콘 을 개방하시오.> 그랬군. 무정은 비통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전에 돈 루 카 윈도우 내의 다른 항목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를 알아 차렸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안전장치가 되어있었던 것이었 다. 개요를 읽어야만 알 수 있는 안전장치가 거기……. 갑자기 화면 한쪽에 작은 윈도우가 열렸다. 안보국 컴퓨터 에 연결된 윈도우였다. 그 안에 메시지가 깜빡거리고 있었 다. 순간, 무정의 목덜미에 차가운 살얼음이 흘러내렸다. 긴급연결 요망 발신자 : 슈타이너 상사 연결할까요? 86. 10월 22일 오전. 상황실. 무정은 뭔가를 곰씹는 표정으로 단말기 앞에 앉아있었다. 슈타이너 상사. 지금 그의 등 뒤에 앉아 모니터를 통해 열심히 각 구역의 보안상황을 살피고 있는 슈타이너 상사. 필요 이상으로 임무 에 충실한 독일산 사냥개.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에 도무지 지치거나 실증을 낼 줄 모르는 차가운 기계 같은 인간. 도대 체 그는 어떤 인간인가? 지금 무정은 슈타이너 상사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 니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괜스레 무정 혼자서 신 경과민이 되어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상사도 무정을 상대로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 고 있을 수도 있었다. 다만 그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에 전혀 그 빛이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무정은 혀 끝으로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앞으로 이 일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과연 슈타이너 상사는 어디까 지 알고 있는 것일까? 상사가 연구소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 는 선은 어디까지이며 또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깊이 알고 있을까? 그는 이미 내 꼬리를 잡은 것일 까? 알면서도 보다 확실한 범행현장을 잡으려는 것일까? 어 쩌면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게 함정이라면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단지 상사 한 사람뿐일까? 분명히 다른 요원들은 아직 이 일에 대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혼자만 몰래 진행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소장까지 알고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슈 타이너 상사는 항상 결정적 증거를 확보한 뒤에 누구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스스로 스파이를 잡는 습관이 있었다. 말 그 대로 그는 경비견이면서 사냥개였다. 하지만 정말 상사는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일까? 기회가 났 을 때 나를 덮치려는 것일까? 어쩌면 상관이 간첩죄를 쓰고 잡히는 것은 봐줄 수 없기 때문에 나 스스로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주고 뒤따라와서 숨통을 끊는 것은 아닐까? 후루야마 중위를 잡을 때 그랬듯이? 모든 것이 안개에 가려있었다. 분 명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상사는 함정을 파는 것 이 아니라 그냥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혹 은, 혹은…… 전에 생각한 것처럼 상사가 아까즈끼의 스파이 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가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이라면 왜 어젯밤에 갑자기……. 움직임이 없는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는 무정의 눈에 어젯 밤 숙소에서 연구실 시스템에 접속하고 있을 때 불쑥 나타난 슈타이너 상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쏘냐 때문에 연구실 시스 템에만 정신이 팔려서 상사가 접속하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그때…….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대위님." 정신 없이 돈 루카의 정체를 캐고 있던 무정은 급작스러운 슈타이너 상사의 등장으로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뻣뻣 하게 굳어 가는 마음을 억지로 다독이면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상사?" "아,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상사는 그 부분에서 말을 끊었다. 그 짧은 여백이 얼어붙 은 뒷덜미 근육을 더욱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다만…… 뭔가?" "예, 다만 그냥 심심하기에 여기저기 살피다보니 대위님이 들어와 있기에 대화나 나누고 싶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고 있는 상사의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 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무정은 상사가 눈치 채지 않도록 조용히 침을 삼켰다. 하지만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상사가 눈치챌 것 같아 몹시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그 는 상사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그지 없었다. 어딘가 이상해. 왜 상사가 안하던 짓을 하지? 무정이 물었다. "그래? 대화라…… 어떤 대화를 하고 싶나?" "요즘 연구소 내의 분위기가 이상해서 말입니다. 그걸 느 끼십니까?" "연구소 분위기가? 글쎄, 어떤 점에서 말인가?" "뭔가…… 느껴집니다. 어딘가 어수선한 것 같더군요." "그래? 난 전혀 모르겠는데. 그건 자네만의 육감인가?" "글쎄요, 저만의 것인지 아닌지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도대체 무슨 일인가?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겠나?" 이 질문을 던지면서 무정은 그것을 하나의 도박이라고 생 각했다. 분명히 상사는 지금 무정이 연구실 시스템에 접속 중이었던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상사 자신이 가끔 연 구실에 접속하는 사실을 무정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조차 눈 치채고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했다. 무정이 소장실 제 1회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눈빛 하나 변하 지 않고 은근히 우회적인 얘기를 끄집어내는 것만 보더라도. "그러니까…… 저 자신만의 육감이기 때문에 뭐라고 설명 드리기가 어렵군요. 다만, 근래에 일어나고 있는 대표적인 현상을 보자면 여성연구원이 의도적으로 선정적인 옷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들 수도 있겠습니다." 여성연구원? 쏘냐……. 그게 어쨌다는 거지? 연구원이 규정에 위반된 복장을 하고 다니는 것과 안보문제와는 어떤……. "그래?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게 우리의 안보문제와 관련 이 있는 건가?" 무정은 가능한 한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항상 안보와 직결된 어떤 일이 발생 할 때는 주변의 분위기에 변화가 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큰 사 건이 터지기 전에 보면 그런 조짐이 있었죠. 즉, 요즘 우리 주변에 만연되고 있는 이상한 분위기는 바로 그런 전조가 아 닌가 싶기도 합니다." 만연? 전조? 지금 상사는 쏘냐와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경고를 하고 있 는 것일까? 천만에,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상사는 그까짓 내부의 규정위반 따위에 크게 신경을 기울일 리가 없었다. 어쩌면쏘냐와의 관계를 들먹거린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이다. 자신을 돌아보라는 의미일까? 자신…… 나 자신……. 나 자신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바로, 다름 아닌, 연구 소 기밀에 접근……. 그는 그것을 지적하고 경고하는 것일 까? 차마 상관을 잡아들이기 싫어서? 무정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후! 무정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머리를 흔들어댔다. 곁눈으로 슬쩍 슈타이너 상사를 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CCTV 카메라를 통해 각 구역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무정은 다시 천천 히 고개를 저었다. 상사의 의도가 그것이었을까? 경고? 정말 경고였을까? 모 든 것이 애매모호했다. 지금까지 무정 자신은 항상 자신의 의도를 숨기면서 교활한 여우처럼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자 신보다 더욱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슈타이너 상사의 행동이 었다. 그는 여우보다 한 수 위에 자리잡고 있는 사냥개일까? 여우잡이 전문 사냥개? 폭스하운드? 무정은 벌써 오랜 날들을 상사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 부임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때 고의적으로 상사와 신경전을 벌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단지 소장을 기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절대로 상사를 적으로 만들고 싶 은 생각도 없었고 또한 그 이후로도 별 문제 없이 지내왔다. 하지만, 혹시 그때 일을 통해 상사는 어떤 기미를 눈치챈 것 일까? 사냥개와 같은 그의 육감이 무정에게서 어떤 냄새를 맡아버리고 만 것일까? 애초부터? 그렇다면 그는 두 달 이상 을 상사의 예리한 눈길에 노출된 어리석은 여우에 불과한 것 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사냥개는 여우가 농장 울타리를 들어오도록 내버려두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여우가 다가와 닭장 안으로 들어가길 기다린 뒤, 그때 덮치려는……. 무정은 자신의 상상에서 비롯된 공포 때문에 흠칫 놀라 몸 을 들썩였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여우, 사냥개, 농장, 한 걸음 두 걸음, 닭장, 닭장 안 으로, 그 안으로……. 무정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다시 머 리를 흔들어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벌써 몇 번이나 그의 추 측은 제 자리를 맴돌고 다시 맴돌았다. 뭔가 확실한 결과치 가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가는 끝 도 나지 않을 의문부호들만 꼬리에 꼬리만 물고 이어지는 결 과가 되고 말 것이다. 무정은 과감히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당분간 잊고 있었 던 그 생각……. 만약, 만약에 슈타이너 상사가 아까즈끼의 첩자라면, 아니 혹은 다른 어느 조직의 첩자일지라도, 정말 로 그가 첩자라면, 그리고 이곳에 기밀을 캐러 들어와 있다 면, 그는 혹시 내가 비슷한 목적으로 들어온 것을 눈치채고 서로가 타협하자는 것일까? 혹은 아예 손을 잡고 협조를 하 자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바로 등 뒤 에 앉아있는 저 자. 언제나 심중을 헤아리기 힘든 무표정으 로 일관하고 있는 자. 슈타이너 상사. 87. 휴게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추수철을 맞이했기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명절 분위기 비슷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추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 깊은 우주 속의 오지, 온통 금속과 합성수지로 만들어진 이 인공구조물 안에서 그들은 오랜 습관 때문에 무의식 중에 그런 기분을 즐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휴게실 한쪽 구석에 낮은 칸막이로 구분되어있는 작은 격 실에 세 사람이 앉아 대화를나누고 있었다. 갈색 톤의 렘브 란트 풍 조명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매우 정겨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 남자와 두 여자. 무정과 나미와 쏘 냐. "저는 체중을 줄여야 해요." 쏘냐는 무정과 나미가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아니? 뭐가 어때서요? 체중이 많이 늘었나요?" 나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예, 전보다 2킬로그램이 넘게 불었어요. 정말 요즘은 늘 어난 몸무게 때문에 짜증이 날 지경이에요." 무정은 쏘냐의 웃음 속에 쓸쓸한 그림자가 서려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미는 쏘냐의 몸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갸 웃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보기 좋은데요?" "지금 이게 보기 좋다고요?" "예, 별로 문제가……."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끝없이 불어날 것 같아서 걱정이에 요. 나미 당신은 별 문제가 없나요?" "난 그대로인데요?" 나미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럽네요." 쏘냐는 나미의 몸을 훑어보다가 다시 자신의 배를 내려다 보았다. "하긴 나도 처음 몇 달 동안은 몸무게를 그대로 유지했어 요. 그런데 한 3개월이 넘어가면서부터 조금씩 체중이 불더 군요.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는데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자꾸 불어나는 거에요. 지금은 거의 3킬로그램이 더 불었어요." 꿀꺽. 무정은 쏘냐의 말을 들으면서 마른 침을 삼켰다. 착잡한 마음 때문에 목구멍이 아팠다. 그는 음료수를 마시고 나서 슬쩍 쏘냐의 배를 쳐다보았다. 저 뱃속에 뭔가 들어있다. 아니, 이제는 그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존재가 들어있어. 돈루카. 끔찍한 프로젝트. 분 명히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저 자궁 속에 돈 루카가……. "어머? 왜 제 배를유심히 보세요?" 예기치도 못했던 쏘냐의 말이 무정의 정신을 깨어나게 했 다. "예? 아, 아닙니다." "왜요? 제가 임신한 여자처럼 보이나요?" 쾅! 무정의 머릿속에서 공명이 일었다. 엄청난 충격파였다. 아 무런 내막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쏘냐가 사심없이 던진 한 마 디가 무정에게 크나큰 충격을 가하고 있었다. 다시 얼굴이 뻣뻣해지면서 그 여파가 목 뒷덜미로 흘러 전신을 마비시키 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대위님?" 쏘냐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늘어지고 있었다. "무정 씨? 어디 아파요?" 나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들의 얼굴 이 이상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무정 씨?" "대위님?" 아인슈타인의 중력곡면 위에 있는 풍경처럼 모든 것들이 온통 왜곡되어 보이면서 매우 느리게 다가왔다. 그들의 목소 리 역시 느리고 윙윙거리는 소리로 귓가에 들……. 88. 숙소. 무정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분명히 여기까지 제 발로 걸어온 것 같은데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휴게실 격실의 렘브란트 조명, 나미, 쏘냐. 그 곳에서 일어서고…… 휴게실, 복도, 복도……. 휘청거리는 걸음. 떠드는 사람들 목소리. "대위님?" 휴게실……. "무정 씨?" 어두운 조명……. "왜 그러세요?"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벽……. "어디 아프세요?" 벽……. "무정 씨?" 그리고 어느새 그는 이곳에 누워있었다. "대위님?" 쏘냐 마랸스까가 물었다. 그는 돌아보았다. 그의 곁에 그 녀가 누워있었다. 그녀의 파란 눈이 매우 강렬하게 빛났다. 하얀 얼굴, 그 위로 펼쳐진 금발의 숲, 하얀 얼굴을 따라 내 려가다보면 아래쪽에 보이는 붉은 입술. 파란 눈, 하얀 얼 굴, 붉은 입술, 금발의 숲, 파란 눈, 하얀……. 쏘냐는 없었다. 잠시 멍하니 누워있었다. 조금 전까지 쏘냐가 누워있었던 쪽을 바라보면서. 아니 쏘냐의 환영이 있었던 곳을 바라보면 서. 잠시 시간이 흘렀다. 시간. 정적. 시간의 흐름. 그리고 무정은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고 나서 다시 조금 전에 쏘냐가 누워있었다고 생각되는 곳을 바 라보았다. 절대 그럴 리가 없지. 그의 생각대로였다. 정말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이곳이 지구라면 몰라도, 아니 이 태양계 내의 다른 어느 곳이라도 모르겠지만 여기는 돈 루카 연구소였다. 다른 곳도 아닌 돈 루카 연구소였다. 남녀간의 사소한 접촉도 금지되어있는 이 곳에서 여성연구원이 남자의 방에 와서 누워있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 맞아. 모든 것이 환각이었어. 그는 크게 머리를 흔들어 그 속에 남아있는 몽환적인 요소 들을 떨쳐내고 컴퓨터 단말기 앞으로 걸어갔다. 스위치를 넣고……. 로고가 떠오른 뒤에 터치보드를 조작하여……. 회선 구성도를 불러 소장실 제1번 회선에 접……. 소장실 제1번 회선. 활성화. 활성화되어 있었다. 소장실 제1번 회선이 활성화되어 있었 다. 그것이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지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슈타이너 상사가 그것을 건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것이……, 맙소사! 슈타이너 상사는 오늘 당직인데? 그렇다면 그는 상황실에서 연구실 시스템에 접근하고 있단 말인가? 상황실 안에서? 누가 볼 수도 있는데? 누가……. 누 구라고 해봤자 함께 당직근무 중인 마이어 중위뿐이었다. 그 렇다면 마이어 중위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마이어 중위 가, 중위가…… 졸고 있는 것일까? 물론 마이어 중위도 특별한 일이 없다면 틈틈이 졸곤 했었 다. 하지만 슈타이너 상사는 언제나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로 모든 보안장비들을 점검했었다. 연구실로의 접근경로를 알고 난 뒤에도 절대로 근무시간에는 그곳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일까? 혹 시 어젯밤 일 때문에? 무정과의 경쟁? 경쟁심 때문에? 먼저 돈루카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 그렇다면? 무정은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슈타이너 상사가 첩자라는 쪽에 패를 걸고 도박을 할 수 있었다. 물론아닐 수도 있었 다. 그러나 지금 상사가 보여주는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두 말할 나위도 없다고 무정은 생각했다. 이건 첩자 야. 이건 첩자라고. 아니, 아니! 첩자가 아니라도 좋아. 지 금 쏘냐가 체중이 불어가고 있어. 곧 쏘냐는 평상시 체중보 다 3킬로그램 이상이 더 늘어나게 되겠지. 물론 3개월이 되 면 끝나겠지. 다시 원위치 되겠지. 하지만 나미는? 그때는 대신 나미가, 나미의 체중이…….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곳을폭파시킨다거나 하 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단지 이 연구소 가동을 중단 시켜야 했다. 어떻게? 언론에 고발을? 말도 안 되는 소리.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동을 중단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미는 구해야 했다. 선유, 그때 선유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명감에서, 이번만은 꼭 구해야 했다. 설사 다른 것들은 그의 능력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다 해도, 하다 못해 나미…… 나미 그녀만이라도……. 그리고 나미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물이 필요했 다. 나미 그녀만이라도 구하기 위해서는……. 그러나 그의 앞에는 커다란 방해물이 있었다. 깊게 빛나는 서늘한 눈빛, 차가운 입 속에 늘어선 날카로운 이빨들, 사냥 개. 사냥개 슈타이너 상사를 제거해야 했다. 상사가 정말 충 견인지 아니면 사냥개의 탈을 쓰고 침투해 들어온 첩자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 경우라도 그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 다. 만약 상사가 첩자임에 확실하다 해도 그냥 검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소장 실 제1회선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이상 무정은 연구실 시스템에 접근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혹 은 더 나쁠 수도 있었다. 아니 확실했다. 연구실 시스템 접 근은 고사하고 그 자신도 상사의 증언에 의해서 함께 잡혀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결국 상사를 검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냥 이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볼 때는, 아니 면 나미를 위해서라면 끝까지 뭔가 캐내야 할 필요가 있었 다. 그리고 세계안보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만약에 상사가 첩 자라면 막아야 했다. 이제 어느 쪽이든 상사는 그에게 적이 었다. 그러나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었다. 방법 은 하나. 자신의 목표에는 장애가 없는 한도 내에서 슈타이 너 상사를 막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것은…… 슈타이너 상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87. 휴게실. 입구에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술요원용 근무복을 입고 있는 것은 그가 퇴근 후 바로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바에 가서 음료수 하나를 받아들고 사람들 사 이를 지나 한쪽 구석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무정이 앉 아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박 대위님?" 자리에 앉아 뭔가 생각하고 있는 듯하던 무정이 고개를 들 어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어, 벨라스께스 하사. 자네 여기 웬 일인가?" 무정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라고 여기 오지 말란 법 있습니까? 가끔 저는 대위님이 이곳에 오시는 것을 보곤 하죠. 하지만 항상 여자들과 함께 있더군요?" "하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몇 마디 대화가 오가다가 문득 벨라스께스 하사의 눈빛이 휴게실 안을 슬쩍 훑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지막한 목소 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위님?" "음, 다름이 아니라……." 무정도 곁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나서 낮은 소리로 말을 이 었다.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네. 아무래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해야할 일이 있어."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이곳으로……?" "아무래도 은밀히 진행시킬 필요가 있어. 내가 노리고 있 는 것은 이 연구소 내부에 있을지도 모르거든." "그래서 일부러 여기……." 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 연구소 내에서 감시를 당하지 않는 곳은 없으 니까. 그래도 여기가 가장 어수선하기 때문에 조용히 대화를 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거야."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할 일은……." "잠깐, 그보다 자네 얼굴을 좀 펴라고.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걸로 보여야 하니까." "흠,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꽤나 신중할 필요가 있는가보군요?" "그래. 상대는 보통이 아냐." "좋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할 테니 어서 제 가 할 일이나 말씀해 주십시오." "음, 좋아. 그러니까…… 자네 레이디버그를 잘 다룰 수 있나?" 무정이 용건을말했다. "예? 레이디버그요?" "그래. 그게 필요할 것 같네." "그거야 당연하죠." 벨라스께스 하사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87. 10월 24일. 상황실. 기압복을 입은 자가 탐색정 대기실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격납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곧 그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메인 스크린이 잠깐 깜빡인 후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탐 색정 격납고 내부였다. 슈타이너 상사가 탐색정 격납고 안으 로 사라지자 목표추적 시스템이 자동으로 카메라의 연결을 바꾼 것이었다. 화면에 나타난 슈타이너 상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탐 색정 베티 원에 오르고 있었다. 커다란 메인 스크린을 통해 나타난 그의 몸집은 코끼리보다 더 크게 보였다. 마이어 중 위는 별로 흥미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 장면을 계속 지켜보 고 있었다. 상황실 문이 열리고 무정이 들어섰다. 무정은 잠시 메인 스크린을 쳐다보다가 곧 마이어 중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마이어 중위?" "잘 모르겠습니다. 슈타이너 상사가 뭔가 발견했다고 합니 다만." 화면 아래쪽을 보니 <슈타이너 상사>라는 자막이 나타나 있었다. "슈타이너 상사? 뭘 발견했다는 거지?" 무정의 눈이 다시 마이어 중위에게 돌아갔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상사 말로는 연구소 외벽에 붙어 있다가 사라졌다고 하던데, 아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옮겨 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꼭 저렇게 나가서 확인해야 하나?" "죄송합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저, 상사의 고집은 어쩔 수 없잖습니까?" 마이어 중위는 자신이 죄라도 지은 듯이 우물 쭈물거렸다. 어쩌면 그의 잘못일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하를 제대 로 통솔하지 못하는 장교일 수도 있었다. 부하인 하사관이 자기 주장만으로 마음대로 기지 밖으로 나돌아다니게 놔둔다 는 것, 그 자체가 마이어 중위의 실책일 수도 있었다. 그러 나 이 연구소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연구소에서 슈타이너 상사의 실질적인 위치는 독보적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아무 도 그의 행위에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슈타이너 상사 가 뛰어난 사냥개였기 때문에. 만약 상사의 의견을 묵살시켰 다가 문제가 터질 경우를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인가, 슈타이너 상사?" 무정이 마이크에 대고 물었다. "밖에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밖에? 어디 말인가? 이 건물 밖 말인가?" "그렇습니다." "거기 뭐가 있단 말인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연구소 외벽에 붙어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연구소 외벽이라니?" "모니터로 잘 살펴보십시오. 분명히 제가 발견했습니다." "이봐, 모니터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아.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연구소 외벽을 구석구석 훑어보십시오. 분명히 뭔가 있을 겁니다." "구석구석? 도대체 얼마나 작기에 그런가?" "잘 모르겠습니다. 지름 수십 센티미터에 불과한 것 같기 도 하고……." 대화를 하는 중에도 상사는 서서히 탐색정을 가동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작은 것이? 혹시 쓰레기 부유물 같은 게 아닌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히 스스로 움직였습니다." "이봐 상사, 멈춰. 자네 아무래도……." "여기는 베티 원. 통로를 개방하라. 이상." 갑자기 슈타이너 상사의 말투가 무선통신 형식으로 바뀌었 다. "이, 이런……."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마이어 중위가 조금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안 돼. 지금 상사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걸 쫓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순 없잖습니까? 조금이라도 의심 이 가는 것이 있다면 확인을 해봐야겠죠." "하지만 저 화면에는……." 무정은 말을 꺼내다가 멈추었다. 마이어 중위의 눈이 강하 게 빛나고 있었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설사 허탕을 치더라도 의심스러운 부분은 확인하는 게 올 바른 것 아닙니까?" "음……." 무정은 쓴 입맛을 다셨다. 중위는 이어서 말했다.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꼭 슈타이너 상사의 육감 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대위님 같은 경우도 이런 일을 경험하 지 않았습니까?" "그랬나?" 무정의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네, 아까즈끼 침공 때 말입니다. 자신은 분명히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윗사람의 선입견 때문에 제대로 관철하지 못 한다면 그보다 억울한 일이 없겠죠." 잠시 생각하던 무정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했다. "알았다. 문을 열게." "감사합니다, 대위님." 마이어 중위는 짧은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마이크를 향해 돌아섰다. "베티 원.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그쪽에는 이상이 없는 가? 이상." 곧 상사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여기는 베티 원. 그렇다. 어서 통로를 개방하라. 이상."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알았다. 통로를 개방한다. 이상." 마이어 중위는 앞에 있는 단말기를 조작했다. 모니터에 외 부출입구 제어 윈도우가 나타나자 베티 원의 통로개방을 지 시했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베티 원 격납고에서 공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영원으로 향한,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출입구가 열 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별빛이 보였다. 베티 원이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티 원 아래의 스키드가 밀려나 가고 있었다. 잠시 후 탐색정은 암흑의 우주공간에 나가있었다. 연구소 의 그늘 속에서 토성의 누런 빛으로부터 가려진 탐색정은 매 우 어둡게 보였다. 서서히 베티 원이 스키드 위에서 떠오르 기 시작했다. 바다 위에 조각배가 떠오르듯이 두둥실……. 한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마이어 중위가 입을 열었다. "베티 원.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전방 카메라를 작동시켜 라. 이상." "……."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이어 중위는 반복했다. "베티 원.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조종실 내부와 전방 카 메라를 작동시켜라. 이상." 메인 스크린에 나타난 베티 원 출입구는 거의 닫혀가고 있 었다. 잠시 후면 베티 원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것 같았다. 영원히. "베티 원. 여기는……." "마이어 중위! 샐리 투 통로를 개방할 준비해!" 무정이 소리치며 문을 향해 달려갔다. "어, 대위님! 무슨 일입니까?" "어서 해! 빨리!" 무정은 짧은 명령만을 남기고 열린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88. 도킹포트로. 무정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달려갔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무정을 바라보았다. 몇몇 사람이 경례를 해왔지만 무정은 간단하게 손만 들어 답하고 계속 도킹포트를 향해 달려갔다. 도킹 포트로 뛰어들어간 무정은 서둘러 기압복을 착용한 뒤 초계정 격납고로 들어가 샐리 투에 올랐다. 무정은 공기 펌프를 작동시킨 후 초계정의 엔진을 점화하면서 무선통신으 로 상황실을 불렀다. "그라운드 제로! 여기는 샐리 투. 이상." "샐리 투.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이상." 마이어 중위의 찌푸린 얼굴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여기는 샐리 투. 통로를 개방하라. 이상."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무슨 일이 발생한 건가? 이상." "여기는 샐리 투. 나가서 설명하겠다. 빨리 통로부터 개방 하라. 이상." 무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알았다. 이상." 무정은 우주공간으로 나가는 출구가 열리자마자 버릇처럼 가이드 스키드가 출구 밖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이 샐리 투를 이륙시켜 출구를 빠져나갔다. 89. 우주공간. "샐리 투.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이상." 마이어 중위가 다시 그를 불렀다. 모니터 화면에는 중위의 얼굴 대신 인공위성의 카메라가 잡은 연구소 전경이 나타나 있었다. 시커먼 하늘을 배경으로 그 회색의 외벽이 창백하게 빛났다. "여기는 샐리 투. 이상." 무정이 답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상." "아직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이 상." "베티 원 때문인가? 이상." "그렇다. 곧 확인한 후 알려주겠다. 이상." 무정은 헬멧 내의 투사기를 이용해서 레이더가 포착한 연 구소 주변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레이더는 슈타이너 상사의 탐색정이 연구소 도킹 포트 입구 쪽에서 R117-U102 방향에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측으로 117도에 위로 102도 를 뜻하는 것이었다. 무정은 인공위성과 연구소 외곽에서 촬 영된 영상들을 통해 베티 원을 찾으려고 했다. 잠시 후 인공 위성의 카메라에 베티 원이 잡혔다. 베티 원은 먹이를 발견 한 늑대처럼 연구소 구조물의 어느 한 점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무정도 그 쪽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돌연 베티 원이 방향 을 바꿨다. 베티 원은 우주공간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가 기 시작했다. 무정도 다시 그쪽으로 기수를 돌려 뒤쫓기 시 작했다. 스피커에서 딸깍거리는 소리가 나고 마이어 중위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샐리 투.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이상." "여기는 샐리 투. 이상."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상." "베티 원이 이상하다. 이상." "어떻게 이상한가? 이상." "지금 연구소를 벗어나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다. 이상."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이상." 무정은 <달려간다>고 표현하지 않고 <달아난다>고 표현을 했다.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지금 나는 그 뒤를 쫓고 있다. 이상." "상사가 왜 저러는지 알고 있는가? 이상."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이상." 저 멀리 슈타이너 상사의 탐색정이 육안에 들어왔다. 그는 순양함 아킬레스의 옆을 지나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무정은 초계정의 속도를 높였다. 베티 원은 날파리라도 쫓아가는 듯 이 이리저리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순간, 베 티 원에서 핑크 빛의 빛살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목표에 명 중하지 않았는지 베티 원은 다시 크게 선회를 하면서 그 뭔 가를 쫓아가고 있었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가? 이상." "여기는 샐리 투.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 사가 의심스럽다. 이상."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상." "말 그대로이다. 이상." 마이어 중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베티 원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초계정인 샐리 원은 탐색 정 베티 원보다 훨씬 빠른 최고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대신 저속에서의 정교한 동작은 베티 원이 더 나았다. 베티 원은 틈만 나면 입자포를 쏘아대면서 그 무엇을 향해 쫓아갔다. 아직 그것은 무정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러나 무정은 알고 있었다.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인지. 무정은 무장 잠금 레버를 올려 초계정의 무장을 활성상태 로 바꿔놓고 발사속도를 4점사에 놓았다. 조준경의 중앙에는 베티 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미 연구소는 시야에서 사라 져버리고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함선조차도 이미 저 뒤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매우 착잡한 목소리로, 많은 것들을 우려하는 목소리로 마 이어 중위가 물었다. "샐리 투.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상사가 탈영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상." "여기는 샐리 투. 그럴 수도 있다. 이상." 무정은 대꾸하면서도 베티 원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몇 번의 격한 움직임이 있은 뒤에 곧 베티 원은 조준경의 중 앙에 들어섰다. 그때쯤 무정의 눈에도 슈타이너 상사가 쫓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샐리 투의 망원 카메라에 잡힌 그 물체 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어두운 회색으로 칠해져있는 그 물 체. 모니터에 나타난 추정된 크기는 45센티미터. 바로 레이 디버그였다. 무정은 입자포 발사단추를 눌렀다. 투투투투! 핑크 색 빛살이 쏟아져나가 베티원의 바로 옆을 스쳐지나 갔다. 무정은 간헐적으로 단추를 눌렀다. 투투투투!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무슨 일인가? 이상." 마이어 중위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베티 원을 격추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상!" 무정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계속 포를 쏘아댔다. 투투투투! 레이디버그는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짙은 회색으로 칠 해져있었다. 투투투투! "베티 원을 격추시킨다고? 왜 그러는가? 이상." "아무래도 슈타이너 상사가 스파이 같다. 이상." "무슨 소리인가? 이상." "갑자기 달아난 것이 의심스럽다. 아무래도 뭔가를 빼돌리 려는 것 같다. 아마 연구소의 기밀이 아닌가 싶다. 이상." "그, 그럴 리가……." 스피커를 통해 마이어 중위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유 없이 근무지를 이탈중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상." 마이어 중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무정은 계속 상사의 뒤를 쫓아갔다. 투투투투! 계속 입자 빔이 날아가자 슈타이너 상사는 레이디버그를 쫓는 것을 포기했다. 투투투투! 레이디버그는 원래 짙은 오렌지 색으로 칠해져 있어야 하 는 선외점검용의 로보트였다. 투투투투! 베티 원이 크게 선회하기 시작했다. 무정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광선을 쏘아댔다. 투투투투! 레이디버그는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어딘가 먼 곳을 향 한 끝없는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투투투투! 베티 원은 급선회를 하면서 샐리 투를 향해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아마 슈타이너 상사는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이 누구 인지 궁금할 것이다. 모든 통신이 두절되어 있기 때문에. 영 상도 음성도 통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상사는 샐리 투를 향해 다가오면서도 사격을 하지 않았다. 다만 크게 기체를 흔들어 자신이 공격의사가 없음을 밝히려 하고 있었다. 상사는 자신이 왜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을까? 공격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두 함정이 서로 엇갈려 지나갔다. 무정은 급선회를 해서 베티 원을 따라갔다. 이제 베티 원은 기지로 돌아가려 하는 것 같았다. 그대로 두면 안 돼! 투투투투! 빛살이 베티 원의 엔진실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불꽃이 일다가 이내 사라졌다. 갑자기 베티 원이 감속을 하 면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좋았어, 와봐!" 무정은 계속 그 뒤를 쫓으면서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베티 원이 정면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무정은 계속 포를 쏘아댔다. 돌연 베티 원 쪽에서도 빔이 날아왔다. "그래! 바로 그거야!" 어두운 공간에서 양쪽 방향으로부터 날아온 입자가 서로 엇갈려 지나갔다. 그것은 멋진 불꽃놀이를 연출하고 있었다. 베티 원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머리 위로 스치 고 지나갔다. 무정은 급선회를하면서 그 뒤를 쫓았다. 베티 원도 선회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샐리 투가 더 빨랐다. 탐 색정은 기동성에 있어서 초계정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투투투투! 선회하느라 속도가 느려진 베티 원을 향해 빛살이 날아간 순간, 그 엔진에서 작은 폭발이 일었다. 폭발로 인해 급격하 게 가해진 힘은 제지할 만한 요소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우주 공간에서 큰 추진력이 되고 있었다. 베티 원은 갑자기 진로 에서 벗어나 균형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기 시작 했다. 그것은 빙글빙글 돌면서 우주의 암흑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무정은 베티 원을 쫓아가서 완전히 파괴할까 생각하 다가 그만두고 기수를 돌렸다.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는 죽고 말 것이다. 독일산 사냥개 슈타이너 상사 는. "그라운드 제로. 여기는 샐리 투. 이상." 무정은 피곤한 목소리로 마이어 중위를 불렀다. "여기는 그라운드 제로. 이상." 마이어 중위의 목소리도 매우 지쳐있는 것 같았다. 매우 허탈한 목소리였다. "여기는 샐리 투. 베티 원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균형을 잃고 날아갔으니 아마 어느 위성엔가 추락할 것이다. 이상." "알았다. 어서 귀환하기 바란다. 이상." "알았다. 통신완료. 끝." 무정은 함정의 조종을 자동제어에 넘기고 눈을 감았다. 눈 앞에 슈타이너 상사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슈타이너 상사……. 무정은 자신에게 다시 물음표를 던졌다. 상사는 자신을 쫓 는 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짐작으로는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사냥개다운 육감으 로. 먹이에 눈이 먼 사냥개. 항상 사냥감만 보면 쫓아가는 사냥개. 그러던 그가 이번에는 오히려 사냥을 당했다. 아마 그도 눈치를 챘을지 모른다. 자신이 쫓던 물체가 레이디버그 라는 것은 깨닫지 못했지만 그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리 고 위장된 레이디버그는 사냥개를 덫으로 유인하기 위한 미 끼였다는 것을. 머리 속에 소장의 말이 울려퍼졌다. 이곳에 온지 얼마 되 지 않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자네, 슈타이너 중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소장의 표정에는 약간의 미소가 배어 있었다. 그 미소 뒤 에는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 모르지만. 하지만 자신의 연기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무정은 생각했다. 잠시 생각하 다가 그는 대답했다. "좋은 군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네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군?" 소장의 미소가 조금 희미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무정의 반문은 명료했다. "슈타이너 중사는 훌륭한 군인일세." 소장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 연구소 공사 초기에, 중사는 기술자로 가장하고 침투 한 반체제 테러분자를 잡아냈다네. 또한 몇 년 전에는 연구 원으로 가장하고 침투했던 산업스파이도." 그를 없애버린 지금까지도 무정은 알 수 없었다. 과연 상 사가 아까즈끼의 첩자였는지의 여부를. 다시 울려오는 소장의 목소리. <적어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지.>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무정은 그렇게 자위하고 있었다. 상사를 죽인 것은 자신의 본분이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더러운 음모에 자신들을 희생시 키는 연구원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고. 마이어 중위의 목소리. <또한 확실하지는 않지만 힌덴부르크에는 슈타이너 상사의 연인이 타고 있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끝났다. 더 이상 아무도 이 사건에 대해 서 모를 것이다. 슈타이너 상사는 첩자로 간주될 것이며 그 걸로 모든 것은 끝이다. 중위의 목소리. <그에게는 계급, 명예 따위가 한낱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나뭇잎 조각에 불과할 겁니다.> 물론 그 진실은 무정 자신만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자신 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벨라스께스 하사. 그의 입을 다물게 하면 된다.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이미 그는 무정에게 맹종하고 있으니까. 지난 아까즈끼 사건 이후 그는 무정을 영웅으로 숭배하고 있으니까. 벨라스께스 하사도 모르고 무정 자신도 모른다. 그리고 연구소의 다른 사람들은 더욱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슈타이너 상사가 첩자였다는 확신을. 설사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해도. 슈타이너 상사의 목소리. <제 육감입니다.> 자신의 목소리. <육감? 어떤……?> 마이어 중위의 목소리. <슈타이너 중사의 육감은 대단합니다.> 다시 슈타이너 상사의 목소리. <아까쓰끼 테러단이 있을 때부터 예측했던 일입니다.> 벨라스께스 하사만 입을 다물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 이다. 영원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무도 그 진상을 모를 것이다. 물론 무정 자신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90. 숙소. 무정은 단말기 앞에 무너지듯이 주저앉아 전원을 넣었다. 허무한 기분이 맴돌았다. 전원을 넣고는 그냥 의자에 기대 어 축 늘어진 채 맥없이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곧 화면에는 연구소 로고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다시 슈타이너 상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나 간 일들과 함께. "중사는 내게 어떤 종류의 불만이 있나? 아니면 모든 상급 자에게 그런가?" 무정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슈타이너 중사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방금 전에 소장이 말하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앵앵거렸다. <자네, 정말 슈타이너 상사가 첩자라고 생각하는가?> 이어 무정 자신의 목소리. <저도 확신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영내를 이탈 했습니다. 더욱이 상황실과의 통신을 거부하고 달아나려 했 습니다.> <음, 이상한 일이군. 슈타이너 상사가…….> <저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정없이 밀려오는 해일에 박살나버린 배들와 집채들이 뒤 섞여버린 아수라장처럼 무정의 머릿속에 큰 혼란이 일고 있 었다. "자네가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근무했는지는 몰라도 자네 는 우리 안보국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말게. 그리고 내가 자 네 직속 상관이란 사실도." 무정은 괜히 상대방에게 트집을 잡고 있었다. "항상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역시 중사는 담담했다. "하지만 자네는 항상 자신이 우리 안보국의 핵심이라고 생 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더군. 자네는 일개 요 원--하사관일 뿐이야." "그건 그렇습니다." "설사 자네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다시 소장의 목소리. <음, 슈타이너 상사를 아들처럼 생각했는데…….> <정말 유감입니다.> 무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상황실 안을 거닐었다. 얼마 후 그는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군대생활에서건 사회생활에서건, 좋든 싫든 간에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 중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건 우리 안보국에서도 해당되는 일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무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 차이란," 무정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더욱 거만하게 변해 있었다. "지적, 윤리적 우월성을 말하는 것인데 그건 출신성분과 교육기관 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중사의 표정이 조금, 아주 조금 변해 있었다. 그가 대꾸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에디슨은 무학자였고 호킹은 전신마비였습니다. 더 이상 사람의 능력은 학벌이나 외형 등 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외일세." 무정이 날카롭게 돌아보았다. "난 일반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대위님 학교 선배인 지구연방 의장께서도 학벌이 나 지연제도를 타파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중사가 빈정거렸다. "난 정치가가 아냐!" 무정은 언성을 높였다. "난 한국 출신의 안보국 장교야. 나를 의장과 같은 맥락에 집어넣지 말게!" 중사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점에선 저와 같군요." "음, 그건 그래." 무정은 시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연방의 의장이지." <알았네. 하지만 나는 이번 일을 사고로 처리하고 싶네. 나는 그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 그래도 슈타이너 상 사는 이 연구소의 산 역사였고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어.>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부디…… 도와주게. 그가 첩자가 아니라 약간의 오해와 사고가 있었을 뿐이라고 말야.>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죠.> <고맙네.> <아닙니다.> "이 연구소가 매우 중요한 것은 알지만," 무정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 젊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아픔을 느꼈 다네." 슈타이너 중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정은 이어서 말했다. "더욱이 그 장면을 지켜보는 베랑송 연구원의 마음은 어땠 겠나?"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슈 타이너 중사와 사적인 대화를 한 적도 거의 없었지만 오늘 같이 인간적인 대화도 처음이었다. 다만, 모든 것이 다 계획 에 의해서. "그건 대위님 마음도 같겠군요?" 슈타이너 중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깔았다. 무정은 중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중사도 무정을 마 주보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무정이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슈타이너 중사도 포크를 내려놓았다. "제가 이 연구소에서 5년을 근무했지만 이런 큰 사건은 처 음이었습니다. 물론 사고 자체는 내부에서 생긴 것이 아니지 만 결국 내부와 관련된 것이니까요." 무정은 나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것을 언뜻 볼 수 있었다. 나미는 무정으로부터 몇 미터 거리를 지나가면서 힐 끔 쳐다보고는 나가버렸다. 생각 같아선 당장 쫓아가 나미를 잡고 싶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지금은 매우 중요한 시간 이었다.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었다. "돈 루카 연구소라, 도대체난 이 이름의 뜻을 모르겠네." 무정이 지나가는 말처럼 넌지시 던졌다. 하지만 슈타이너 중사는 평소와는 달리 그 한 마디도 그냥 넘기지 않고 대꾸 했다. "글쎄요, 뭐 다른 뜻이 있긴 하지만 저는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냥 돈 루카입니다. 저는 5년 동안 그 의미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서 일어나는 일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는 거죠. 그냥 내 할 일이 아니라면,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게 제 소신입니 다. 여기에선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더군요." 무정은 슈타이너 중사의 말에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척했지만 사실 그는 중사의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도록 신경 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무정은 중사의 말에 수긍하는 척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 자네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아." 음식이 계속 식어가고 있었다. 너무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식사를 계속하면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 다. "아, 이거 미안하군. 우선 식사부터 마쳐야겠네." 무정은 다시 포크를 집어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마이어 중위의 목소리였다. <음, 나도 확실히 모르겠어.> <슈타이너 상사가 스파이입니까?> <확실치는 않아. 하지만 분명한 건 근무지를 이탈했다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소장님은…… 그냥 사고로 처리하자고 하더군. 그 동안 연구소의 안보를 위해 애써온 그의 명예를 존중하는 의미에 서.> <저도 그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후루야마 중위가 아까쓰끼의 일원이란 말인가?" 무정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죠. 우선 그는 일본인입니다. 어 쩌면 어렸을 적부터 놈들의 교리를 전수 받으며 자랐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계획적으로 군에 입대한 후 첩자로 활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슈타이너 중사는 무정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음." 무정의 폐부에서 무거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긴 나도 일본인은 좋아하지 않네만 전혀 예측할 수 없 었네. 정말 자네는 대단한 사람일세." 무정은 자신도 모르게 불필요한 사실을 들먹거리며 횡설수 설하고 있었다. 어느새 슈타이너 중사의 의혹에 덜미를 잡힐 까 두려워진 것이다. "물론 그렇시겠죠." 슈타이너 중사가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대한 연방공화국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몹 시도 싫어하더군요. 과거의 빚 때문에. 우리 독일인들도 마 찬가지죠. 150년 전에 있었던 전쟁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유 럽에서 눈총을 받고 있습니다." 중사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낮게 가라앉아 있었 다. 무정은 당황했다.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한 것이다. "아, 그건 미안하군. 그런 뜻으로 꺼낸 말이 아닌데." 무정은 다시 허둥지둥 둘러대야 했다. "너무 염두에 두지 마십시오. 저도 대위님의 말에 감정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니니까요." "고맙네." <알았네. 하지만 나는 이번 일을 사고로 처리하고 싶네. 나는 그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 그래도 슈타이너 상 사는 이 연구소의 산 역사였고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어.>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부디…… 도와주게. 그가 첩자가 아니라 약간의 오해와 사고가 있었을 뿐이라고 말야.>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죠.> <고맙네.> <아닙니다.> 정말 그랬을까? 정말 소장이 슈타이너 상사에 대해서 그토록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믿을 수가 없었다. 소장이 상사를 감싸고 도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 는 것 같았다. 그 하나는 명예였다. 돈 루카 연구소의 명예. 돈 루카 연구소의 명예인 슈타이너 상사. 영웅. 그러한 영웅 이 빛 바래지 않게 하고 싶은 욕심이 일어났을 것이다. 또 하나는 책임이었다. 연구소 설립 후 5년 동안 가장 중 요한 안보국 내에 첩자가 들어와 있었다. 그것을 모르고 지 냈다. 그것은 아무래도 소장 자신의 명예 혹은 지위에 차가 운 살얼음을 들이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소 장은 슈타이너 상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상사 의 명예를 지켜주려는 것이다. 비열한 인간. 무정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더러운 인간이 그곳에 있었 다. 만약 지난 번 연구소 화재사건이 아니었다면 무정도 소 장의 값싼 감상주의 드라마에 넘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 나 무정은 이미 경험한 후였다. 소장이 얼마나 야비한 인간 인가를. 무정은 쓴 입맛을 다시고 나서 단말기를 끄고 자리에서 일 어섰다. 허탈한 숨을 내쉬며 침대 앞으로 걸어간 그는 그 위 에 몸을 던졌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어찌 됐든 무정에게는 속 편한 방 향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슈타이너 상사가 첩자인가의 여부 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 무정에게는 훨씬 속 편한 일이었다. 만약 따지고 들게 되면 끝이 없을 테니까. 무정은 눈을 감았다. 맥이 풀렸다. 가장 공포의 대상이었 던 사냥개를 처리했지만 오히려 마음이 착잡했다. 그래도 전 우였다. 그다지 길지도 않았지만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세월 을 함께 일해온 전우였다. 그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역경도 함께 겪었던 그였다. 슈타이너 상사. 서서히 잠이 밀려왔다. 더 이상 슈타이너 상사의 얼굴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나미 쏘냐 선유 93. 11월 1일. 상황실. "점심식사 하러 가셔야죠." 마이어 중위가 말했다. 뭔가에 골똘해있는 무정은 대꾸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대위님, 어떤 문제라도 있습니까?" 마이어 중위는 무정의 앞으로 다가서면서 다시 물었다. "어? 음…… 음." 무정은 그제야 마이어 중위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더듬거 리고 있었다. "별로 안색이 좋지 않군요?" "아, 그래. 그렇다네." "점심식사 하러 가시죠?" 마이어 중위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점심? 벌써 그렇게 됐나?" "예, 열 두 시가 넘었습니다." "음, 별로 입맛이 없는데……." 문득 무정은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아, 알았어. 먹으러 가야지." 94. 식당. 벌써 11월이었다. 어느새……. 지금쯤 지구에는, 아니 지구 북반구의 온대지방에는 낙엽 이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11월이면…… 서울지방에 노랗게 물들어있던 은행잎들이 한 잎 두 잎 어머니 곁을 떠나 차가 운 대지로 떨어져 내릴 것이다. 결실의 계절. 수확의 계절. 추락의 계절. 침잠의 계절. 그리고 침묵의 계절……. "무슨 생각하세요?" 나미가 물었다. 초점 잃은 눈을 식탁 위에 고정시키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무정은 눈을 들어 나미를 바라보았다. "아, 별 거 아네요." 무정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 의 기색이 역력했다. 피부가 까칠해지고 눈가에는 가을이 접 히고 있었다. "입맛이 없나봐요?" 나미의 표정에서 근심의 빛이 묻어났다. "그런 것 같군요." 무정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대답이 그래요? 어째 요즘 다들 이러지? 쏘냐도 그 렇고 클라우디아 제니퍼 다 그래요. 그리고 무정 씨도 마찬 가지고요. 어떤 전염병이라도 돌고 있는 걸까요?" 나미의 말이 무정의 뒷덜미를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며칠 전만 같았어도 꽤나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며칠 전만 해도 그 말에서 어떤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열심히 파고 들 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 필요 없었다. 이미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파악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젯밤, 어 젯밤에 보았던 화면, 돈루카의 진행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 었던 그 화면이 아직 그의 머릿속을, 그리고 온몸의 세포를 꽉 조인 채 놓아주지 않고있었다. 돈루카. 해파리. 괴물. 수천 개의 6각형 구조물. 텔레파시에 의한 교류. 집단지능. 연구원들. 자궁. 그리고 쏘냐……. "오늘은 쏘냐가 늦는군요?" 무정은 무의식 중에 그런 질문을 내던졌다. "쏘냐…… 아직까지 몸이 안 좋은가봐요. 그냥 휴게실에 가서 간단하게 때우겠다더군요." 나미의 표정이, 그녀의 감정이, 서서히 수면 아래로 잠기 는 것처럼 불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도 이 알 수 없 는 상황에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갑자기 집단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나타나는 이상한 증세 이상한 현상들. "음, 쏘냐가……." "하지만 별 문제는 아니라더군요. 이런 곳에서 적응해 가 는 과정에서 반 년을 주기로 나타나는 현상…… 그리고 그것 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주어 전체적인 슬럼프가 형성 되는 기간이라고 하고요. 그러니까 3개월에 한 번씩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죠." 3개월에 한 번……. 연구원들이 3개월 간격으로 들어오니까. 그리고 6개월만에 첫 돈루카를 분만하니까. 말 그대로 <분만>. 그 후 3개월간 쉬면서 몸을 회복하고, 다시 3개월 뒤에는 두 번째 돈루카를 분만……. 쩔그렁! 무정은 흠칫 놀랐다. 자신이 포크를 식기에 떨어뜨린 소리 였다. 그 소리가 꽤나 크게 들렸다. 나미가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의 몇몇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그를 향해 돌아와 있었다. "왜 그래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나미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나 무정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입 을 멍하니 벌리고 나미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은 나미의 입술만을. "의무실에는 가봤나요? 요즘 몸이 상당히 안 좋은 것 같던 데." 무정은 짧고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열고 싶은 생각 이 들지 않았다. 나미는 식기에 든 음식을 포크로 끌쩍거리 면서 말을 이었다. "좀 이상하군요. 이 현상은 주로 여자에게 나타나는 거라 고 들었거든요. 거대한 행성인 토성의 인력과 관련된 여자 체내의 생리주기와 연계해서…… 그런데 무정 씨에게……." 토성과 관련된 여자의 생리주기? 연구소는 말도 안 되는 온갖 방법으로 연구원들을 속이고 있었다. 더러운 자식들. 생리주기. 제기랄, 놈들은 여자들의 자궁 속에 이상한 괴물을 처넣고 생리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 도록 약물처방을 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이 연구소에 근무 하는 여자들의 몸은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단지 공장에 불 과했다. 해삼처럼 생긴 괴물을 생산하기 위한 공장. 그리고 머잖아 나미 그녀에게도……. "선유도 그랬죠." 문득 무정이 무심코 내뱉었다. "예?" 나미의 눈이 둥그래졌다. "선유도 이 과정에서 부작용이 일어난 거죠." 무정은 책을 읽듯이 거의 억양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런, 이곳에 적응하지 못했군요." "<이곳>이 아니고 <그것>이죠. 돈루카. 돈루카에 적응하지 못했죠." "그게 무슨 소리죠? 이곳이 아니고 그것이라니." "맥과이어 연구원도 그랬죠. 그래도 맥과이어는 훨씬 나은 편이었지만." "그건 누구나 아는……." "쏘냐도 마찬가지이고…… 어쩌면 나미 당신도……."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걸 극복하려고 노력하 고 있죠." "당신은 몰라요." "뭘요? 난 이 상황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가능하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데요?" 무정이 나미의 말을 가로챘다. "예?" 나미의 얼굴에 몹시 불쾌하다는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났 다. "당신의 의지로 돈루카의 부작용이 극복되리라고 생각하나 요?" "예, 나는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애쓰고 있죠." "돈루카는 의지로 극복되는 게 아닙니다. 체질과 관련된 거죠." "체질이라고요? 난 그것도 가능하다고 믿어요. 이런 곳에 서 근무하는 데는 정신력이 매우 중요하죠.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해낼 수 있어요." 마음만 먹으면? 후후, 그게 과연……. "돈루카는 정신이 아니라 육체에 있는 거에요." "정신이든 육체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죠? 어차피 이겨낼 수만 있다면……." 그녀는 말을 멈추고 주변을 힐끔거렸다. 너무 목소리가 컸 다. 많은 사람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잘 모르는군요. 돈루카는 당신의 마음이 아닌 몸 속… …." 당신의 몸 속에 자리잡고 당신의 양분을 빨아먹으면서 자 라고 있죠. 해삼같이 생긴 짙은 보랏빛 괴물이 당신의 자궁 속에 틀어박혀 있는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 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이 모든 비리를, 음모를. 그러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도저히. 95. 11월 2일. 숙소. 화면에 돈루카 윈도우 메뉴가 나타났다. 며칠 전 해파리를 보고 난 이후 그는 더 이상 연구실 시스 템에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 끔찍했다. 선유의 죽음을 생각 하면 분통이 터졌다. 이런 더러운 음모에 선유가 희생 당한 것이다. 그리고 맥과이어 연구원, 베랑송 연구원……. 불쌍 한 리뀔레 소위……. 그러나 오늘 다시 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왕 시작 한 일, 그 전모를 파악하기로 했다. 그는 <문제발생> 아이콘을 찍어 그 윈도우를 열었다. 화면에 보고서 양식 같은 것이 나타났다. 연구원 번호, 연 구원 이름, 사고일자, 사고유형, 방식, 세부사항 등의 항목 들이 적혀있었다. 화면 상단의 현행 윈도우용 메뉴에 <열람 방식>이라는 항목이 나타났다. 그 항목을 건드리자 몇 가지 부메뉴가 나타났다. 그 중 <연구원별>이라는 항목이 눈에 띄 었다. 무정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는 그 항목을 선택했다. 보고서 화면의 연구원 번호 난에서 커서가 깜빡거렸다. 무 정은 커서를 연구원 이름 난으로 옮긴 뒤 선유의 이름을 입 력시켰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화면에 나타난 선유의 얼굴이었 다. 정면 사진.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 아아 선유……. 선유의 얼굴을 보자 다시 마지막으로 그녀와 함께 있었던 지구궤도상 우주정거장 깔끄미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선유 의 처절한 절규가 다시금 생생하게 귓전에 울려 퍼졌다. <다 필요 없어요. 내 고통을 어느 누가 알까요?> 무정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입을 꽉 다물었다. 슬 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그 기억 그 슬픔. 내 고통을 어느 누가 알까요. 슬픔은 꽉 막힌 듯 답답한 가슴 속으로부 터 서서히 스며 나와 파르르 떨고 있는 세포를 타고 위쪽으 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다시 집결하여 거대한 하 나의 에너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에너지에 하나의 이름 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분노>였다. 무정은 이를 악물며 책상을 내리쳤다. 모니터가 흔들거렸 다. 화면 속의 글자들이 가늘게 떨었다. 선유의 모습도 가늘 게 떨었다. 그녀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고 있었다. 착각 일까? 그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가 싶더니 어느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유는 울고 있었다. 무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녀의 얼굴로부터 눈을 떼 어 사고자료 쪽으로 돌렸다. 연구원번호 : F-095B-003 사고일자 : 96.04.07 사고유형 : 부작용 방 식 : 능동식 능동식? 그의 눈이 빠르게 세부사항 항목을 향해 내려갔다. 그리고 번개와 같은 전율이 그의 목덜미에 내리꽂혀 명치를 뚫고 통 과했다. 세부사항 : 돈루카의 공격 그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돈루카가 공격을? 등줄기를 중심으로 전체에 등 전체에 소름이 일어났다. 돈루카가 공격 을? 그 해삼 같은 괴물이? 무정은 참고화면을 열었다. 이미 본 적이 있었던 자궁 벽 과 돈루카의 모습이 나타났다.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선유 의 뱃속에 들었던 저것. 해파리 같은 저 괴물. 마치 코끼리 코와 촉수, 그 위쪽에 있는 두 개의 뭉툭한 돌기, 그리고 반 대쪽에도 돌기가 삐져 나와 있는 그 괴물의 몸은 연보랏빛이 었다. 그 괴물의 머리부분이 천천히 아래쪽을 향하더니 자궁 벽 을 향해 서서히 낙하했다. 흐늘거리는 코끼리 코가 곧 자궁 벽을 더듬거리는가 싶더니 그 더듬이아래쪽의 주둥이 같은 것이 벽에 늘어붙었다. 마치 물고 늘어지는 듯한 분위기였 다. 그리고 더듬이는 자궁 벽을 끊임없이 긁어대기 시작했 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정은 한기를 느꼈다. 머리카락이 일어선다는 말이 실감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참고화면 윈도 우에 가려지지 않은 화면 한쪽 구석에서 선유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계속 자궁 벽을 긁어 대는 괴물과 웃고 있는 선유.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무정은 그 화면을 닫아버렸다. 잠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헐떡거리던 무정은 얼굴 피부를 문질러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화면을 노려보면서 연신 고개를 저었다. 화면 아래쪽에 있는 또 다른 항목이 눈에 띄었다. 조치사항 돈루카 제거 후 5월 정기여객선으로 지구에 귀환시킴. 이후 연구원 선발 신체검사에서 돈루카 친화지수 95 이상 인 여자들은 제외시킴. 96. 11월 3일. 휴게실. "나미 씨,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무정이 매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그의 표정은 비장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뭔데요?" 어딘가 이상하게느껴지는 무정의 분위기에 나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길 떠나요." "뭐라고요?" "여길 떠나라고요." 무정은 작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뚜렷하게 말했다. "여기…… 휴게실이요? 갑자기 왜 그런……." "휴게실이 아니라 이 연구소 말입니다. 6일 후면 여객선이 도착합니다. 그 여객선으로 떠나세요." 무정의 말이 빨라졌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거친 분위기가 느껴졌다. "무슨 소리에요? 정말 요즘 이상하군요?" "여기는 나미 씨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 도 마찬가지지만 나에겐 나미 씨가 소중하니까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죠? 뭐가 문제에요? 요즘 환자들이 늘고 있는 현상이요? 그건 일시적 현상에 불과해요. 큰 문제 가 아니라고요." 나미도 열기가 올라서 빠른 말투로 대꾸했다. 그러나 무정 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일시적 현상이 아닙니다. 이건 뭔가 있어요. 여자들 몸에 안 좋은 뭔가가 있단 말입니다." "그만해 둬요!" 나미가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들 시선이 그들 쪽으로 돌아왔지만 나미는 개의 치 않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죠? 정말 이상해졌어요. 정말 무정 씨가 한때 이 연구소의 영웅이었다면 누가 믿겠어요?" "난 영웅이든 뭐든 상관 없습니다. 나미 씨가……." 나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나미 씨!" 무정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동시에 나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응했다. "왜 이래요?" 나미는 무정의 손을 뿌리치며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향해 걸어갔다. 무정이 그녀 뒤를 따라갔다. "나미 씨!" "집어치워요!" 나미는 날카롭게 한 마디 대꾸하고 계속 걸어갔다. 무정은 그녀 뒤를 따라 몇 걸음 쫓아가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고뇌를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매 우 고통스런 표정으로 서있던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무정을 힐끔거리며 자기들끼리 킥킥거리는 연구원들도 있었다. 97. 11월 4일. 소장실. "자네 도대체 왜 그러나?" 소장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었다. 그러나 소장 은 가급적 감정을 억제하고 있었다. 무정은 아무 대꾸도 않 고 그냥 서있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짓인가? 여성연구원 손목을 잡다니? 안 보상황실 책임자가 그런 행동을 하면 그게 무슨 꼴인가?" "할 말 없습니다." "그리고 요즘 자네 기록을 뒤져보니 자꾸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더군? 특히 정나미라는 연구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 지더군? 그녀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강요하는 이유가 뭔가? 그리고 자꾸 연구소에 대해 악담을 하는 이유는 또 뭔가? 어 디 그 설명을 들어보세." "할 말 없습니다." "박무정 대위!" "네, 소장님." "대답하게! 이건 묵비권을 행사할 일이 아냐? 자네는 이 연구소의 영웅이었어. 그런데 이제 연구원들을 불안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말을 해보게." "특별히……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아니, 의미가 있는 것 같네." "무슨 말씀이신지?" 무정의 눈시울이 움찔했다. "분명히 뭔가 있지. 자네의 행동 이면에는. 그걸 말해보 게, 어서." "그런 건 없습니다." "나는 자네에게 부탁하는 게 아냐. 이건 명령이야. 어서 대답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명령이다. 대답하게."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잃을 것이 없는데 두려 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뭐야? 명령에 따를 수 없어?" "예, 더 이상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 "이…… 이…… 이런!" 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흥분으로 인해 몹시 상기 된 표정으로 무정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무정은 조금도 수그 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무서운 눈빛으로 소장을 노려보 았다. "자네는 해임이야!" 소장이 고개를 돌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이걸로 끝이야. 상황실 근무에서 손 떼게. 그리고 지구로 귀환할 준비를 하게." 무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공허한 머리 속은 태풍의 눈처럼 곧 다가올 거센 바람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자네는 끝이네. 규정대로 하자면 자네는 명령불복종 죄로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하네. 하지만 지난 날의 업적을 봐서 그건 참기로 하겠네. 이제 더 이상 연구소 일에 관여하 지 말고 또한 더 이상 연구원들에게 접근하지 말게. 이건 경 고일세. 한 번만 더 접근하면 그때는 지구로 복귀하는 날까 지 구금시켜 두겠네." "……." "알겠나?" 무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장의 지시에 순응할 수 없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의 말에 대꾸하는 것조차 달갑지 않았다. "어서 돌아가게. 다 끝났네. 상황실 일에는 신경 쓰지 말 고. 미란다의 기지에서 임시로 상황장교를 부를 테니까. 이 제 자네는 가게. 가서 짐을 꾸려 다음번 오는 여객선에 탈 준비를 하게." 무정은 마지막 예의를 갖춰 형식적으로 경례를 붙이고 소 장실을 빠져 나왔다. 98. 식당. 나미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걱정스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무정은 다시 손목시계를 보았다. 12시 45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정은 고개를 저으면서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겨우 몇 입 뜨다 만 음식은 다 식어있었다. 그는 포크로 음식을 끌쩍거 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99. 최후의 며칠간. 무정은 거의 방 안에 파묻혀 지냈다. 밖으로 나가기가 귀찮았다. 휴게실도 체육관도 모두 끝이 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여객선의 도착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 었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새로운 임시상 황장교가 부임되고 상황실은 그럭저럭 돌아가는 것 같았다. 식당에는 일부러 늦게 가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식 사가 거의 끝날 무렵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계 속 나미를 설득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소장의 말이 떠올 랐다. 자칫 잘못하면 아예 감금되어 떠나는 날까지 나미를 한 번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가끔 먼발치에서 쏘냐의 모 습을 볼 때도 있었다. 그녀는 이제 조금은 적응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적응한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다. 몸 속에 키우는 괴물에 대해서.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그녀 의 허리가 두드러지게 굵어 보였다. 때로는 식사시간에 먼발치에서 나미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무정에 대한 감정이 수그러들지 않은 것 같았다. 갑 자기 무정이 눈에 띄지 않는 점에 대해 무관심한 것 같았다. 그저 다른 연구원들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식사하고 조용 히 사라져갔다. 하지만 가끔 한 번쯤 뒤를 돌아보는 것은 무 정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닐까? 100. 11월 7일. 숙소. 여객선 도착일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무정도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현실은 현실이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모든 것은 끝났다. 이 연구소 에 대한 의문도 나미에 대한 미련도 모두 끝나고 말았다. 애 초에 의도했던 선유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도 풀었다. 비록 그녀 죽음의 배경에 숨어있던 사건이 매우 끔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정말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여기까지 온 소기 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연구원들을 이런 끔찍한 곳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한다는 점. 특히 나미 그녀. 하지만 그녀에 대한 미련도 끝이었다. 어차피 선유를 위해 오는 길에 만난 여자였고 선유를 위해 모든 것을 끝마 친 이 시점에서는 헤어질 수도 있는 여자였다. 이제 더 이상 나미와의 관계는 끝이었다. 나미와……, 나미……. 하지만 정말 이걸로 우리 관계는 끝난 것일까? "저는 정나미라고 해요. 한국 출신이고요. 음, 당신도…… 한국 사람이죠?" 나미. "그렇다면 당신도 여신에 비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되 는데요?" 나미……. 끼익.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무정은 그것이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 면 타인의 방에 출입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없……. 촤르륵! 문 앞의 커튼을 치는 소리. 무정은 돌아보았다. 거기 서있었다. 거기에. "어딜 가려 하시나, 박 대위?" 슈타이너 상사가 물었다. 101. 숙소. 긴 시간이 흘렀다.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저 앞에 와 있는 유령의 정체에 대한 것처럼. 얼마나 이어지고 또 이어 진 침묵이었는지……. "왜 벌써 떠나나? 좀 더 놀다 가시지." 슈타이너 상사가 빈정거렸다. 무정은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딱 다물어진 입이 움직이 지 못하고 있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그는 넋 을 놓고 서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눈 앞에 나타난 존재가 유 령인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환각이라고도 생각했다. 며칠 사이에 받은 수많은 충격과 변화에서 비롯된 정신착란……. 슈타이너 상사는 계속 비꼬는 말투를 이어나갔다. "연구원 아가씨들은 그냥 두고 가나? 저 많은 미인들을 두 고 그냥 떠나기가 아깝지 않나? 나미는 어쩔 텐가? 그리고 쏘냐는? 수많은 아가씨들을 집적거리더니 그대로 두고 떠나 는 건가?" 마치 반중력차량의 배터리가 소진되듯 할 말을 다했는지 상사는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지 루한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된 건가, 슈타이너 상사?" 문득 무정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슈타이너 상사는 문간에 기대선 채 피곤한 눈을 들어 무정 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서 불똥이 퉁겼다. 무정은 어 떻게 해야 그 어색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다시 뒤를 이었다. "왜 탈영을 했었나, 슈타이너 상사?" 무정은 매우 날카로운 목소리로 몰아붙였다. 잠시 말없이 서있던 상사가 입을 열었다. "너다, 박 대위." 무정의 입이 씰룩거렸다. 두려움이 그를 엄습해오고 있었 다. 상사는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바로 그 원인이다." 상사는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손 안에는 뭔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이것처럼." 말을 마친 상사는 커피 탁자 위로 그것을 던졌다. 떽떼구르르……. 탁자 위에서 구르던 것이 그 위에 놓여있던 선글라스에 걸 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유리알같이 생긴 검고 둥근 물체. 무정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레이디버그……. 레 이디버그의 눈알, 즉 카메라를 보호하는 투명한 돔 형태의 덮개였다. "그리고 이것도 보시지, 박무정 대위님." 또 뭔가가 탁자 위에 던져졌다. 무정은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그것은 벨라스께스 하사의 명찰이었다. "너의 벨라스께스는 죽었다. 앞으로 일을 하려면 똑바로 해. 이렇게 들통날 짓일랑 말고." 맙소사, 벨라스께스 하사가……? "벨라스께스 하사는 나와 아무 관련도 없다. 아까즈끼 침 공 이후 본 적이 없어." 무정은 변명을 했다. 침착하게 대응하려고 애썼지만 목소 리에 떨림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러운 장교 놈! 그러고도 네가 당직사령이라고 할 수 있 나?" 무정은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꺼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한 가지 가르쳐주지." 슈타이너 상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를 읊조리듯 중얼거 렸다. "너는 돈루카의 정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무정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상사는 무정을 추적하고 있었으니까. "미안하지만 네가 여기서 알아낸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해. 또 다른 숨겨진 사실이 있지. 돈루카에 대한 요약된 설명? 지구연방의 고위층? 그들도 다 알고 있지는 않아. 진실을 알 고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지." "그 진실이란 게 뭐지?" 무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물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피차 감출 것도 없었다. 슈타이너 상사가 어떤 식으로 복수를 하려고 들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어쩌면 복수를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다만 개인감정을 떠나서 이미 무정의 정체 를 알고 있는 상사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그것이 의문이었 다. 이 연구소를 떠나기 전까지는 무정의 운명은 슈타이너 상사의 손에 달려있었다. "그 생물, 돈 루카……. 넌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 무정은 잠시 망설였다. 돈루카에 대한 얘기를 계속 나눠야 할 것인가? 혹시 이것은 함정이 아닐까? 무정 스스로가 모든 것을 불어버리게 만들기 위한 속임수가 아닐까?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이미 감청 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 렇게 생각할 수 없는 점이 하나 있었다. 만약 슈타이너 상사 가 유도심문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미 극비에 해당하는 내 용을 상사가 발설을 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렇게 되면 상사 자신까지 그물에 엮어 넣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상사가 단지 상황실 요원의 차원을 벗어난 연방에서 보낸 특별요원이 아닌 이상은. 물론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상사가 연방 직속의 첩보원일 가능성……. 차라리 여기서 시치미를 떼어야 할 것 인가? 그러나 무정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어차피 모 든 게 끝난 일이다. 그리고 설마 80명의 연구원들을 구한 자 신을 간첩죄로 고발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갑자 기 모든 것이 귀찮아졌고 반대로 모든 두려움도 사라져버렸 다. 이곳을 떠난다는 것이 결정된 이후. 나미를 잃는 것이… …, 선유의 죽음 앞에서 다짐했던 돈루카의 비밀을 풀었지만 그 동안 가까웠던 나미와 헤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토록 그를 허탈하게 만들었을까? 무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유전공학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생명체이지. 텔레 파시에 의해 수천 명이 서로의 사고를 공유하면서 집단적인 지능을 형성하는 것들이지." "많이 알아냈군.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냐." "전부가 아니라고?" "그렇지. 그리고 유전공학? 그건 다 헛소리에 불과해. 진 실은 따로 있어." 진실. 슈타이너 상사는 자꾸 진실을 강조하고 있었다. 진실이라 니? 진실은 이미 다 밝혀졌는데.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그 외의 다른 진실은 뭐지? 연방정부가 3개월마다 수십 명의 미 인들을 토성에 불러놓고 그 여자들 자궁에 해파리 괴물을 처 넣어 기른 뒤 그걸 뽑아내서 수천 마리들을 모아 집단적인 지능을 형성시키는 것. 그것이 진실이다. 그것이 돈루카의 진실이다. 그 외에 또 뭐가 있단 말인가? 잠시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무정이 물었다. "따로 있다고? 그게 뭐지? 그 다른 진실이?" "말해봐야 믿지 못할 테니까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그 건 인간이 만들어낸 게 아냐. 원래부터 있던 존재였지." "그런 생물이 있었다고? 그건 처음 듣는 얘기인데?" 무정은 다시 의혹을 느꼈다. 슈타이너 상사가 무정을 유도 심문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정이 모르는 사실들을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상사를 첩보요원으로 볼 수도 없는 이유가 있었다. 무정을 잡아들이는 것이 목적이라 면 왜 굳이 무정이 캐낼 수 있는 범위 외의 사실을 알려주는 것인가? 슈타이너 상사의 정체는 캐면 캘 수록 안개 속에 숨 어들어갔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단순한 상황실 요원이나 외 부에서 침투한 스파이 혹은 연방의 첩보원으로 볼 수가 없었 다.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뭔가를 가진 사나이였다. "그렇지. 넌 모를 테지. 하지만 그 생물은 원래부터 있던 거야." 슈타이너 상사가 무정을 깔보는 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걸 누군가 찾아냈다는 얘긴가?" "그런 셈이지. 그 이상은 말해봤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 지도 못하겠지만." "어디서 그런 걸 찾아냈지? 고생대의 화석 속에서 그 알이 발견되기라도 했나? 알이 부화했다는 건가? 해파리처럼 이상 하게 생긴 그 생물이?" "고생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게." 상사가 웃음을 지었다. 아니 무정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 웃는 것인지 표정을 찡그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빛이 었다. 무정은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꾹 참고 남은 질문을 마저 던졌다. "무슨 얘기지?" "무조건 네 잘난 머리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생각하지 말라는 얘기지." 슈타이너 상사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인 후 돌아섰다. 상사가 커튼을 다시 걷었을 때 무정이 물었다. "너의 정체는 뭐지?" 상사가 동작을 멈추었다. "넌 도대체 뭐 하는 자지? 그런 비밀을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이런 데서 근무하고 있는 거지?" 슈타이너 상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 그런 걸 알려주는 이유가 뭐야? 뭘 바라는 거야? 도대체 너의 심중에 숨어있는 것들이 뭐냐고?" 상사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무정은 잠시 상사의 등을 노려보고 서있다가 고개를 젓고 나서 다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떠날 건가?"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 상사가 물었다. "왜?" 무정은 귀찮다는 듯이 곁눈으로 돌아보며 되물었다. "네가 여기 온 건 선유의 죽음 때문이었지." 이런! 그가 그 비밀을 다 알고 있다니……. "이제 너는 네가 원하는 바를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나?" 무정은 잠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은 얼어붙은 공간을 녹이는 힘이 있었다. 잠시 후 무정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냥 떠나는 건가? 더 이상 이 연구소에 관심이 없나?" "소장에게 물어봐." "그건 이미 알고 있어. 그래, 넌 해임 당할 만도 하지. 연 구소의 규정들을 마구 어기고 상관의 명령까지 불복했으니 까. 하지만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남았잖아?" 슈타이너 상사는 계속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무정은 그러한 상사의 말이 날파리의 날개소리처럼 귀찮다는 듯이 대꾸해버렸다. "없어." "있을 텐데?" "없어." "정말 그럴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면서 짐을 챙기고 있던 무정이 돌아보았을 때 슈타이너 상사는 이미 가고 없었다. 102. 식당. 무정은 텅 빈 식당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목구멍에 수많은 가시들이 걸린 것처럼 매우 껄끄러웠고 음식은 톱밥이나 나무토막처럼 역겹게 느껴지고 있었다. 무정은 그가 식당에 들어서기 전에 멀리서 지켜보았던 나 미의 모습을 생각했다. 벌써 그녀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지도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나미도 무정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사라진 듯, 아니면 무정에 대한 걱정이 그러한 감정 을 넘어선 듯이 자주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무정을 찾고 있 었다. 생각 같아서는 얼른 다가가 그녀와 다시 대화를 나누 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더욱 괴로운 일이었다. 마음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칼로 째 내야 할 것이다.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다정한 대화를 나누 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것이 꼭 해결책이 될 수는 없 었다. 차라리 이 허탈한 마음 그대로 떠나야 한다. 차라리 이 아쉬운 마음 그대로 떠나야 한다. 오히려 나미와의 관계 가 불편해진 것은 이곳을 떠나기 위한 마지막 정리였다고 생 각하면 된다. 더 이상 그녀와 가까워지면 안 된다.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 그녀의 깔끔한 목소리 그녀의 앙증맞은 투정 을 더 이상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다른 길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그의 마음 속에서만 안타깝게 몸부림치고 있을 뿐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함께 떠나자고 나미에게 말하는 것,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 까? 물론 나미도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무정을 자신의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친구 정도의 관계일 뿐 그 이상은 아닌 것 같았다. 아직 나미는 무정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정이 함께 떠나자고 해도 돌아갈 그녀가 아니었다. 지금의 그녀에 게는 무정보다는 이 연구소에서 지급할 거액의 돈이 더 필요 한 것이다. 처음 만났던 그날 그녀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그럼 최소한 우리들처럼 돈에 미쳐서 가시는 건 아니군 요?> 무정은 포크를 식기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103. 숙소. 여객선 아르테미스 호는 토성 궤도에 인접하고 있었다. 무정은 모니터를 통해 그 영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르테 미스 호의 선교로부터 날아오는 영상이었다. 화면 아래쪽에 는 <부선장 로드리게스>라는 자막이 나타나 있었다. "이제 모레 오후면 도착할 겁니다. 지금 어제부터 이미 감 속에 들어간 상태죠."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군요. 하지만 쉬지도 못하고 곧 돌아가니 안 됐군요." 새로 부임한 임시 당직사령 후커 대위가 인사치레의 형식 적인 말을 보냈다. 미란다 안보국에서 오랜 기간을 근무해온 후커 대위는 아마 아르테미스 호의 승무원들과 잘 알고 지내 는 것 같았다. 무정은 숙소에서 컴퓨터를 이용해서 가끔씩 상황실의 동태 를 살피곤 했다. 그것이 한때 상황실의 총책임자였고 이 연 구소의 영웅이었던 무정에게 주어진 마지막 배려였다. 그나 마 소장의 마지막 경고를 어기고 연구원들에게 접근해서 다 시 그들에게 혼란을 조성한다거나 하면 그것으로 끝장이었 다. 그때는 아예 이 좁은 방 안에 감금시켜놓고 외부와의 연 락을 완전히 차단시켜 버릴 것이다. 컴퓨터로 상황실을 살피 는 건 고사하고 아예 컴퓨터 자체를 이용할 수 없게 만들 것 이다. 그러기에 무정은 그가 행할 수 있는 마지막 권한을 지 키기 위해서라도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지구로 돌아가면 다음 순번까지는 쉬니까요. 사실 이 우주공간에서는 여객선 안에 있는 거나 기지에 있는 거나 갇혀 지내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구로 돌아가야 제 맛 이 나죠." 로드리게스 부선장은 라틴 사람답게 낙천적인 표정에 춤추 듯 흐느적거리는 몸짓을 하며 대꾸했다. 지구로 돌아가야 제 맛이 난다……. 그것은 지금까지 몇 달 동안 무정이 들어온 얘기 중 가장 진실 된 말이었다. 맞아, 지구로 돌아가야 제 맛이 나지. 그 어떤 입에 발린 말보다도 진실 된 한 마디. 지구로 돌아가야 제 맛이 난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은 잘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 피 선유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풀었으니까. 물론 슈타이너 상사의 말이 뒤끝을 석연치 않게 하는 면도 없잖아 있지만 돈루카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이 연구소에서 벌어졌던 사건 들, 그리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그 사건들의 전체적인 윤 곽은 모두 파악했으니 더 알아내야 할 것도 없었다. 상사의 말에 의하면 아직 그가 알아내지 못한 뭔가가 있기는 하지 만. 그러나 이제는 떠나면 끝나는 것이다. 떠난다. 끝난다. 불과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이틀 후에는 이곳을 떠나가 는 것이다. 이곳의 모든 악몽들을 떨쳐버리고 떠나는 것이 다. 선유의 죽음, 맥과이어 연구원, 리뀔레 소위, 후루야마 중위, 그리고 아까즈끼의 침공……. 그 모든 사람들 그 모든 사건들에 얽혔던 기억만을 간직한 채 떠나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모든 것이. 하지만……. 하지만 어쩌면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미……. 104. 11월 8일. 숙소. 모니터에 아르테미스 호의 모습이 나타났다. 검은 장막과 그 장막 위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뒤로 하고 아르테미스 호는 거대한 한 마리의 상어처럼 유유히 물살의 흐 름을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토성 원거리 정지궤도 상의 위성에서 보내오는 그 화상을 지 켜보면서 무정은 착잡한 감정에 빠져들고 있었다. 저 거대한 인 공물고기는 내일 오후 무렵이면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아마 지 금쯤은 감속을 시작했겠지. 그러면 시간을 맞춰 이곳에서 출발 한 셔틀선이 상어 배 밑에 늘어붙는 빨판상어처럼 저 거대한 우 주선에 다가서고, 이어 두 운반체는 우주의 암흑 속에서 도킹하 고, 나는 저 거대한 여객선에 몸을 맡기고 지구를 향한 항진을 시작하겠지. 그 안에는 1년이라는 근무기간을 마치고 지구로 귀 환하는 20명의 미녀들도 있을 것이다. 근무기간. 미녀. 근무. 근무. 근무라니……. 문득 아르테미스 호의 영상 위에 그 징그러운 돈루카의 형상 이 겹쳐졌다. 흐늘거리는 물체. 흐늘거리는 생물. 흐늘거리는 돈루카. 인공적인 지능집적체.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생물. 초감각. 집단지능공유. 징그러운 모습. 그 끔찍한 괴물을 뱃속 에서 두 마리씩 키워낸 미녀들이 지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임무를 마치고. 괴물을 키워내고. 3개월에 거쳐 괴물을 키워내 고, 그 후 3개월간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3개월간 괴물을… …. 나미. 나미도 곧……. 내일. 내일이면……. 무정은 나미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괴물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선유, 선유의 뱃속에서도……. <왜 벌써 떠나나? 좀 더 놀다 가시지.> 머릿속에서 슈타이너 상사가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원 아가씨들은 그냥 두고 가나? 저 많은 미인들을 두고 그냥 떠나기가 아깝지 않나? 나미는 어쩔 텐가? 그리고 쏘냐는? 수많은 아가씨들을 집적거리더니 그대로 두고 떠나는 건가?> 상사의 목소리와 모니터 화면에서 헤엄치고 있는 돈루카, 아 니 아르테미스 호의 모습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무정은 눈을 감았다. 잠시 눈 앞에 아르테미스 호의 잔상이 흐르다가 사라졌 다. 대신 꿈틀거리는 생물. 돈루카의 모습. 무정은 눈꺼풀을 굳 게 닫고 고개를 저어 그 모습을 쫓아내려고 애썼다. 그 영상이 흩어지면서 사라질 듯 말듯……. 그러나 검은 장막으로 돈루카 의 영상을 지워버리기란 쉽지 않았다. 무정은 다른 장면들을 떠 올리려 애썼다. 지구. 지구의 푸른 하늘. 하늘을 떠도는 흰 구 름. 가볍게 미끄러지면서 나는 새. 그 새가 구름 사이를 헤엄치 고, 문득 구름이 새를 삼켜버린다. 그 구름이 꿈틀거린다. 구름 은 온몸을 흐늘거리고 있다. 앞으로 삐져나온 촉수. 수많은 짧 은 다리……. "헉!" 무정은 짧은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 울이 느껴졌다. 화면에는 여전히 아르테미스 호의 모습이 비치 고있었다. 무정은 모니터를 꺼버리고 다시 눈을 감고 몸을 한 껏 뒤로 젖혀 의자에 늘어졌다. 순간 모든 영상이 사라졌다. 어둠. 눈꺼풀에 가린 어둠 속에서 다시 뭔가 스물거리고 있었다. 뭔 가 그 모습을 드러내려 애쓰고 있었다. 무정은 모든 형상들, 모 든 잡념을 쫓아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나의 형상이 나타나다 가 사라져 버렸다. 이어 뭔가 다가오려다가 사라져갔다. 끝난 거야. 모든 게 끝난 거야. 정말 끝났을까? 정말 모든 게 끝일까? 그래, 이제 끝났어! 다 끝난 거라고! 그래, 끝난 게 뭐지? 모든 게 끝난 거야! 그 모든 게 뭔데? 뭐가 끝난 건지 확실히 말해봐! 이 연구소. 돈 루카. 여기에서 할 일이 다 끝났지. 끝났다고? 정말? 나미도? 문득 나미의 얼굴이 빠르게 다가왔다. "저는 정나미라고 해요. 한국 출신이고요." 무정은 눈을 더욱 꽉 감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나미의 얼굴 나미의 목소리를 떨쳐버리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효과 를 보았는가? 어느 순간 나미의 얼굴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스물스물 피어나는 형상……. "이대로 떠날 건가?" 슈타이너 상사가 물었다. 105. 식당 입구. 쏘냐 마랸스까가 식당을 나서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무정이 처음 만났을 때와 어딘가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체중의 증가 때문일까? 아니면 뱃속에 있는 돈 루카에 의한 부작용? 어쨌든 그녀는 어딘가 창백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고 그것은 다른 많은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쏘냐?" 무정이 그녀 앞으로 나서며 인사말을 던졌다. "세상에! 박 대위님?" 쏘냐는 파리한 얼굴에 놀란 빛을 띄워 올렸다. 그 표정은 곧 반가움으로 변해갔다. "오랜만이군요." 무정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정말 오랜만이네요. 세상에, 요즘 잘 안 보이던데 무슨 일이 있나요?" "네, 그럴 일이 있어서요." 쏘냐는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 하긴, 그건 당연한 일이었 다. 이 연구소처럼 통제가 심하고 정보교류가 꽉 막힌 곳에서는 서로 관련된 업무를 하지 않는 이상 타인의 신상에 대해 알기가 어려웠다. 당사자가 직접 알려주기 전까지는. 쏘냐는 무척 설레는 듯한 표정으로 질문을 계속했다. "어떤 바쁜 일이 있나요?" "예, 그런 셈이죠." "그래도 너무 안 보이는 건 좀 이상하더군요." "때로는 그럴 수도 있죠." "그래요?" 쏘냐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창백한 얼굴에 약 간의 핏기가 되살아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예, 여긴 돈 루카 연구소이니까요." "참, 요즘 나미 본 적 있어요?" 갑자기 쏘냐가 화제를 돌렸다. "예? 못 봤는데…… 왜요?" 나미……라는 단어에 무정의 가슴이 덜컹했다. "요즘 힘이 없어 보여요, 마음이 착잡한 것 같기도 하고. 아 무래도 당신 때문이 아닐까요?" "나 때문이요?" "예, 당신이 안 보이기 때문에…… 혹시 나미와 싸운 건 아닌 가요?" "아, 아닌데요." 나미가 착잡하게 보인다? 그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친하게 지내던 남자와 다투었고, 더욱이 그 이후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즐거워 할 여자는 없으니까. "가끔은 회의적인 말도 던지더군요." 회의적인 말? "어떤 말이요?" "여기를 떠나야 하는가, 하는 얘기죠." 무정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런 얘기를 하던가요?" "예, 하지만 그냥 아무 뜻 없이 던지는 것 같았어요." "음……." 무정이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갑자기 나미에게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 알 수가 없더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항상 밝고 항상 긍정적 으로 행동하던 그녀가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요?" 무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 겨있을 뿐이었다. "나미에게 그렇게 갑작스런 변화가 왔다는 것은…… 뭔가 극 적인 사건이 있었거나 또는 어떤 일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볼 수 도 있는데, 그 대상이 당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무정의 눈에쏘냐의 아랫배가 들어왔다. 연구원 가운을 걸치 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밑으로 불어난 아랫배가 느껴지는 것 같 았다. "혹시 나미에게 어떤 안 좋은 얘기를 한 적이 있나요?" 지금도 그 뱃속에서는 돈루카가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박 대위님?" 그 괴물은 내일이면 나오게 된다. "어디 불편하세요?" 내일이면 그녀의 몸 밖으로……. "박 대위님?" 그리고 나미의 몸 속에 새로운 싹이……. 더 이상 쏘냐의 아랫배를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정은 그 자리를 떠나 숙소를 향해 걸었다. 쏘냐에게 인사도 하지 않 은 채. 뒤에서는 쏘냐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불러대고 있었다. 106. 숙소. 아르테미스 호는 토성을 향해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화면의 한쪽 구석에 나타난 박스 안에 토성과 위성궤도가 나 타나 있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아르테미스 호의 모 습이 보였다. 아르테미스 호는 계속 다가오고 있다. 무정은 숙소에 틀어박혀 있다. 나미는 못 본지 오래 되었고……. 슈타이너 상사는 생환한 이후 무정에게는 더 이상 얼굴을 보 이지 않은 채 다시 상황실 근무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슈타이너 상사. "왜 벌써 떠나나? 좀 더 놀다 가시지." 슈타이너 상사가 빈정거렸다. "연구원 아가씨들은 그냥 두고 가나? 저 많은 미인들을 두고 그냥 떠나기가 아깝지 않나? 나미는 어쩔 텐가? 그리고 쏘냐는? 수많은 아가씨들을 집적거리더니 그대로 두고 떠나는 건가?" 도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너의 벨라스께스는 죽었다. 앞으로 일을 하려면 똑바로 해. 이렇게 들통날 짓일랑 말고." 그는 어떻게 살아 돌아왔을까? "더러운 장교 놈! 그러고도 네가 당직사령이라고 할 수 있 나?" 왜? 그는 무정에게 복수하지 않았을까? "내가 한 가지 가르쳐주지." 슈타이너 상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를 읊조리듯 중얼거렸 다. "너는 돈루카의 정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왜? 그는 무정에게 돈루카에 대한 새로운 의문을 던져주었을 까? "미안하지만 네가 여기서 알아낸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해. 또 다른 숨겨진 사실이 있지. 돈루카에 대한 요약된 설명? 지구연 방의 고위층? 그들도 다 알고 있지는 않아.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지." 어떻게, 그는 돈루카의 내막에 대해 훤히 알고 있을까? 그리고 그 진실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많이 알아냈군.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냐." "전부가 아니라고?" "그렇지. 그리고 유전공학? 그건 다 헛소리에 불과해. 진실은 따로 있어." 진실이란 것이……. 하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은 끝났 으니까. 선유의 죽음에 얽힌 비밀도 풀었으니까. 연구소이든 소 장이든 슈타이너 상사든, 혹은 연구원들이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일이면 이 끔찍하기 그지없 는 곳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연구원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정말일까? 정말 그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일까? 괜히 현실에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비애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터질 것 같이 비참한 심정을 감추기 위한 것은 아닐까? 아냐, 정말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이미 선유와의 약속은 지 켰으니까. <선유, 정말 선유?> 그래, 선유와의 약속은 이미 지켰어. <선유…… 선유만이 네 인생의 전부라고?> 그래, 그…….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걸 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지. 그럼 앞으로는 여자를 사귀지 않겠다는 말인가?> 아니, 그렇진 않지. <그래, 바로 그거야. 넌 앞으로도 여자가 필요한 거야. 그리 고 그 여자는 먼 곳에 있지 않아. 바로 여기에 있어.> 바로 여기에……? <그래, 바로 이 연구소에 있잖아. 바로 너의 가까이에. 조금 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 그 여자……. 바로 그 여 자 말야.> 나미……. <연구원 아가씨들은 그냥 두고 가나?> 슈타이너 상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려왔다. <너는 돈루카의 정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슈타이너 상사. 연구실. 돈루카. 해삼. 괴물. 자궁. 연구원. 나미……. <저는 정나미라고 해요. 한국 출신이고요.> 나미! 무정은 튀듯이 일어나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106. 복도. 무정은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의 눈에는 광기가 일고 있었다. 아니면 오히려 가장 평안한 상태일 수도 있었다. 그의 호흡은 가빴지만 악물고 있는 그의 이는 그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이미 퇴근시간이 지 나 있었다. <울적해 보이시는군요?> <저는 정나미라고 해요. 한국 출신이고요.> 빠른 속도로 벽들이 다가오고 뒤로 사라져갔다. "그런데 무정 씨는 어떤 일을 하시죠?" 그녀 눈에서 호기심이 빛났다. 사람들이 놀란 듯이 비켜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최소한 우리들처럼 돈에 미쳐서 가시는 건 아니군요?" 어떤 이들은 비상사태라도 발생했는가 싶었는지 주변을 두리 번거리고 있었다. "자꾸 이렇게 띄우실 거예요? 괜히 쑥스럽게." 나미가 가볍게 주먹으로 무정의 어깨를 툭 쳤다. 곧 눈 앞에 휴게실 입구가 나타났다. <다 필요 없어요. 내고통을 어느 누가 알까요?> 선유의 외침. <저는 정나미라고 해요. 한국 출신이고요.> 나미의 목소리. <……연구원들과 가까이 지내진 말게, 절대로!> 소장의 목소리. <식사 시간에는 항상 나보다 빠르군요?> 다시 나미. <뭐, 하도 횡설수설 해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악마의 씨가 어쩌니 떠들더군요.> 슈타이너 상사. <삼 개월에 한 번씩 진단을 받아야 한다더군요.> <저는 쏘냐 마랸스까에요. 폴란드 출신이죠.> <슈타이너 중사는 훌륭한 군인일세.> <지금은 거의 3킬로그램이 더 불었어요.> <연구원 아가씨들은 그냥 두고 가나?> <이곳에 온 걸 환영하네. 별로 화려한 곳은 아니지만.> <왜요? 제가 임신한 여자처럼 보이나요?> 무정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입구로 뛰어들어갔다. 107. 휴게실. 나미는 바에 기대고 서 있었다. 멍청하게 생긴 로봇은 주문한 음식을 준비하느라 부지런히 움 직이고 있었다. 나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휴게실 한쪽 구 석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쏘냐가 따라서 웃음을 짓고 앉아있 었다. 나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웃음 짓는 그녀 표정의 어느 한 구석에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그림자가 느껴졌다. "포도 주스 두 개와 애플 파이, 여기 있습니다." 로봇이 바 위에 음식이 담긴 쟁반을 올려놓았다. "수고해, 멍청이." 나미는 웃음을 지으면서 대꾸하고는 쟁반을 들어올리려 했다. 그때,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이어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 다. 나미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을 돌아보았다. 무정이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피해 양 옆으로 물러섰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 듯 수많은 사람들이 쫘악 갈라져 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무정은 그녀 앞까지 닥쳐왔다. "어머!" 나미는 비명을 질렀다. 무정의 손아귀가 그녀 손목을 우악스 럽게 나꿔챘다. "무슨 짓에요?" 그녀는 불가항력적으로 무정의 가슴에 안기면서 외쳤다. 너무 나도 순간의 일이었다. "이, 이게…… 읍!" 거친 그의 팔뚝이 그녀의 몸을 감싸안았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으…… 으읍!" 무정의 입술이 그녀 입술을 거칠게 탐했고 그녀의 위아래 이 사이로 혀가 밀고 들어왔다. 나미는 너무나도 급작스런 일에 당 황하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도무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 러던 어느 사이 무정의 두 손이 나미의 등을 쓸며 허리로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이어 그녀의 힙에 느껴지는 그의 강한 손아귀. 무정은 그녀의 온몸을 탐하고 있었다. 혀로, 입술로, 가슴으로, 손바닥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놓 아주지 않았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지? 나미는 정신이 아찔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서 쏟아지던 박수소리 뿐이었다. 108. 11월 15일. 지구행 여객선 <아르테미스> 호 연회실. 문을 여는 순간 부드러운 선율이 그의 귀에, 그리고 온몸에 스며들었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품위 있는 의상으로 어우러져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나 아갔다. 이런 사람들, 저런 사람들, 그리고 그는 멈춰 섰다. 저만치 앞에 그녀가 눈에 띄었다. 그녀 앞에는 몇 명의 젊은 이들이 둘러싸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혹은 그의 눈에는 추근 거리는 놈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울적한 표정 으로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서서 가끔 칵테일 잔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좋은 밤이군요."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잠시 후 차분해진 듯 그를 뚜렷이 노려보는 그 눈빛. 눈 앞에 번쩍이는 불빛. 그는 왼쪽으로 돌아간 고개를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오른쪽 뺨이 얼얼했다. 무의식 중에 뺨을 손 으로 문질렀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그녀의 오른 손에는 칵테 일 잔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자세로 보건대 왼 손으로 뺨을 때린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왼손잡이던가?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순간 그녀가 뒤돌아 서서 걸어갔다. "잠깐만요!" 그는 뒤따라가며 외쳤다. "정나미 씨!"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아 가더니 곧 객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닭 쫓던 개처럼 그는 멍하니 서있었다. 오른쪽 뺨이 얼얼했 다. 그녀가 왼손잡이였나? 109. 아르테미스 호 갑판. 무정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나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정은 아직도 얼얼한 오른쪽 뺨을 어루만지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객실로 돌아간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녀 의 객실구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그는 멈춰 섰다. 눈 앞에 엄청난 장관이 나타났다. 거대한 목성이 온 하늘을 다 가리고 있었다. 줄무늬가 가득한 거대한 오렌지 같기도 했고 혹은 공처럼 보이 기도 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크고 작은 위성들이 엄마 주변 에 잠든 아기 고양이들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무정은 그 경치를 감상하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방 을 향해 다가갔다. 방 문 앞에 멈춰선 그는 잠시 망설였다. 문 을 두드릴 것인가 말 것인가! 아직도 나미는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이미 한 달이 지 났음에도.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 무정 자신은 나미를 구했지만 내막을 모르는 나미는 그렇 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나미는 무정이 뭔가에 집착하여 자신의 일을 망쳐놓은 것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3 개월 간 일한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한 푼 도 건지지 못한 채 쫓겨난 것이다. 그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오직 그녀를 쫓는 무정이라는 작자의 광기 하나 때문에. 물론 무정은 그녀를 구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정의 생각일 뿐 이었고 나미는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 이다. 그리고 좀 더 냉엄하게 생각한다면 무정은 전혀 나미에게 도움을 준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미는 단지 6개월 동안 뱃 속에서 생명체 두 개를 키우고 지구상의 어느 연구소보다도 몇 배 비싼 급료를 받으면 끝나는 것이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윤 리관 어쩌구 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나미는 전혀 손해볼 것이 없 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아닌 짐승이라면 어떠할 것인가? 6개월 간 실험에쓰인 대가로 다른 동료보다 몇 배나 좋은 환경에서 산다면 결코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냐! 우리는 인간이야!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무정은 세차게 머리를 젓고 나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인터컴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납니다. 박무정입니다." 무정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리 꺼져욧!" 나미의 목소리는 앙칼졌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나도 나름대로……." "정말 이렇게 나올 거에요? 빨리 안 가면 경비원을 부를거에 요!" "이것 봐요, 나미 씨. 왜 그렇게……."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말아요!" 나미는 계속 무정의 말을 가로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나를 미워하는 이유가 뭐죠? 3개월 전에 이 여객선에 서 먼저 다가온 건 나미 씨라고요." 이왕 갈 데까지 간 것이다. 무정은 뻔뻔스럽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 다. 그날 연구소 휴게실에서 했던 것처럼 그렇게. "당신 땜에 난 망했어요!" "뭐가 망했다는 겁니까? 이렇게 무사히 귀향을……." "지금 장난하는 거에요? 난 일자릴 잃었어요! 게다가 3개월간 일한 급료도 한 푼 못 건졌다고요." "그거…… 제가 보상하겠습니다." "뭐라고요?" 나미의 목소리에 변화가 있었다. 그 목소리에서 어이가 없다 는 듯한 느낌이 배어 나왔다. "선유의 몫을 드릴게요. 선유가 받은 1년치 급료 전체 말입니 다. 그걸 저에게 맡겼거든요. 그래서 그걸 나미 씨에게 드리려 고 합니다." "내가 왜 그걸 받아야 하죠?" 나미의 목소리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사라졌다. 다만 차가운 기운만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무정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계 속뻔뻔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실제로는 긴장하고 있었지만 그 빛을 감추고. "나미 씨가 그 돈을 관리해야 하니까요. 뿐만 아니라 내 재산 을 전부……." "그게 무슨 말이죠?" 나미는 당황하고 있었다. "내 재산을 관리해 줘요. 나는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만으로 도 평생 쓸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걸 나미 씨가 맡아줘요." "내가 그걸 왜 맡아요?" "그거야……." 무정은 쓴 웃음을 짓고 나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 아내가 될 거니까요." "뭐에욧?" 탁! 뭔가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나미가 뭔가를 들어 문에 던진 것 같았다. "그런 허튼 소리 말고 빨리 꺼져요! 안 그러면 경비원을 부를 거에요!" "이, 이봐요, 나미 씨. 나는……." "어서 꺼져요! 당신이 날 농락했다고 이를 테니까." "알았어요, 진정해요." 무정은 마치 나미가 눈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저어 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빨리 가욧!" 나미가 다시 외쳤다. 무정은 머리를 긁으며 돌아섰다. 눈 앞 에 목성의 자상한 모습이 보였다. 터벅거리는 거름으로 창가에 다가간 그는 거대한 창 밖에 펼쳐진 위대한 우주의 장관을 말없 이 바라보았다. 정말 우주는 위대했다. 우주는 변함이 없었다. 수백 년 전 갈릴레이가 목성의 4대 위성을 발견할 때나 지금이 나 우주는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그 자태를 이어가고 있었다. 문득,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가 독백하던 마지막 대사가 떠올랐다. 무정은 마치 자신이 연극배우라도 된 것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어 중얼거렸다. "그래, 오늘은 그만 생각하자. 내일이 있으니까." 목성의 달 하나가 지평선 뒤로 숨고 있었다. 저건 누굴까? 선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얼음으로 덮인 에우로파가 부드럽게 빛났 다. 후후, 나미일 거야. 얼음 같은 여자. 목성. 가장 위대한 행성. 로마 신화에서 신들의 왕 유피테르의 이름을 딴 행성. 그 거대함에 가려 토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토성은 그곳에 있을 것이고 위성 티탄도 그대로 있을 것 이다. 그리고 티탄의 궤도상에는 돈 루카 연구소가 있고, 슈타 이너 상사, 마이어 중위, 그리고 쏘냐…… 쏘냐 마랸스까. 쏘냐……. 그녀는 돈루카를 분만하고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갔을 것 이다. 다른 연구원들처럼. 그리고 다시 그 특유의 매력적이고 도전적인 눈빛을 빛내며 행동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신감 있게. 슈타이너 상사…….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러한 위기상황에서도 살아올 수 있었던 데는 어떤 힘이 작용한 것일까? 이상한 생명체 돈루카. 집단적인 사고와 지능을 공유하는 신비로운 고등생물. 그리고 그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슈타이너. 혹시 그가…… 만약에 그가……. 무정은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 막 떠오르려던 하나의 가능성 을 떨쳐버렸다. 그와 함께 돈 루카에 대한 모든 미련도 떨쳐버 렸다. 지금 그의 곁에는 새로운 미래가 있었다. 그를 돈 루카로 보냈던 여인 한선유를 대신하는 또 다른 여 인. 어쩌면 그가 돈 루카로 가기로 작정한 것은 나미를 만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선유의 죽음이 단지 죽음으로 끝난 것 이 아니라 나미라는 다른 여인을 구원하면서 그 자신의 새로운 짝을 찾은 것일 수도 있었다. 무정은 뒤를 돌아보았다. 나미의 방문이 살짝 열리면서 빼꼼이 내다보는 나미의 얼굴이 보였다. 무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창 밖을 향했다. 목성은 여전히 은은한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